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비유 중에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 중 하나는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한 번 풀어볼까 합니다.
이 비유는 온통 난해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앞 뒤의 말들이 연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더욱이 이 비유에 이어지는 바리새인들에 관한 이야기는 더욱 앞뒤가 안 맞아 보입니다.
한 번 볼까요?
예수님은 비유를 마치고, 9절에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합니다. 왜 불의한 재물일까요? 주인의 것을 자기 마음대로 했기 때문에 불의하다고 하셨을까요?
그런데 11절에서는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않으면 누가 참된 것을 너희에게 맡기겠는냐' 하고 물으십니다.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비유에 나오는 청지기는 충성하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 13절은 정말 뜬금 없어 보입니다.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라 해 놓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선언으로 끝이 납니다.
이어지는 바리새인과의 대화는 더욱 가관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은 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었을까요?(14절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왜 사람에게 높임을 받는 문제를 거론하시고, 아무 연관이 없어보이는 율법과 선지자의 유효기한에 대해 말씀하셨을까요?(15-17절)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느닷없이 간음에 대한 이야기를 왜 꺼내셨을까요?(18절입니다)
비유 내용 자체로는 어렵지 않지만, 비유에 대한 해석과 사람들의 반응, 그리고 이어지는 예수님의 반응은 일관성을 찾기 어렵고 난해하기만 합니다.
이제, 풀이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먼저, 이 비유의 결론 역할을 하는 13절의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씀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마지막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비유의 핵심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유의 해석 부분이 난해해 보이지만 비유가 가리키는 바는 분명한 것이지요. 하나님과 재물 안에 동시에 머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비유는 해석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비유의 초점을 흐리게 만드는 원인은 9절에 있습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니 알송달송 합니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면 이 문장에 대한 번역에 약간의 문제가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먼저, 제 번역은 이렇습니다.
"세상의 재물 속에서 빠져나와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를 영원히 거할 집으로 받아들여줄 것이다"
이렇게 번역한 이유를 달아보겠습니다.
'불의한 재물'은 직관적으로 '의로운 재물' 이라는 상관어를 떠오르게 합니다. 하지만 누가복음 전체를 살펴보면 재물은 기본적으로 세속적이고 불의한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듯 합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세속의 재물' 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즉, 불의한 재물, 의로운 재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통용되는 재물, 부유함을 의미하는 것이 '불의한 재물' 이라는 말인 것이지요.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불의의 재물로' 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이 문장에는 전치사가 두 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는 '안에서 밖으로' 라는 의미를 가진 ek 라는 전치사이고 다른 하나는 '밖에서 안으로' 라는 의미의 eis 라는 전치사입니다.
ek라는 전치사는 '재물' 앞에 쓰였고 eis라는 전치사는 '처소' 앞에 쓰였습니다.
그래서 이 문장의 문학적 구조는 '불의한 재물 밖으로'와 '영원한 처소 안으로'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물론 ek라는 전치사가 genitive 앞에 쓰이면 '로부터(from)'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불의한 재물'은 genitive입니다.
그렇다고 genitive 앞에서 ek가 '안에서 밖으로' 라는 의미를 상실하는 것은 아닙니다. ek가 genitive와 함께 쓰인 대표적인 예가 족보에 나옵니다. 누가 누구를 낳고, 낳고 할 때인데, 아비로부터 아들이 나왔다는 말의 궁극적 의미는 아버지 안에서 아들이 밖으로 나왔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ek라는 전치사에는 '~을 가지고'라는 도구적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좀 복잡하게 설명을 했는데 정리해서 말하자면,
9절의 의미는 '불의한 재물을 가지고 친구를 사귀어라'로 해석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말은 "불의한 재물에서 '나와서' 친구를 사귀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그 친구가 너를 영원한 집 '안으로' 영접해 줄 것이라는 것이지요.
9절을 이렇게 이해하고 나면 그 뒤에 나오는 말들이 줄줄이 이해가 됩니다.
10절, 11절에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충성'이라는 단어는 '믿음'과 같은 어원으로 '믿을만 하다' 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은 조금 더 가까운 의미의 '충실'로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10절, 11절은,
작은 것에 믿을만 하지 못하면 큰 것에서도 믿을만 하지 못한 것처럼, 너희들이 세상의 재물을 대하는 태도에서 믿을만 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즉 세상의 재물에서 나오지 못해 허우적 거리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세상 것이 아닌 참된 것을 너희에게 맡길 수 있겠느냐는 의미가 됩니다.
이어 12절은, 비유의 청지기처럼 자기 것도 아닌 남의 재물에서 나오지도 못하는, 믿을만 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누가 진짜 자기의 것을 가질 수 있겠느냐는 말씀인 것이지요.
그러면, 13절이 분명하게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재물에서 나와야 한다, 하나님과 재물 안에 동시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바리새인들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했습니다. 재물을 하나님을 잘 섬긴 보상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재물을 모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보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하나님과 재물에 대한 동일시 까지는 아니어도 둘은 비례한다고 생각한 듯 합니다.
하지만 15절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잘 섬겨 부자가 됐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사람에게 높임을 받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는 미움을 받는 것이라고 질책합니다.
이어 16, 17절에서 예수께서는 율법과 선지자의 시대는 가고 '새로운 시대가 왔다'고 선언하십니다.
율법의 많은 부분들이 재물의 정당성을 지지해 주는 듯 하지만, 그 시대는 갔고 이제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17절은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의 탄식입니다.
율법의 시대가 이미 지나갔지만 바리새인 너희들에게는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지는 것보다 천지가 없어지는 것이 더 쉬움을 알고 있다는 예수님의 탄식인 것이지요.
여기에서 이 비유의 핵심적인 메시지가 비로소 등장을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목숨처럼 붙잡고 있던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 율법 수호는 하나님의 물질적 축복과, 물질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회복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율법 준수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말씀하시는데,
바로, 빚진 자들을 친구로 삼는 것, 재물에서 나와서 빚진 자들과 진정한 친구가 되는 것, 바로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출입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탕감해 준 것처럼 우리의 빚도 탕감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고,
친히,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마지막 18절의 간음 이야기는 율법을 맹신하던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사용했던 비유를 예수님께서 재사용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것이 간음인 것처럼, 율법을 버리고 다른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간음이라고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그래 너희는 도무지 율법의 한 획도 버릴 수 없지' 탄식하시며, 하지만 율법의 때는 지나갔다 선언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정리하자면, 이 비유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율법의 준수나 하나님의 물질적 축복이 아니라 빚진 자들과의 친구됨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복잡한 설명,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심입니다.
정말유익했습니다
답글삭제감사합니다~~
답글삭제감사합니다. 많은 도움 되었습니다.
답글삭제궁금했던 부분인데 속이 시원하네요
답글삭제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답글삭제감사해요 이해가 잘 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답글삭제감사합니다.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답글삭제몇번을 읽어도 도무지 이해할수 없었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답글삭제이래서 배움이 중요하군요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시원하네요 감사 또감사해여
답글삭제이제야 이해가 되네요...고맙습니다
답글삭제정말 고맙습니다. 저도 9절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제 속이 시원합니다.
답글삭제감사합니다.
답글삭제감사합니다 난해했던 구절이 이해가 갑니다
답글삭제감사합니다.진정한복음이고 진리이네요
답글삭제필사하다가 계속 읭?? 엥?? 만 반복하다, 혹시나 해석이 있을까 해서 검색하다가 읽게 됐습니다. 덕분에 성경 말씀에서 또 하나의 진리와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답글삭제아 궁금한 부분이 많이 해소가 되었습니다.
답글삭제감사합니다.
그대야 말고 진정한 지혜자 시군요.
답글삭제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답글삭제많이 배우고 익힐수 있는 시간 이었습니다.
잘 봤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잘 설명해주셨네요.
답글삭제예수님께 선택받으셨군요~^^진정한소금이십니당~~
답글삭제성경 읽다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인터넷을 뒤졌는데 명쾌한 설명으로 이제 이해가 됩니다. 감사합니다^^
답글삭제thank you so much
답글삭제감사합니다^^!! 다른 글도 봤는데 봐도 봐도 이상해서;;ㅎㅎ 정확한 해석 큰 도움됐어요~/^^
답글삭제그렇다면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신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것일까요?
답글삭제물론 그 글만 놓고 보자면 그렇게 해석이 가능하지만 그 앞에 있는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신 것과는 어떻게 연결을 시켜야 하는것일까요 만약 이 방법으로 해석이 맞는거라면 그래서 그렇게 해석을 한다면 그 후 그가 쓴 재물에서 나오라고 해석하기에는 앞 내용과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답글삭제더욱이 아 비유는 총 5가지 비유안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 둘째 아들. 불의한 청지기. 부자와 거지 나서로 비유는 하나의 공통적인 목적을 가자고 있는 비유인데 그 중심을 물질로 본다면 이 5가지가 갖는 공통적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합니다
이것 또한 글을 읽고 든 제 생각이기도 합니다
익명2014년 11월 29일 님...
답글삭제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청지기를 칭찬하신 것과는 별다는 충돌점이 없어보입니다.
청지기를 칭찬한 이유가 그의 지략이 아니라,
자신의 것이 아님을 인지한 것, 그래서 거기로부터 나와서 빚진자들과 친구가 된 점을 칭찬하신 것으로 볼 때 그것이 예수께서 제자들과 동시대인들에게 요청하신 것이라고 볼수 있겠지요.
제가 보기에,
다섯 가지 비유가 공통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좀 어려워 보입니다. 세개가 연속으로 등장하는 처음 세 비유는 분명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다는 공통적 목적이 있어 보이지만
그 뒤에 등장하는 두 개의 비유는 맥락이 조금 다르다고 볼 수 있지요. 오히려 청지기와 나사로 비유는 '부'라는 주제로 묶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섯가지비유는 하나의 목적으로 기록 된 비유라고 여러 주석 책에서 나오네요~^^;
답글삭제그리고 만약 불의한제물에서 나오란 말로 해석이 되어진다면 굳이 불의한제물과 친구를 삼아라 는 말과는 너무 반대로 해석이 되어 지는거 같습니다~
먼저 청지기는 주인의 제물을 자기를 위해 자기 수단으로 율법대로 낭비를 하죠
그로인해 자기가 살 곳을 예비 해 두게 되죠
하지만 이를 본 주인이 오히려 칭찬을 하죠
덧붙여 예수님께서는 그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신게 아닌
불의한 청지기가 쓴 재물을 칭찬하시면서 말씀 하신거 같습니다~
그러니 불의한 재물을 칭찬하셨는데 그 재물에서 나와 친구를 삼으라는 해석은 뜻이 전혀 달러지게 되는ㄱ 같아요
더욱이 그 뒷절을보면 지극히 작은것에 충성 하면서 나오는 말씀과도 연결이...
또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지 아니 하면과도...
그러면서 하나님의 재물로 결론이 나오고요...
더욱이 혹 앞 세 비유만 한 내용이라 말씀하심에도 만약 불의의 재물에서 나오라 해석 하게 되면
잃은양. 잃은 한드라크마. 잃은 둘째아들과도 연결이 안되는거 같습니다
그렇게 됨 잃은 양도 한드라크마도 둘째아들애서도 재물에서 나오라는 의미를 갖게되는데 이 또한 연결이 쉽지 않습니다...
아무튼 좋은 견해 감사드립니다~~!!!^^
답글삭제저도 박성장님의 해석에 많은 신빙성을 인정하고 싶군요. 먼저 복음서의 비유를 하나님의 나라와 연관해서 구속사적으로 풀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답글삭제다만 비유를 해석할 때 일일이 구문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짝을 찾아서 논리화 하려는 것은 위험한 유혹이라고 할 수 있지요. 비유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문학적 도구로서, 보이지 않는 부분을 생각해 보도록 눈을 열어주는 실말이 혹은 단서 정도의 의미에서 그쳐야지 비가시적 실체전부를 드러내어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인간언어의 한계를 생각한다면 말이지요.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이 세상은 단지 비가시적 세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이론을 지지하게 되니까요.
제 생각에는, 복음서의 전체적인 목적을 생각하면서, 구속사적으로 푸는 것이 일단 정합한 해석인 것같고요, 본문의 context에서 화자와 청자들이 누구인가를 따라가다보면, 앞서 나오는 세가지 비유와, 이 비유는 서로 개념이해와 구체적인 예로서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앞서 나오는 세 비유는 잃어버린 양, 잃었던 동전, 그리고 돌아온 탕자의 비유인데요. 모두 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고요, 주제는 회개로 이어지는 회복의 기쁨이었지요.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주인이 기뻣는데, 이를 두고 한 죄인의 회개였다 해석하시구요, 한 드라크마를 주인이 찾아서 즐거웠는데 이것도 한 죄인이 회개한 것이라 하시구요. 그리고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는 소유와 주인의 구도에서 아들과 아버지라는 인격적인 구도로 심화되면서 아들의 돌아옴 곧 회개가 아버지의 환영 곧 용서로 이어지면서 화해의 잔치라는 기쁨으로 이어지지요. 그러면서 회개와 용서, 곧 돌아옴과 환영, 찾아짐과 찾음이라는 본질이 죄인과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의 유일한 방법이면서 용서와 환영의 복음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여기까지는 주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말씀을 하셨는데요, 그러다가, 주님의 얼굴을 돌려 제자들에게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말씀하셨지만, 사실상 방금전까지 대상으로 삼으셨던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고 이 비유를 통해 질문을 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뒤에 바리새인들을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고, 스스로 옳게 여기는 자들이며, 사람들 앞에서 높임을 받고 싶어하는 자들 이라는 말을 쓰고있고, 또한 이들이 예수님의 비유에 대해 비웃음으로 반응했다고 누가는 기록하면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이 다시 바리새인들을 대상으로 마무리를 하시는 구조를 하고 거든요. 누가의 문학적 구도가 아주 세련됬다고나 할까요. ㅎㅎ, 그리고 마무리 하는 대목은 16장 마지막,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까지 이어집니다.
다시 정리를 한다면, 앞의 세 비유를 통해 회개란 주인의 찾음과 대상의 찾아짐이며, 이런 방식으로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기쁨이 발생한다는 것이엇다면, 구체적으로 바리새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죄인들이 보편적으로 길을 잃고 묶여있는 곳은 바로 물질 우상화 하는 마음이며, 또한 여기에서 어떻게 회개를 해야하는 지를 보여주셨다고 보면 어떨른지요. 이렇게 본다면 박성장님의 해석의 정합성은 더욱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나중에 질문하신 분의 5가지 비유의 연속성에 대한 질문의 정합성도 확보가 되지요.
구체적인 회개의 본질과 내용은 불의한 청지기의 처신에서 잘 드러나는 데요, 그것은 주인과의 정산의 날이 오기 전에, 주인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하는데 자신의 지위와 불의하게 착복한 재물을 사용하여 친구를 삼음으로서, 그를 청지기로 둔 주인의 주권과 영예를 회복 고양한 것이지요. 비록 그의 마음의 동기는 주인의 판결에 대한 두려움이었으나, 그의 행위 자체만큼을 회개의 본질을 그대로 보인 것이므로, 주인이 칭찬을 한 것이지요. 이것을 주인은 지혜롭다고 칭찬을 했는데요. 그러나 칭찬 자체가 판결을 모면했다거나 그 자체가 구원이 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구요. 다만 회개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보면 되겠지요. 주인의 마음의 상처가 회복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러나 회개 자체가 구원이 아닌 것 처럼 주인과의 관계회복이 완전히 되었다는 언급은 없지요.
주님은, 다만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지혜라고 하심으로서 주인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본질임을 잘 알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마음을 들추시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바리새인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낯이 뜨거워질 만큼 적나라하게 그들의 마음을 지적하시지요. 돈을 사랑하는 자, 스스로 옳다 하는 자, 사람들 앞에서 높임을 받고 싶어하는 자, 곧 하나님께 미움을 받을짓을 하는 자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이 돈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이 묶여 있으며, 그들의 삐뚤어진 마음을 정당화하는 방패로 삼는 것은 그들의 율법에 대한 오해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율법의 완성인 복음의 실체인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고, 이 나라는 사람의 마음에 임하는 것인데,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회개를 통해 적극적으로 침노하는 것이라고, 그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율법과 메시야와 하나님의 나라와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선포를 하시지요. 그리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모세와 선지자에게서 듣지 못하면 죽은 자가 살아와서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거라하시는데요, 곧 십자가를 향한 자신의 행위로 곧 율법의 본질, 곧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이 완성되었으며, 자신의 존재자체가 선지자들이 기록했던 하나님의 아들, 곧 메시야임을 발견하지 못하면, 부활한 예수가 찾아와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지요. 이것은 오늘날도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비유는 동시에 제자들에게 주는 경고로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그들에게 에게 맡겨진 율법을 오용, 남용하여, 부를 축적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 정당화하고, 가난한자 병든 자 고난 받는 자들을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에서 버림받은 죄인으로 분류하여 천대한 것은 바로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연약하고 고통받는 자들에 대한 우선적인 관심으로 하나님의 형상인 그들을 존대하고, 율법의 본질인, 이웃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으로 바로 잡음으로서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그들이 가야할 회개의 길임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나중에 바리새인들이 주님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고 묻는데요. 주님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너희의 마음에 임할 것이라 하시죠. (17:20,21) 그들의 마음 곧 회개와 돌아옴이 일어나, 용서와 환영과 잔치가 일어나는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영원한 처소로서 이미 회개한 자들의 환영, 곧 찾고 찾아짐의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한 것 처럼요. (롬14:17)
님의 해석이 구속사와 문맥을 살폈다는 면에서 참조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삭제성경을 보면 볼수록 이러한 헬라어가 영어나 한글로 번역되면서 그 뜻이 원래 의도와 다르게 기록되는 경우가 있을수도 있겠구나 싶은데요... 이런 생각도 위험한건 아니겠죠!??
답글삭제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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