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영
들어가며
도대체 성령이 뭐기에 그 난리들일까?
나는 어릴 적 근본주의식 성서읽기와 오순절식 은사주의가 결합된 독특한 환경에서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였고 그런 환경에서 10대를 보냈다. 지금의 나를 보면 상상조차 힘들겠지만...
아무튼 그 땐, 사도행전을 기반으로 근본주의식 문자적 해석을 통해 오순절식 성령 이해가 절대적이고 온당한 진리라고 믿었다. 더 나아가,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방언을 해야 성령을 받은 것이라는 인식도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다.
사실 내가 속한 교단은 줄곧 장로교였는데, 장로교가 성령에 대해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였다. 장로교에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면 성령을 받은 것이라는데(고전 12:3) 이런 밍밍한 종자들 같으니라구, 이리 생각했다.
양 진영 사이에 이런 논쟁은 여전하다. 한 쪽은 다른 쪽을 향해 밍밍한 율법주의자라 욕하고 다른 쪽은 천박한 것들이 기독교를 모독한다고 비웃는다. 욕과 비웃음, 과연 누가 이길 것인가?
그런데 이런 갈등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닌 듯 하다. 성서를 들여다보면 2천 년 전부터 이미 이런 갈등이 존재했다. 고린도교회가 그랬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방언이나 예언을 중시하는 열광주의자들이 있었던 듯 하고, 그로 인해 교회가 분열되고 갈등이 있었던 듯하다. 사실 고린도전서는 이런 상황에 대한 바울의 해법으로 기록된 편지이기에 오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어쨌든 성령에 관한 이야기는 뜨거운 감자와 같다. 성서가 성령에 대해 이렇다 할 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면 우리가 성령에 관한 성서의 이야기 아래에 흐르고 있는 ‘이야기 되지 않는 전제’를 모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떤 학자는 성령을 ‘다양한 얼굴’이라고 표현했는데, 이제 그 얼굴들을 들여다보자. 히브리성서에서부터 복음서, 그리고 바울에게까지 이르면 중요한 얼굴들은 익히게 되지 않을까 싶다.
1. 성령, 그 편협한 이름
성서에는 성령을 일컫는 다양한 표현들이 나온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하느님의 영’, ‘주의 영’, 때로는 번역에 따라 ‘주의 신’, ‘하느님의 기운’ 등이 있다.
신약성서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표현은 ‘거룩한 영(한자어로 성령)’인데, 하느님의 영, 주의 영이라는 표현도 자주 나온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표현도 등장한다(롬8:9).
성령이라는 단어는 ‘거룩한 영’이라는 표현을 한자를 사용해 한 단어로 붙여놓은 말이다. 그런데 헬라어 성서에서 맥락상 하느님의 영으로서 성령을 표현하는 구절의 상당수는 ‘성령’이 아니라 그냥 ‘영’이다. ‘거룩한’이라는 수식어가 안 붙어 있는 곳이 더 많다. 그리고 당연히 그 ‘영’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영, 귀신을 의미하는 더러운 영에도 동일하게 사용된다.
우리에게 성령은 일종의 고유명사로 각인되어 있고, 성령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삼위일체의 한 위격으로 또 다른(??) 하느님이신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런 잘못된 인식은 성서 원어의 심층적 의미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성령’으로 번역한 데서 기인한 문제들이다. 마치 ‘하늘나라’를 한자로 ‘천국’이라고 번역함으로 인해 생긴 오류와 비슷하지 싶다.
성령은 고유명사라기보다는 하느님의 영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하느님의 영은 거룩하기도 하고 지혜이기도 하고 순결하기도 하다. 그 영은 바람이기도 하고 생명이기도 하고 혁명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는 성령이라는 단어에 갇힘으로 인해 성서가 말하는 하느님의 영에 대한 풍성한 의미들을 잃어버렸다. 하느님의 영에 대한 다양한 뉘앙스들을 잃어버림으로 인해 하느님이 영이라는 본질적 개념과도 너무 멀리 떨어져 버렸다. 그 결과 우리에겐 ‘성령’이라는 편협한 이름만 남겨진 셈이다.
하느님의 영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위해서는 하느님의 영을 다층적으로 이해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 성서가 말하는 의미로서의 성령을 알 수 있고 그 영의 힘을 덧입을 수 있다.
또한 하느님의 영에 대한 다양한 표현만큼이나 성서 자체가 성령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입장이 다양하다. 물론 하느님의 영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다라진 것은 아니지만 강조점이 바뀌고, 따라서 적용점도 달라진다. 이런 차이점들을 무시하면 오해가 생기고 억지로 성서를 해석하게 된다.
일단 성령이라는 고유명사로서의 개념을 내려놓자. 그리고 하느님의 영이 얼마나 다양한 층위로 표현되고 있는지를 기억하고 살피자. 그리고 성서 각 권마다 성령에 대해 표현하는 상이한 관점들을 그 책이 위치한 상황 속에서 파악하자. 그러면 약간의 답을 얻을 수 있을 듯하다.
2. 히브리성서가 말하는 하느님의 영
신약성서에는 하느님의 영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이 매우 빈번하게 나온다. 근본주의 혹은 세대주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성령의 역사가 예수 사건 이후에야 시작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 사건 이후의 시대를 ‘성령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표현은 마치 예수 이전에는 하느님의 영이 전혀 활동하지 않다가 오순절 사건 이후에 하느님의 영이 모습을 드러낸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세대주의자들은 이렇게 믿고 있는데, 요한복음 7장 39절에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않았다’라는 구절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이 구절은 ‘예수의 영광’과 ‘성령의 보편적 임재’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말씀이지 그 이전엔 성령이 활동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아니다. 사실 성령은 하느님께서 이 세계를 만드실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활동하고 계시고 모든 성서는 이 사실을 기반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별히 신약성서에서 언급되는 성령은 히브리성서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하느님의 영이라는 맥락 위에 서 있다. 물론 신약성서가 히브리성서에 비해 하느님의 영을 강조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거나 히브리성서의 개념을 변형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창세기 1장에서부터 등장하는 하느님의 영은 창조세계 안에서 활동하는 하느님의 현존과 능력을 의미한다. 우리말로 다시 풀어보면 ‘하느님의 기운’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 하늘을 거처로 삼고 계신 하느님께서 이 땅위에 자신을 계시하고 개입하시는 과정, 그리고 그 매개가 바로 하느님의 영이다. 하느님은 자신의 영으로 이 세계에 생기를 불어넣으신다.
우리가 ‘영’ 혹은 ‘신’으로 번역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는 본래 ‘호흡’, ‘바람’이라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자신의 호흡을 사람의 코에 불어 넣어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은 인간 안에 하느님의 현존을 통해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이것은 하느님의 영이 이 세계 안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존재가 죽을 존재로 바뀌게 된데 있다.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바람이 다시 빠져나가 곧 죽게 될 존재가 된 것이 바로 범죄의 결과였다.
창세기에서 인간의 수명이 급격히 줄어들게 되는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찾을 수 있다. 창세기 6장 3절에서는 ‘하느님의 영이 영원히(히브리어에서 영원히는 단지 ’매우 긴 시간‘을 의미한다.) 사람과 함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의 생명이 빠져나간 인간은 곧 죽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120년이라는 유예기간을 두셨다. 그것이 하느님의 생기 없이 인간이 목숨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유예기간이다.
사실, 아담 사건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경험한 자신들의 범죄와 그로 말미암은 (가나안에서의) 추방, 그리고 새로운 언약을 통해 그 상태를 회복해 가시는 하느님에 대한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된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이후 모든 히브리성서에서 하느님은 자신의 영을 통해 창조세계 안에 지속적으로 개입하신다. 그리고 어그러진 세계를 바로잡기 위해 일하시고 운행하신다.
다만, 하느님의 생기를 잃고 한시적으로 살다가 죽게 된 인간 안에서는 보편적으로 활동하지 않으시고 특별한 임무를 맡은 특정인 안에서만 하느님의 영이 활동하시는 것이 히브리성서에서 포착되는 현상이다. 특별히 하느님의 영은 예언자들을 통해 일하시는데, 예언자들의 메시지가 이스라엘의 회복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기억해둘만 하다.
예언자 요엘은 야훼의 날, 즉 하느님께서 이 세계를 회복하실 날이 이르면 하느님께서 자신의 영을 마음껏 부어주셔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하느님의 기운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요엘2:28-29). 특정인 안에서만 현존을 드러내던 야훼의 영이 보편화 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새로운 생명을 얻어 다시 살아있는 존재들, 영원히 살게 될 존재들이 된다는 말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난 예수의 부활에서, 그리고 오순절날 경험한 특별한 체험에서 이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보았다.
3.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쫓아내다(마가복음)
복음서는 예수라는 특별한 사람에게 하느님의 영이 내려온 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 물론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는 예수의 어릴 적 행적들이 등장하지만 예수의 공생애 사역부터 부활까지의 기본적 뼈대를 생각하면 복음서의 시작은 예수라는 개인에게 하느님의 영이 부어진 사건이다.
하느님의 영이 특정인에게 허락되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다는 징조이고, 특별히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힌 자가 예언자적 사역을 시작한다는 표시이다.
그러나 마가복음에는 성령에 대한 언급이 극히 제한적이다. 후반부에 예수께서 다윗을 언급하며 하신 말씀, 재판정에 끌려갔을 때 성령께서 할 말을 주실 것이라는 말씀을 제외하면 마가복음 전반부에 네 번 언급되는 것이 전부이다.
이런 제한적 언급에도 불구하고 마가복음 전체 구조를 볼 때, 성령의 역할은 마가복음에서 무거운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예수 사역 전체를 특징짓는 핵심적 역할을 한다.
그 핵심에 “성령께서 예수를 광야로 쫓아냈다”라는 구절이 있다(막1:12). 쫓아냈다(에크발로)는 단어는 마가복음에서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냈다고 말할 때 주로 사용된 단어이다. 동일한 단어가 예수에게 사용되었고, 그 주체는 하느님의 영이었다. 그리고 광야로 쫓겨난 예수는 사탄의 세력에게 시련을 받았다.
광야에서 사탄의 시련을 마친 이후 예수는 하느님 나라 사역을 시작하는데, 1장부터 3장까지 요약된 그의 사역들을 보면, 사탄의 세력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더러운 영(마가복음은 귀신을 주로 더러운 영이라고 부른다. 이는 거룩한 영과의 분명한 대비를 보여주는 표현이다)을 쫓아내는 것, 급작스럽게 죽을병에 걸린 사람을 고쳐주는 것, 사회적 격리 가운데 있는 병자를 고쳐 주는 것, 죄인으로 분류된 병자를 회복시켜 주는 것, 죄인으로 분류된 계층의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회복시킨 것 등이다. 더 나아가 안식일이라는 종교적 억압에서 병자를 고치는 것 등이 사탄과의 대결 이후 예수께서 보여주신 하느님 나라 사역이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사역을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그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다’라고 대응함으로써 자신의 하느님 나라 사역이 곧 성령의 활동임을 강조한다.
이것이 제한된 언급에도 불구하고 마가복음에서 성령의 역할이 중요하게 부각되는 이유이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 사역 자체가 하느님께서 자신의 영을 부어주시어 이루어 가시는 하느님의 결정적 사역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읽게 되는 성령의 얼굴은 사탄의 세력을 깨뜨리고 그 안에 귀신 들리고 병들고 소외되고 낙인찍히고 종교적 억압에 갇힌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하느님의 현존이자 동력이다.
그래서 마가복음에서 ‘예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막1:8)’는 말의 의미는 종교적 체험이 아니라 억눌림에서의 해방이고, 편견으로부터의 자유고, 고통으로부터의 벗어남이다. 형제애로 하나 되는 것, 사탄의 체제와 굴레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 그것이 성령으로 받는 세례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 세례는 하느님의 나라와 직결되어 있다.
4. 성령이 임하시면(누가행전)
누가복음이 그리는 하느님의 영에 대한 그림도 마가복음의 것과 큰 차이가 없다. 히브리성서에서 보여주는 하느님의 영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을 그대로 따르고 있고, 예수에게서 하느님의 영이 살아서 역사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하느님 나라 사역의 동력이었음을 동일하게 말한다.
특별히 누가복음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며 예수 사건의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내는데,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이사야 61장의 말씀이다. 이 말씀 또한 마가복음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하느님의 새로운 행적, 즉 하느님의 나라와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후속편으로 쓰인 사도행전을 통해 누가행전은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을 드러내는데, 바로 성령의 보편적 임재와 그로 말미암은 하느님 나라의 보편적 전파가 그것이다.
하느님의 영의 보편적 임재가 오순절 성령사건의 핵심 이슈 중 하나이다. 특정인에게, 그리고 최종적으로 예수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하느님의 영이 이제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심지어는 이방인인 고넬료에게도 모습을 드러냈다. 창조세계 안에 거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이 보편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하느님의 보편적 현존은 인간의 범죄로 인해 망가진 세계의 회복에 대한 강력한 증거이고, 더 이상 하느님의 영이 육체와 함께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 거둬지고, 하느님께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며, 하느님의 영이 보편적으로 부어진 사건이 지금 일어났고, 세계의 회복을 약속하신 하느님의 종말, 즉 마지막 때가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사도행전에서 말하고자 하는 예수 사건의 연장이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성령의 가시적 임재를 강조한다. 성령의 임재가 ‘야훼의 날’ 즉, 예수로 말미암은 종말의 직접적 증거이고, 특별히 하느님의 영이 보편적으로 육체들에 부어지는 예언의 성취이기 때문에 성령이 오셨다는 뚜렷한 증거들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성령은 언제나 가시적 증거들을 가지고 온다. 때론 그 증거들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하지 않아도 하느님의 영이 부어진 것이 눈으로 확인 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처럼 표현된다. 바울의 서신들에서 ‘성령의 가시적 임재’의 증거들을 찾기 어려운 것과 상반되게 사도행전이 성령을 두드러지게 묘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누가행전에서 하느님의 영은 가난과 억압 속에 있는 하느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찾아오신 하느님의 현존이다. 그리고 그 현존이 예수라는 특정인에게서 시작하여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하느님의 영은 예수의 제자들을 통해 예수로 말미암은 하느님의 특별한 개입을 증거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지속적으로 일구어 가신다.
5. 성령의 은사를 따라(바울서신)
바울의 편지들은 성령에 대한 이해에서 누가행전과 상보적 관계에 놓여 있는데, 바울의 글들 속에서 우리는 성령의 가시적 임재를 쉽게 찾지 못한다. 오히려 바울에게 성령은 내면적이고 공동체적이다.
바울이 이해하는 예수 사건은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틀 안에서 해석이 된다.
바울에게 믿음은 의롭게 됨, 즉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최소 자격요건이다. 할례나 안식일 준수, 율법의 소유 여부와 상관없이 하느님께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온 세계를 새롭게 하신다는 믿음만 있다면 어느 누구나 보편적으로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믿음의 의미이다.
그러나 바울에게 하느님의 나라는 여전히 미완성이다. 예수의 부활은 아직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았다. 우리도 예수의 부활에 연합하는 의미로 세례를 받았지만 아직 우리의 부활은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하느님의 백성 된 우리는 하느님의 마지막 판결과 예수와 연합한 부활을 소망할 뿐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다(롬8:24). 바울에게 언제나 소망이 믿음만큼, 아니 때론 믿음보다 더욱 강조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그래서 바울은 사랑이라는 해법을 제시하는데, 그 소망이 허망하지 않게 우리를 붙잡아 주는 것이 바로 우리 안에 역사하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자신의 아들까지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그 사랑이 우리에게 확신을 주고 소망을 갖게 한다. 그리고 우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시는 역할을 바로 하느님의 영께서 하신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미완성의 세계에 살면서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주님의 자녀들을 위해 하느님의 영은 오늘도 우리 안에서 역사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고, 소망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 바울에게 하느님의 영은 곧 사랑의 영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영은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내면적 빛이다. 누가행전이 종말론적 관심에서 성령을 부각시켰다면 바울은 내면적 관심에서 (동시에 공동체적 관심에서) 성령을 말한다. 물론 바울에게서도 성령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종말론적 보증이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의 더 중요한 역할은 불확실한 미완의 시간을 보내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주신 능력이고 우리를 이끌어가는 하느님의 숨결이다.
또한 바울은 공동체적 관심에서 성령을 강조한다. 우리가 익숙하게 들어왔던 성령의 은사는 사실 바울에게 개인적 체험의 영역이 아니라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것이다.
바울의 편지 중 은사 목록은 두 곳에서 발견이 되는데 하나는 고린도전서에서 다른 하나는 로마서에서이다. 고린도전서에는 방언, 예언, 방언통역, 치유, 지혜의 말씀 등등이 등장하고, 로마서에서는 예언,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위로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등이 나온다.
고린도교회가 방언 등의 특정 은사로 인해 분란이 있었고 바울이 이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며 은사목록을 제시했다는 점을 기억하면, 고린도전서에 등장하는 은사목록보다는 로마서에 나오는 은사목록이 바울이 이해한 더 본질적인 은사 개념인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전서나 로마서 모두 바울이 은사목록을 제시하는 맥락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영을 통해 교회를 세우고 각 지체들이 적절한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이다. 즉, 바울에게 은사는 개인적 체험이 아니라 공동체의 균형적 성숙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이다.
바울은 끊임없이 성령의 역할을 강조한다. 마가복음이나 누가행전이 하느님 나라의 임재에 대한 보증으로서 성령을 말한다면 바울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 불확실을 견뎌야 하는 각 개인과 교회 공동체를 위해 그렇게 한다. 그래서 바울에게 하느님의 영은 곧 사랑의 영이고 교제(코이노니아)의 영이다.
6. 영으로 난 사람은(요한복음)
히브리성서에서부터 시작해 바울서신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영에 대한 일관된 흐름과 각각의 저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강조점들을 살펴보았다. 이로써 하느님의 영에 대한 성서 전반에 걸친 이해를 간략하게 풀어보았는데, 마지막으로 공관복음과는 약간의 관점 차이를 보이고 있는 요한복음을 살펴보려고 한다.
요한복음의 가장 핵심적 주제는 ‘예수의 부활’이다. 요한복음에는 의도적으로 7개의 표적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 표적들은 하나같이 예수의 부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7번째 표적이 예수의 부활이고 나머지 6개의 다른 표적들도 예수의 부활이라는 표적을 향해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모세의 율법체제를 전복하는 새로운 체제(로고스 혹은 진리)가 왔는데, 그 체제로의 전향에 하느님의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이 놓여 있다.
영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예수의 말씀도 같은 맥락 안에 있는데,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예배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데 강조점이 있다기보다는 예수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체제로 전향해야 한다는 데 방점이 찍혀 있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영을 통한 새로운 예수 체제 안에서만 예배도 유효하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또한 히브리성서에서부터 시작된 하느님의 영에 대한 큰 그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특별한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하느님의 영이 예수의 또 다른 자아인 것처럼 표현되는 것이다.
새로운 체제의 핵심은 예수다. 모든 것이 예수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동시에 예수의 부재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고, 그 공백을 메울 또 다른 예수로 하느님의 영, 성령을 언급한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성령은 예수의 영이다. 성령이 예수를 증거하며 예수로 말미암고 예수로 진행되고 예수로 완성될 하느님의 체제를 이끌어 가신다. 예수의 영으로서 성령은 그렇게 제자들에게 오셨다.
나가며
하느님의 영은 오늘도 창조세계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며 능력가운에 우리를 이끄신다. 우리의 교회를 이끄시고 우리의 삶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채워주신다.
하느님의 영은 오늘도 가난과 상처와 아픔 속에 찾아오시고, 불의한 체제와 폭압적 권력 가운데서 구원하는 역사를 이루신다.
또한 하느님의 영은 우리를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어 가시는데, 하느님의 영으로 채워지는 과정을 통해 예수를 만나고 예수로 말미암은 새로운 체제의 백성이 된다.
하지만 하느님의 영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성령의 이끄심이라는 추상적인 표현들로 하느님께서 주신 이성을 뭉개 놓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오히려 우리가 성서를 통해 하느님의 영을 더 잘 분별하게 되고, 이 세계 안에서 역사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서 성령을 힘입게 된다면 비루한 정권, 폭압적 자본 앞에서도 우리는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는 삶에 빛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성령의 이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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