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영
들어가며
도대체 성령이 뭐기에 그 난리들일까?
나는 어릴 적 근본주의식 성서읽기와 오순절식 은사주의가 결합된 독특한 환경에서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였고 그런 환경에서 10대를 보냈다. 지금의 나를 보면 상상조차 힘들겠지만...
아무튼 그 땐, 사도행전을 기반으로 근본주의식 문자적 해석을 통해 오순절식 성령 이해가 절대적이고 온당한 진리라고 믿었다. 더 나아가,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방언을 해야 성령을 받은 것이라는 인식도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다.
사실 내가 속한 교단은 줄곧 장로교였는데, 장로교가 성령에 대해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였다. 장로교에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면 성령을 받은 것이라는데(고전 12:3) 이런 밍밍한 종자들 같으니라구, 이리 생각했다.
양 진영 사이에 이런 논쟁은 여전하다. 한 쪽은 다른 쪽을 향해 밍밍한 율법주의자라 욕하고 다른 쪽은 천박한 것들이 기독교를 모독한다고 비웃는다. 욕과 비웃음, 과연 누가 이길 것인가?
그런데 이런 갈등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닌 듯 하다. 성서를 들여다보면 2천 년 전부터 이미 이런 갈등이 존재했다. 고린도교회가 그랬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방언이나 예언을 중시하는 열광주의자들이 있었던 듯 하고, 그로 인해 교회가 분열되고 갈등이 있었던 듯하다. 사실 고린도전서는 이런 상황에 대한 바울의 해법으로 기록된 편지이기에 오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어쨌든 성령에 관한 이야기는 뜨거운 감자와 같다. 성서가 성령에 대해 이렇다 할 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면 우리가 성령에 관한 성서의 이야기 아래에 흐르고 있는 ‘이야기 되지 않는 전제’를 모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떤 학자는 성령을 ‘다양한 얼굴’이라고 표현했는데, 이제 그 얼굴들을 들여다보자. 히브리성서에서부터 복음서, 그리고 바울에게까지 이르면 중요한 얼굴들은 익히게 되지 않을까 싶다.
1. 성령, 그 편협한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