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반쪽은 눈물이다.
연민의 눈물이다.
이 눈물은 예수의 다른 반쪽인 분노와 연리지 나무가 되어 피를 나눈다.
분노와 눈물, 여기에 예수가 있다.
왜 우는가?
사랑 때문이다. 연민 때문이다.
착취하며 착취인줄 모르는 권력자들과, 부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분노한 것처럼
착취 당하며 착취인줄 모르는 군중들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신다.
세상이 원래 그렇다는 그들의 푸념 때문에 예수는 운다.
예수의 눈물은
하나님의 세상이 원래 그렇지 않다는 호소이다.
예수의 연민은
푸념일랑 거둬 치우고 정의로운 새 역사를 함께 그리자는 거룩한 초청이다.
예수는 누구를 사랑하는가?
예수에게는 보편적 사랑이 없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누구에게나 동일한 사랑을 베푸는
20세기의 신사적인 예수는 시궁창에나 던져버려라.
예수의 사랑은 편파적이다.
당파적이다.
예수는 신사가 아니라 혁명가에 가깝다.
예수가 누구나 똑같이 사랑하는 신사라는 말에 속지 말라.
새빨간 거짓말이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을 더 사랑했다. 예수는 병든 사람을 더 사랑했다. 예수는 ‘죄인들’을 더 사랑했다. 예수는 세리들을 더 사랑했고 윤락여성들을 더 사랑했다.
성경을 보라.
예수는 부자들에게 분노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스스로 의롭다 하는 자들에게 분노했다. 사람의 아들은 의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권력자들과 타락한 지도자들에게 분노했다. 그들은 지옥자식들이다. 뱀 새끼들이다. 그 뱀 새끼들이 자라 구렁이가 되면 온 예루살렘을 삼켜 버릴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보며 울었다(눅19:41).
예수는 그들을 미워했다. 더 미워했다.
입에서 칼을 뽑아 한치의 흔들림 없이 그들을 베었다.
분노를 거세당한 예수는 더 이상 예수가 아니다.
예수에게서 분노를 제거하는 순간 예수의 눈물도, 예수의 사랑도, 예수의 연민도, 예수의 열정도 숨통이 끊어진다.
분노가 없는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분노 없는 사랑이 남겨 놓는 것은 더 깊은 배신감과 더 철저한 유린뿐이다.
예수는 사랑에 미쳤다. 미쳐도 제대로 미쳤다. 자기 목숨을 내 놓았으니 제대로 미친 것이다.
분노하는 자만이 사랑에 미칠 수 있다.
예수와의 멜로 드라마를 원하는가?
이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삽질이다.
예수와의 사랑은 눈물을 배우는 것이고
예수를 사랑하는 것은 분노를 익히는 것이다.
예수 앞에 끌려 온 한 여자.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혔다는 여자.
수치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여자.
한 번의 잘못으로 삶의 희망을 모조리 빼앗긴 여자.
손에 돌맹이를 들고 한껏 고조된 사람들.
도대체 ‘그 남자’는 어디 갔는가?
사람들의 성난 목소리를 압도하는 예수의 분노에 찬 속삭임
“죄 없는 놈이 돌맹이를 던져라”
그리고
여인을 향하여 “아무도 너를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예수는 사랑에 미쳤다. 사랑은 미친 짓이다.
눈물을 잃어버린 자.
안구건조증의 영원한 치료제는 예수의 분노이다.
가난과 질병과 억압과 못된 권력과 부와 이기적 종교지도자들과 모든 소외, 전쟁, 환경파괴, 인종주의, 분열, 차별, 편협, 독선을 향하여 분노하라.
가련한 여인의 두려움과 수치심과 절망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군중들을 향하여 분노하라.
사랑은 거기에서 시작된다.
연민의 눈물이다.
이 눈물은 예수의 다른 반쪽인 분노와 연리지 나무가 되어 피를 나눈다.
분노와 눈물, 여기에 예수가 있다.
왜 우는가?
사랑 때문이다. 연민 때문이다.
착취하며 착취인줄 모르는 권력자들과, 부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분노한 것처럼
착취 당하며 착취인줄 모르는 군중들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신다.
세상이 원래 그렇다는 그들의 푸념 때문에 예수는 운다.
예수의 눈물은
하나님의 세상이 원래 그렇지 않다는 호소이다.
예수의 연민은
푸념일랑 거둬 치우고 정의로운 새 역사를 함께 그리자는 거룩한 초청이다.
예수는 누구를 사랑하는가?
예수에게는 보편적 사랑이 없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누구에게나 동일한 사랑을 베푸는
20세기의 신사적인 예수는 시궁창에나 던져버려라.
예수의 사랑은 편파적이다.
당파적이다.
예수는 신사가 아니라 혁명가에 가깝다.
예수가 누구나 똑같이 사랑하는 신사라는 말에 속지 말라.
새빨간 거짓말이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을 더 사랑했다. 예수는 병든 사람을 더 사랑했다. 예수는 ‘죄인들’을 더 사랑했다. 예수는 세리들을 더 사랑했고 윤락여성들을 더 사랑했다.
성경을 보라.
예수는 부자들에게 분노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스스로 의롭다 하는 자들에게 분노했다. 사람의 아들은 의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권력자들과 타락한 지도자들에게 분노했다. 그들은 지옥자식들이다. 뱀 새끼들이다. 그 뱀 새끼들이 자라 구렁이가 되면 온 예루살렘을 삼켜 버릴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보며 울었다(눅19:41).
예수는 그들을 미워했다. 더 미워했다.
입에서 칼을 뽑아 한치의 흔들림 없이 그들을 베었다.
분노를 거세당한 예수는 더 이상 예수가 아니다.
예수에게서 분노를 제거하는 순간 예수의 눈물도, 예수의 사랑도, 예수의 연민도, 예수의 열정도 숨통이 끊어진다.
분노가 없는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분노 없는 사랑이 남겨 놓는 것은 더 깊은 배신감과 더 철저한 유린뿐이다.
예수는 사랑에 미쳤다. 미쳐도 제대로 미쳤다. 자기 목숨을 내 놓았으니 제대로 미친 것이다.
분노하는 자만이 사랑에 미칠 수 있다.
예수와의 멜로 드라마를 원하는가?
이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삽질이다.
예수와의 사랑은 눈물을 배우는 것이고
예수를 사랑하는 것은 분노를 익히는 것이다.
예수 앞에 끌려 온 한 여자.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혔다는 여자.
수치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여자.
한 번의 잘못으로 삶의 희망을 모조리 빼앗긴 여자.
손에 돌맹이를 들고 한껏 고조된 사람들.
도대체 ‘그 남자’는 어디 갔는가?
사람들의 성난 목소리를 압도하는 예수의 분노에 찬 속삭임
“죄 없는 놈이 돌맹이를 던져라”
그리고
여인을 향하여 “아무도 너를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예수는 사랑에 미쳤다. 사랑은 미친 짓이다.
눈물을 잃어버린 자.
안구건조증의 영원한 치료제는 예수의 분노이다.
가난과 질병과 억압과 못된 권력과 부와 이기적 종교지도자들과 모든 소외, 전쟁, 환경파괴, 인종주의, 분열, 차별, 편협, 독선을 향하여 분노하라.
가련한 여인의 두려움과 수치심과 절망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군중들을 향하여 분노하라.
사랑은 거기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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