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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박성장입니다.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하늘을 보며, 하늘의 뜻을 생각하며 오늘도 힘 내시기 바랍니다.

2012년 1월 30일 월요일

예수의 반쪽 2

예수의 반쪽은 눈물이다.
연민의 눈물이다.
이 눈물은 예수의 다른 반쪽인 분노와 연리지 나무가 되어 피를 나눈다.
분노와 눈물, 여기에 예수가 있다.

왜 우는가?
사랑 때문이다. 연민 때문이다.
착취하며 착취인줄 모르는 권력자들과, 부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분노한 것처럼
착취 당하며 착취인줄 모르는 군중들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신다.
세상이 원래 그렇다는 그들의 푸념 때문에 예수는 운다.
예수의 눈물은
하나님의 세상이 원래 그렇지 않다는 호소이다.
예수의 연민은
푸념일랑 거둬 치우고 정의로운 새 역사를 함께 그리자는 거룩한 초청이다.

예수는 누구를 사랑하는가?
예수에게는 보편적 사랑이 없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누구에게나 동일한 사랑을 베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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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신사적인 예수는 시궁창에나 던져버려라.
예수의 사랑은 편파적이다.
당파적이다.
예수는 신사가 아니라 혁명가에 가깝다.
예수가 누구나 똑같이 사랑하는 신사라는 말에 속지 말라.
새빨간 거짓말이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을 더 사랑했다. 예수는 병든 사람을 더 사랑했다. 예수는죄인들을 더 사랑했다. 예수는 세리들을 더 사랑했고 윤락여성들을 더 사랑했다.

성경을 보라.
예수는 부자들에게 분노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스스로 의롭다 하는 자들에게 분노했다. 사람의 아들은 의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권력자들과 타락한 지도자들에게 분노했다. 그들은 지옥자식들이다. 뱀 새끼들이다. 그 뱀 새끼들이 자라 구렁이가 되면 온 예루살렘을 삼켜 버릴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보며 울었다(19:41).
예수는 그들을 미워했다. 더 미워했다.
입에서 칼을 뽑아 한치의 흔들림 없이 그들을 베었다.

분노를 거세당한 예수는 더 이상 예수가 아니다.
예수에게서 분노를 제거하는 순간 예수의 눈물도, 예수의 사랑도, 예수의 연민도, 예수의 열정도 숨통이 끊어진다.
분노가 없는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분노 없는 사랑이 남겨 놓는 것은 더 깊은 배신감과 더 철저한 유린뿐이다.

예수는 사랑에 미쳤다. 미쳐도 제대로 미쳤다. 자기 목숨을 내 놓았으니 제대로 미친 것이다.
분노하는 자만이 사랑에 미칠 수 있다.
예수와의 멜로 드라마를 원하는가?
이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삽질이다.
예수와의 사랑은 눈물을 배우는 것이고
예수를 사랑하는 것은 분노를 익히는 것이다.

예수 앞에 끌려 온 한 여자.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혔다는 여자.
수치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여자.
한 번의 잘못으로 삶의 희망을 모조리 빼앗긴 여자.
손에 돌맹이를 들고 한껏 고조된 사람들.
도대체그 남자는 어디 갔는가?
사람들의 성난 목소리를 압도하는 예수의 분노에 찬 속삭임
죄 없는 놈이 돌맹이를 던져라
그리고
여인을 향하여아무도 너를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예수는 사랑에 미쳤다. 사랑은 미친 짓이다.

눈물을 잃어버린 자.
안구건조증의 영원한 치료제는 예수의 분노이다.
가난과 질병과 억압과 못된 권력과 부와 이기적 종교지도자들과 모든 소외, 전쟁, 환경파괴, 인종주의, 분열, 차별, 편협, 독선을 향하여 분노하라.
가련한 여인의 두려움과 수치심과 절망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군중들을 향하여 분노하라.
사랑은 거기에서 시작된다.

예수의 반쪽

예수의 반쪽은 분노다.
천천히 걸어 다니며 근엄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말하는 예수는 집어 치워라.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시는 분이시다(시7,11).
예수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를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왜 분노하는가?

예수는 왜 분노하는가?‘의로운 재판관’이기 때문이다.
불의한 자는 분노하지 않는다. 분노 대신 타협한다.
분노는 의로운 자만의 전유물이다.
구약성경은 의로움을 ‘공평과 정의’ 라고 부른다.우리 입에 붙은 일상적 표현 ‘공의’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표현하는 매우 강력하고 도발적인 용어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무엇을 생각나게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방적 기준을 생각한다.
하나님이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에 따라 사람들을 평가한다. 
그리고 기준에 맞는 사람은- 그 기준이 어떤 것이든지- 영원한 안식을 주고 
기준에 미달된 사람은 영원한 벌을 받게 된다. 


정말 그런가?
하나님은 우리를 작품으로 만드셨다. 상품이 아니다.
상품은 획일화이다. 틀에 맞춰 찍어낸다.
작품은 독특하다. 기준이 없다. 틀에 맞춰 재단이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작품을 가지고 다시 상품으로 바꾸시는가?


공평과 정의, 미슈팟과 체데크.공평과 정의는 하나님의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이다.
누구를 향한 분노인가?
구약성경을 찾아보라. 이 표현은 상품을 찍어내듯 획일화된 분노가 아니다.
공평과 정의는 맞춤형 분노이다.
약자를 착취하는 잘못된 권력에 대한 분노이다. 가난한 자를 억압하는 부자들에 대한 분노이다. 
백성을 어두운 길로 인도하는 부패한 지도자들에 대한 분노이다.
기준에 미달한 사람들을 지옥불에 던져 넣는 분노가 아니라 잘못 된 기준을 만들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희롱하는 ‘기준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이다.
다윗이 밧세바를 빼앗았다. 간음이 문제인가?
아니다.
당시 왕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 여러 명의 아내도 문제가 아니다.
나단 선지자가 와서 무엇을 책망했는가?
많은 양을 가진 부자가 딸처럼 여기는 한 마리의 양 가진 사람에게서 
그것을 빼앗아 친구를 대접했다고 책망한다.
분노한다. 하나님의 분노이다.
가진 자가 없는 자를 착취할 때, 분노의 하나님은 공평과 정의를 외친다.
심판을 말씀하신다.
한국 사회의 도가니 사태를 보라.
가진 자들이 착취하고 또 착취한다. 거기에 심판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분노이다.
목사가 입양한 어린 딸을 수년간 성폭행했다.
하나님의 분노가 공평과 정의를 이룰 것이다.

한 과부가 자신의 전 재산 두 렙돈을 성전에 바쳤다.
칭찬인가?
아니다. 예수의 분노이다.
서기관들은 과부의 전 재산을 삼키는 자들이다(막12,40).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에 따라 전 재산을 바치도록 종용한다.
때로는 은혜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순종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힘 없고 순진한 과부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따라 전 재산을 기꺼이 성전에 바쳤다.
그 돈은 서기관들의 피하지방이 되었다.
서기관들을 향하여, 성전을 향하여 분노하는 예수가 보이는가?


분노를 잃어버리는 순간 예수도 잃는다.분노를 잃어버리고 얻게 되는 것은 고작 타협이다.
예수의 반쪽은 분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