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본문으로 이사야 9장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나누려고 하는데, '공평과 정의'라는 말씀이 눈에 밟힙니다.
한 아기가 평화의 왕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는 말씀에는 '분노'가 서려 있습니다.
억압과 착취, 어둠과 절망을 향한, 불의한 악인들을 향한 거룩한 분노가 깊이 배어 있음을 느낍니다.
설교를 준비하며 내 자신을 묵상해보니 내 안에 이런 분노가 사라져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가난하고 궁핍하던 시절엔
잘못된 제도, 악의 장벽들, 불의한 지도자들, 그리고 거기에 자꾸만 순응하려는 나 자신을 향한 분노가 있었는데
이젠 그런 분노가 사라져 갑니다.
교회의 녹을 먹으며 적당히 살만해졌고
좁아서 불편하지 않을만한 아파트에 살고
속으로야 어찌됐든 겉으로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미래가 불확실 하긴 하지만 그래도 기대할 것들이 있어서 그런가봅니다.
나에게 오는 피해에는 분노하지만
불의 앞에, 부당하게 불의를 경험하는 의에 주린 자들 앞에서 분노를 잃어버렸습니다.
대강절을 보내며,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다리며 다시 한 번 분노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고싶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와 절망 앞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 다음은 대강절 설교 원고입니다.
본문 : 사9:1-7
제목 : 평화의 왕 예수
1. 대강절 세 번째 주일
- 12월 25일은 성탄절이다. 성경에 나와 있지도 않은 이 날을 예수의 탄일로 지키게 된 유래에 대해서 아는가?
- 여러 가지 학설 중에 가장 유력한 것은 로마의 큰 명절이었던 동지절(12월 24일~이듬해 1월 6일)을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로 정했다는 것이다.
- 예수의 탄생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로마의 동지절을 성탄일로 정하고 기념하는 것에는 매우 깊은 상징적 의미가 있다.
- 예수님 당시 로마는 온 세계의 중심이었다. 모든 권력과 부와 명예가 로마에 집중되어 있었다. 로마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세계를 정복하고 로마의 황제가 스스로 신의 자리에까지 올라갔다.
-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로마는 세계의 중심이었다. 로마가 가진 무자비한 힘과 권력 앞에서 누구도 대항할 수 없었다. 폼페이우스 장군이 정복전쟁을 하면서 이스라엘의 신을 만나보겠다고 이스라엘의 성전에 들어와 군화발로 지성소를 짓밟고 들어갔다. 그 무례한 행동에 따른 예상과 달리 그는 멀쩡했고, 오히려 로마의 권세와 능력에 신성함이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 그 로마의 성대한 축제가 동지절이다. 세상의 모든 권력을 쥐고 흔드는 로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온갖 불법과 폭력을 휘두르던 로마의 성대한 축제 한 가운데 예수께서 오신 것이다.
- 돈만 있으면 다 되는 세상, 유전무죄 무전유죄, 권력 앞에서 초라해지고 작아질 수밖에 없는 세상, 예쁘고 잘 생기면 다 용서되고 못 생긴 것이 죄가 되는 세상(언뜻 보니 여기 죄인들이 많으시네요~^^), 외모가 권력이 되어 있는 세상(제 권력은 어느 정도나 돼 보이십니까?), 그 외모와 돈과 권력으로 흥청망청 세속적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세상의 한 복판에 작고 가난하고 연약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날이 12월 25일 성탄절의 의미이고, 그 오심을 기다리는 날이 대강절이다.(인사: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오셨습니다)
2. 평화의 왕
- 예수께서는 평화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본문 6절은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는데 그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이라고 말한다.
- 슥9:9-10 에서는, 보라 네 왕이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평화를 전할 것이라고 말한다.
- 예수님의 탄생시에도 허다한 천군천사가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라고 찬양한다. 예수께서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것이다.
- 그러나 예수님이 태어날 때 ‘평화의 왕’으로 불리던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바로 로마 황제이다. 사람들은 로마 황제를 가리켜 실제로 ‘평화의 왕’이라고 불렀다.
- 로마의 통치 이념 핵심에는 ‘Pax Romana’ 라는 말이 있었다. 로마의 평화라는 말인데 로마는 자국의 평화를 모든 통치 이념의 최우선으로 삼겠다는 말이다.
- 로마가 지향하는 평화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자국의 평화, 둘째, 군사력과 전쟁을 통한 평화이다. 로마의 통치와 권력에 순응하여 복종하는 나라에게는 평화가 약속되지만 로마의 통치를 거역하는 나라에게는 전쟁과 대략 학살, 잔인한 처형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도 로마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한 방편의 처형대였다.
- 모든 사람들이 로마의 평화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살기 위해선 침묵해야 했다. 섣불리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서도 안 됐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하듯이 로마가 강요하는 평화를 받아들이고 살아야 했다.
- 이스라엘 안에 그런 로마의 평화를 거부하는 무리들이 나타났지만 예외 없이 처참한 처형을 당해야 했다. 로마의 통치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반역자로 십자가에 처형당했다. 로마의 통치 시절 최소 수 백 명의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려 잔인하게 죽었다. 예수님 양 옆에 달려 죽은 사람들도 아마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 이렇게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은 평화의 시대, 칼과 창으로 유지되던 평화의 시대에 진정한 평화, 하늘에서 내려온 평화의 왕이 태어나신 것이다.
- 우리에게 오신 평화의 왕은 전쟁을 통해 평화를 지켜가는 분이 아니다. 권력과 힘을 통해 평화를 이루시는 분도 아니다. 자신의 평화를 위해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는 그런 분도 아니다.
- 로마의 평화 안에서 사람들은 두려움을 경험했다. 절망을 경험했고 하나님을 향하여 낙심을 경험했다. 원래 힘과 권력을 통한 평화는 그런 것이다. 통제하고 억압하고 압력을 넣어 이루어진 평화는 겉으로는 좋아 보이고 평온해 보이지만 거기에는 절망과 한숨과 두려움만이 존재한다.
- 예화. [우리 집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 아이들은 울어대고 아내는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와 있고, 집안은 정리 안 돼 있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나는 시험 준비를 해야 하는데 집 안에 평화가 없다. 결국 버럭 화를 냈다. 드디어 평화가 찾아왔다. 아이들은 울다가 잠이 들었고 아내는 입을 다물었고 집은 깨끗해졌다. 그런데 아무도 행복하지 않았다. 힘과 억압에 의한 평화는 그런 것이다.]
-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평화는 자유가 있고 해방이 있고 기쁨이 있다. 힘과 권력이 아니라 겸손과 낮아짐으로 이루어진 평화이기 때문이다. 그 평화 안에서 죄인들은 용납되어지고 회복되어진다. 하나님을 향하여 대적하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은 손을 내미시고 사랑하신다. 심지어 자신을 못 박아 죽이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용서하며 사랑하는 것이 예수 안에 있는 평화이다.
- 최근 한반도 정세가 매우 불안정하다. 연평도 포격사건 이후로 한반도의 평화가 깨어지고 긴장이 감돌고 있다. 나는 정치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잘 알지 못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 평화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 특별히 대강절을 보내며 더 기도하게 된다.
- 그런데, 일부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예수의 평화가 아니라 로마의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스가랴 말씀처럼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고 전쟁 기구들도 끊어버리시는 분이신데 기독교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전쟁을 운운하며 공격적인 태도를 보일 때 마음이 너무 아프다. 우리가 함께 로마의 평화가 아닌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께서 이 나라를 다스려 주시도록 기도해야 할 일이다.
3. 아기 예수
- 본문 6절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가리켜 한 아기가 우리에게 오셨다고 말한다. 제왕적 힘을 가진 강력한 왕이 아니라 연약하고 아무 힘도 없는 한 아기가 왔다고 말한다. 아기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 사실, 전쟁을 끝내려면,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전쟁의 달인이 와야 한다는 것이 세상의 상식이다. 돈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돈이고, 권력을 이길 수 있는 것은 권력이다. 일등을 이길 수 있는 길은 내가 일등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 논리이다.
-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논리에 젖어 산다. 아기 예수님은 사라졌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도 사라졌다. 오직 영광가운데 계신 예수님만 기억하고 살아간다. 그래서 더 높은 곳에 기어 올라가려고만 한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 세대의 앞잡이가 되어가고 있다.
-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초라한 말구유에 누워계신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초라함을 불쌍히 여기라는 말이 아니다. 눈물 몇 방울 흘리라는 말이 아니다. 평화를 이루어 가시는 예수님의 방식을 배우라는 말이다. 겸손과 낮아짐과 희생을 통해 예수님의 길을 따라 가라는 말이다.
- 예수님의 방식을 배우고 그의 길을 따르며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면 우리는 평화의 사자가 되는 것이다.
4. 하나님의 울분
-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평화를 위해 기도하게 하는가? 설교를 준비하며 본문을 묵상하던 중 본문의 말씀 중에 하나님의 울분이 있음을 보게 되었다.
-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 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추었다”, “그들의 무겁게 맨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셨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 묻은 복장이 불에 섶같이 살라지리라.” 어떤가? 아름다운가? 목가적인가? 부드러운 음성인가? 아니다. 압제와 고통과 절망의 땅을 향한 하나님의 울분이 느껴지지 않는가?
- 평화의 길을 가는 것, 평화를 위한 사자가 되는 것은 이런 하나님의 울분 없이는 불가능하다. 평화 없음에 대한 울분, 평화를 앗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거룩한 분노가 없다면 진정한 기도는 불가능하다.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 예수께서는 이 거룩한 분노를 가지고 살아가셨다. 연약하고 병들고 힘없는 자들을 향하여는 언제나 온유하고 자비하셨지만 불의한 권력자들과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과 같이 권력에 야합하여 백성들을 억압하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는 불같은 비판을 품어내셨다.
- ‘독사의 새끼들아’ 우리말로 하면 ‘개 자녀’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부드럽게 하셨겠는가? “너희 개 자녀들아 그러면 안 된단다~” 이렇게 하셨겠는가 말이다. 이 말 안에는 예수의 울분과 거룩한 분노가 스며있다.
- 예수께서는 울분 없는 자들, 자기희생도 없는 자들, 의를 향한 갈망도 없이 거짓된 평화를 원하는 자들에게 “내가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라고 말씀하셨다.
- ‘두리반’ 이라는 식당을 아는가? 얼마 전까지 한 집사님 내외가 운영하는, 서울에 있는 평범한 칼국수 집이었다. 10여 년 동안 옷 수선, 사우나 매점, 찜질방 식당 등을 하며 모은 돈에 대출을 받아, 1억 3천만 원의 시설투자비에 보증금 1500만원의 세를 주고 2005년 홍대 옆에 가게를 내었다. 2007년 도시공항철도 역사가 세워진다는 발표와 함께 땅값은 수직상승했고 건물은 민간 건설사에게 팔렸다. 건설사는 이사비용 300만원을 주며 나가라고 했고, 평생 모은 돈을 다 날리고 아직 갚지 못한 빚까지 떠안아야 하는 내외는 버텼다. 결국 2009년 12월 24일, 세상이 성탄절 이브를 즐기고 있을 때 두리반은 강제철거를 당하고 주인은 쫓겨났다. 아이러니하게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오신 밤에 한 서민 부부의 인생이 송두리째 철거를 당한 것이다. 26일 사장내외는 철사와 철판을 뜯어내고 두리반에 들어가 1년째 농성중이다. 시인들이 찾아와 시를 낭송하고, 음악회를 열고, 영화제도 열고, 예배를 드리며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더위와, 추위와 싸우며 농성을 하고 있다.
- 평화가 깨어진 이 모습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나는 힘과 권력과 돈으로 무장한 건설업체의 모습에서 자국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나라들을 처참히 짓밟았던 로마의 평화를 보게 된다. 그리고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울분을 가지고 분노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느낀다.
- 그런데 매스컴에서 처음 이 보도를 접했을 때, 나 자신이 많이 변했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다. 그저 안타까운 사연이 하나 늘었구나. 참 안 됐다 하고 너무나 쿨 한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 신학교 시절, 가난하고 참 궁핍했다. 한 달에 한두 번 야식으로 통닭을 시켜 먹는 것이 호사였다. 지도하던 청년들에게 밥 한 번 사주는 것, 큰 맘 먹어야 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었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 그 때는 울분이 있었다. 잘못 된 제도, 악의 장벽들, 고통 받는 사람들을 향한 울분이 있었다. 그리고 자꾸만 권력과 잘못된 제도에 순응하려는, 굴복하려는 나 자신을 향한 울분과 분노가 있었다. 그래서 잘 울었다.
- 그런데 목사가 되고나니 내 자신이 변하게 된다. 먹고 사는데 문제 되지 않을 만큼 사례를 받고, 넓진 않지만 좁지도 않은 아파트에 살고, 속으로야 알 수 없지만 겉으로는 많은 존경을 받고 살다보니 울분이 사라졌다.
- 그래서 이웃의 아픔을 봐도,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가 깨어진 모습을 봐도 내게 일어난 일이 아니면 마음의 동요가 없다.
- 지난여름 무더위에 운전을 하다가 길 한가운데 차를 세우고 서 있는 사람과 다툼이 났다. 너무 몰상식하게 차를 세워뒀다고 생각해서 창문을 열고 한 마디 거칠게 했는데, 아뿔싸! 깍두기 머리에 팔에는 문신이 우글거렸다. 맞을까봐 겁나서 제대로 말 한마디 못하고 그 사람에게 이리저리 휘둘렸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속의 분노가 가시지 않는다.
- 내가 당하는 별것도 아닌 일에는 분노할 줄 알면서, 평화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가 깨어진 상황에는 무덤덤한 내 모습이 참으로 가련하다.
- 예수께서는 자신을 향하여 채찍을 휘두르는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불의한 압제자들을 향하여는 분노하셨는데, 이 땅의 깨어진 평화를 향해서는 오래참고 개인적인 일에는 발끈하는 내 모습을 보며 언제쯤에나 예수님을 닮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속이 쓰리다.
- 성령의 열매가 아닌 엉뚱한 열매만 맺혀 간다. 나 자신을 향한 사랑, 자기만족을 향한 기쁨, 나의 유익을 위한 평화, 불의를 향한 오래 참음, 내 자식들만을 향한 자비,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에게만 베푸는 양선, 힘 있는 사람들을 향한 충성, 권력자들 앞에서의 온유, 거룩한 것들의 절제라는 아홉 가지 열매가 너무 주렁주렁 열린 것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다. 이 땅 구석구석에 평화가 임하도록 기도하자. 힘 있는 사람들의 횡포가 그치고, 돈 가진 사람들의 자랑이 멈추고, 사망의 그늘에 있던 자에게 빛이 비추는 평화, 4절 말씀과 같이 무겁게 맨 멍에와 어깨의 채찍이 멈추는 평화 압제자의 막대기가 꺾이는 평화를 구하자.
- 울분을 가지고 기도하자. 울분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그 울분이 우리를 진정한 기도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상투적인 기도가 아닌, 가슴에서 울려 나오는 기도, 이 나라를 위한, 내 이웃을 향한 기도는 울분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대강절을 지내며 평화의 사자로 하나님 앞에 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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