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반쪽은 분노다.
천천히 걸어 다니며 근엄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말하는 예수는 집어 치워라.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시는 분이시다(시7,11).
예수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를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왜 분노하는가?
예수는 왜 분노하는가?‘의로운 재판관’이기 때문이다.
불의한 자는 분노하지 않는다. 분노 대신 타협한다.
분노는 의로운 자만의 전유물이다.
구약성경은 의로움을 ‘공평과 정의’ 라고 부른다.우리 입에 붙은 일상적 표현 ‘공의’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표현하는 매우 강력하고 도발적인 용어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무엇을 생각나게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방적 기준을 생각한다.
하나님이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에 따라 사람들을 평가한다.
그리고 기준에 맞는 사람은- 그 기준이 어떤 것이든지- 영원한 안식을 주고
기준에 미달된 사람은 영원한 벌을 받게 된다.
정말 그런가?
하나님은 우리를 작품으로 만드셨다. 상품이 아니다.
상품은 획일화이다. 틀에 맞춰 찍어낸다.
작품은 독특하다. 기준이 없다. 틀에 맞춰 재단이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작품을 가지고 다시 상품으로 바꾸시는가?
공평과 정의, 미슈팟과 체데크.공평과 정의는 하나님의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이다.
누구를 향한 분노인가?
구약성경을 찾아보라. 이 표현은 상품을 찍어내듯 획일화된 분노가 아니다.
공평과 정의는 맞춤형 분노이다.
약자를 착취하는 잘못된 권력에 대한 분노이다. 가난한 자를 억압하는 부자들에 대한 분노이다.
백성을 어두운 길로 인도하는 부패한 지도자들에 대한 분노이다.
기준에 미달한 사람들을 지옥불에 던져 넣는 분노가 아니라 잘못 된 기준을 만들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희롱하는 ‘기준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이다.
다윗이 밧세바를 빼앗았다. 간음이 문제인가?
아니다.
당시 왕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 여러 명의 아내도 문제가 아니다.
나단 선지자가 와서 무엇을 책망했는가?
많은 양을 가진 부자가 딸처럼 여기는 한 마리의 양 가진 사람에게서
그것을 빼앗아 친구를 대접했다고 책망한다.
분노한다. 하나님의 분노이다.
가진 자가 없는 자를 착취할 때, 분노의 하나님은 공평과 정의를 외친다.
심판을 말씀하신다.
한국 사회의 도가니 사태를 보라.
가진 자들이 착취하고 또 착취한다. 거기에 심판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분노이다.
목사가 입양한 어린 딸을 수년간 성폭행했다.
하나님의 분노가 공평과 정의를 이룰 것이다.
한 과부가 자신의 전 재산 두 렙돈을 성전에 바쳤다.칭찬인가?
아니다. 예수의 분노이다.
서기관들은 과부의 전 재산을 삼키는 자들이다(막12,40).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에 따라 전 재산을 바치도록 종용한다.
때로는 은혜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순종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힘 없고 순진한 과부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따라 전 재산을 기꺼이 성전에 바쳤다.
그 돈은 서기관들의 피하지방이 되었다.
서기관들을 향하여, 성전을 향하여 분노하는 예수가 보이는가?
분노를 잃어버리는 순간 예수도 잃는다.분노를 잃어버리고 얻게 되는 것은 고작 타협이다.
예수의 반쪽은 분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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