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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1일 금요일

천국과 지옥, 예수의 뒤통수를 치다 - 5. 구원의 의미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익숙하다. 많이 들어본 말이다. 그런데 정확이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반적으로 이 말은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당신은, 당신이 죽은 후에 천국이라고 불리는 휘황찬란, 삐까뻔쩍한 천상 도시로 이주할 것을 믿습니까?"
그래서 이 말을 철썩같이 믿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별 의미가 없다. 그저 내가 사는 곳이 옮겨질 뿐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죽음이 별 의미가 없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도 별로 의미가 없다.
오직 의미가 있는 것은 내가 죽고 난 이후에 어디론가 이주하는 것과 그와 관련된 일련의 체계들 뿐이다.

그런데 과연, 성경도 구원을 죽음 이후의 천상도시 입주라고 말하고 있을까?
신약성서에서 구원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맥락 안에 놓여 있는데(말이 조금씩 어려워지네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사후 천상도시 입주'와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가?
사실, 구원이 사후 천상도시 입주라면 예수는 헛 죽었다. 하나님이 그냥 자기 잘 믿는 사람들 골라서 천상도시로 데려가면 그만이다.
괜히 자기 아들 죽여놓고 그거 알아주지 않는다고 심술 부리는 하나님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

내 생각에 구원을 '사후 천상도시 입주'로 생각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앞 글에서 이미 말한 것처럼, 성경에는 천상도시라는 것 자체가 성경적이지 않기 때문이고
구원이 사후 천상도시 입주가 되버리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치자' 정도밖에는 아무것도 아닌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도 '구원' 이라는 단어를 성경 검색창에 넣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개역 개정판을 기준으로 '구원자'를 포함하여 '구원'이라는 단어가 쓰인 구절이 구약에만 387절이다.
엄청나다. 구원은 구약에서도 매우 핵심적인 개념임을 알 수 있다.
특별히, 신약성서에 영향을 많이 미친 시편과 예언서에 집중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신약도 마찬가지이다. 구원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절수가 154개이다. 마찬가지로 신약에서도 매우 중요한 개념이 '구원'임을 알 수 있다.

먼저, 구약성서가 말하는 구원의 의미들을 찾아보자.

첫째, 구원의 일차적이고 핵심적 의미는 '임박한 죽음의 모면'이다.
성경에서 구원은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죽음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다.
하지만 또한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죽을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있고,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구원'을 언급한다.
그래서 구원이 직접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임박한 죽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창세기에서 '구원'은 6번 사용되었다. 그 중 다섯 번이 '목숨'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나머지 한 번도 같은 의미이다.
모든 구절들을 일일이 언급할 필요도 없이 구약에 나와있는 '구원'이라는 구절들을 읽어보면
그 의미가 '임박한 죽음의 모면'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의 많은 구절들은 구원을 '하나님의 보호'와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보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목숨과 목숨을 기반으로 서 있는 삶의 모든 것들을 보호하신다는 의미에서 '구원' 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

이런 기본 개념에서 약간의 부수적 개념 확장이 일어나는데,
첫 번째 확장은 나라의 멸망과 관련해서 '민족적 죽음의 모면'으로 이루어진다.
개인의 죽음이 국가의 멸망으로 확장 해석된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나라를 지키시는 것을 구원으로 받아들이고,
나라가 멸망한 사건을 하나님의 구원이 떠나간 사건으로 이해한다.

또 다른 확장은 '목숨에 대한 위협으로부터의 모면'이다.
시편의 많은 구절은 가난과 빈궁과 악한 권세자들의 억압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구하고 있는데 이는 그런 위협들이 궁극적으로 목숨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환란에서, 멸망자에게서, 악인들에게서 구원해 달라는 말은 이런 의미를 가진다.

참고로 말하면,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영혼'은 히브리말로 '네페쉬'라고 읽는데
이 말의 의미는 '목숨'이다.
개역성경에서는 영혼이라고 번역했지만, 공동번역은 본래 의미를 살려서 '목숨'이라고 번역을 했고 표준새번역은 본래 의미에 약간의 거룩성을 담아서 '생명'이라고 번역을 했다.

이것이 구약에 나온 '구원'의 핵심적인 의미들이다.
당연히, 죽어서 어디를 간다는 개념은 조금도 없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구약의 '구원' 구절들을 읽으면 그 뜻이 분명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신약성서에서 구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구약과 기본적인 틀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물론 의미 확장은 일어났지만 기본적인 의미가 바뀐 것은 아니다.

복음서를 보면, 구원이라는 말이 가장 많이 쓰인 곳이 병자를 치유하는 상황임을 곧 알게 된다.
복음서는 지속적으로 질병에서 고침을 받는 것이 구원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구약에서 쓰인 구원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임박한 죽음에서 구출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일차적이고 핵심적인 의미는 '임박한 죽음에서 구출'되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은 죽음 이라는 인간 실존과 떨어질 수 없는 사건이다.

그런데,
신약성서에서는 구원이라는 의미의 신학적 확장이 일어난다.
'임박한 죽음에서의 구원'이
'죽음 자체로부터의 구원'으로 의미가 확장된 것이다.
복음서의 몇몇 구절에서 보이는 '죄로부터의 구원'은 이런 맥락 위에 서 있다.
사실, 죄로부터의 구원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에 대한 신학적 표현이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기독교 신학 안에서 죽음은 죄와 직결되어 있다.
아담 사건이 기독교 안에서 해석되면서, '죽음은 죄 때문이다' 라는 절대명제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의 대가 바울은
죄의 댓가는 죽음이다라고 로마서 6장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죄로부터의 구원'은 죄책감의 해방이나 윤리적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죄의 권세, 죄의 댓가 즉 죽음으로부터의 해방, 혹은 모면, 혹은 극복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죄로부터의 구원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다(더 어렵게 말했나?).

이러한 신학적 해석 위에 서 있는 사람이 사도바울이다.
바울은 사력을 다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매달리는데 그 이유가 바로 지금까지 논의한 구원의 문제 때문이다.
바울은 죄로 말미암은 죽음의 문제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 해결되었다고 보았다.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은 죽음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을 초월해 우리 육체를 벗은 영혼이 천상도시로 이주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에게 있어 구원은 죽음의 초월이 아니라 죽음의 극복이다.
그리고 이 극복은 오직 부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즉,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 그것이 구원이다.

한 가지 추가로 언급하자면,

친유대적 서신인 히브리서나 야고보서, 베드로서에서 자주 눈의 띠는 문구가 있는데
바로 '영혼의 구원'이다.
이 말은 마치 우리가 죽어서 육체를 벗어난 영혼이 천상도시에 간다는 것처럼 들린다.
정말 그런가?

여기에서 쓰인 '영혼'은 헬라말로 '프쉬케'라고 읽는다.
이 단어는 서두에 언급한 히브리어 '네페쉬'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다.
즉, 이 단어의 일차적 의미는 '목숨'이다.
같은 문구가 복음서에도 등장한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다" 라는 주님의 말씀이다.
여기에 쓰인 '목숨'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서에서 '영혼'으로 번역한 '프쉬케'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혼구원'은 육체를 벗어난 영혼이 천국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목숨, 우리 생명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에 관하여 정리하면 이렇다.
구원은 궁극적으로 죽음의 문제를 다룬다.
일차적 의미는 임박한 죽음, 혹은 죽음의 위협의 모면을 의미한다.
기독교 신앙에서 이런 구원의 의미는 신학적으로 해석이 되는데
죽음의 뿌리인 죄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죄로부터의 해방은
1. 죄의 댓가인 죽음의 문제가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완전하게 해결된 것을 의미하고
2. 죽음의 근본적 뿌리인 죄 혹은 악의 문제가 세상에서 해결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이어지는 글들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다룰 것이다.

사실, 이번 글을 쓰면서 마음이 좀 조급했다.
아이들 데리고 본토로 비전트립을 준비하면서, 준비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시작한 글 급하게 마치느라 글이 더 엉성해졌다.
이후에, 수정해야지 하는 맘으로 일단 글을 마무리한다.

다음 글에서는,
그렇다면 사후 천상도시 입주를 믿든지 부활을 믿든지, 모두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굳이 사후 천상도시 입주를 반대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해 쓰려고 한다.
사후 천상도시 입주, 흔히 쓰는 말로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왜 복음이 아닌지에 관한 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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