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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8일 수요일

강산에의 '라구요'와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폭력성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 노래만은 너무 잘 아는 건 내 아버지 레퍼토리 그 중에서도 십팔번이기 때문에
고향 생각나실 때마다 소주가 필요하다 하시고 눈물로 지새우시던..."

강산에가 불렀고 최근 자우림이 '나가수'에서 불렀던 '라구요' 라는 노래의 가사말입니다.

고향을 두고 떠나온 실향민의 외로움과 고독을 잘 담고 있는,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죽기 전에 다시 가 볼 소망이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칠때면 딱 소주가 필요합니다. 쓰디 쓴 술 잔과 함께 마음속 깊이 자리한 외로움이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겠지요.

목사가 무슨 술 타령이냐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소위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은 소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술을 통해 위안을 얻으려고 하는 시도는 근본에서부터 잘못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지요.

그러니 목사의 술타령에 당연히 발끈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에 하나님 이름만 갖다 붙이면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하지만 상처와 내면의 불안정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상처를 주고, 사랑 받고자 하지만 점점 더 고립되는 경우를 너무나 자주 접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고 또 사람을 사랑하는 삶에서 도망쳐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공허함을 대신 채워보려고 합니다.

이런 시도들이 처음에는 약간의 효과를 얻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에게 채워지지 않는 사랑이 있음을 더욱 뼈저리게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은,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 사이의 사랑을 대체하는 사랑이 아니라 그 사랑을 가능하게 해 주는 근원으로서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람에게 받아야 할 사랑은 사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자리를 대신해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외로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충만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는 인간은 누구나 깊은 외로움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한 통로 중의 하나가 바로 '고향'인 것이지요.

그래서 그 고향조차도 빼앗긴 사람들에게는 소주 한 잔이 큰 위로가 됩니다. 그리고 그 소주 한 잔의 위로는 하나님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소위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의 상당수는 사람이 인간사에서 겪는 모든 감정적 욕구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채워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을 통해 대체 만족을 얻을 수 있고, 더 나아가(정확히 말하자면) 그 만족이 본질적인 만족이라고 말합니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이때, 인간의 감정에 대한 근본적인 억압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겪는 외로움, 두려움, 절망감, 자기비하, 그리움 등의 감정을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하며 이런 감정들을 억압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유익이 이 모든 것을 대체해 버릴 수 있다고 믿으면서 자신의 해결되지 않는 감정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입니다.

도피는 일시적 만족을 줍니다. 큰 은혜를 받았다는 경험을 주는 것이지요. 모든 것이 일시적으로는 해결된 듯 보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전히 자신 안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직시하게 되고 심리적 모순을 느끼면서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감정들을 더욱 억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주 한 잔으로 위로를 얻고자 하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부정적 감정들은- 하나님으로 대체되는 듯 하지만 사실은 점점 더 억압되고 맙니다.

그리고 이렇게 억압된 감정들은 어느 시점에서, 혹은 특정 상황에서 폭력적 성향으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쉽게 폭력적 성향을 드러내는 것을 심심찮게 목격합니다.

단군상을 깨뜨리는 그리스도인들, 빨갱이는 모두 잡아 족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런 폭력적 성향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숨겨진 폭력성의 절정은 이교도들은 모두 영원한 지옥불에 던져져 끝없는 고통 속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때로는 강력하게 주장하는 모습에서 나타납니다.

정상적 사고의 수준에서 어떻게 그런 폭력성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도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있는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위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의 감정억압 상태를 고려한다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그들이 억압한 감정과 욕구들은 결국 분출될 곳을 찾다가 자신들과 같이 감정과 욕구를 다스리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분노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억압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은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교도들이 지옥불에 가는 것을 당연하다 여깁니다.

술 취하고 방탕한 사람들은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여기고 동성연애자들은 모두 에이즈에 걸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들의 숨겨진 억압 속에서 분출되는 분노입니다.

자신의 개인적 경건을 위해 더 많이 절제하고 감정을 억압할수록 특정 부분에서 폭력성을 드러내는 경우가 허다한데 핵심적인 것은 그 분노가 자신의 기준에서 방탕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나 이교도들을 향해 있다는 점입니다.

결국,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보이는 폭력성은 잘못된 하나님 이해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경험할 수밖에 없는,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하는 희노애락의 대용물로 하나님을 이해하기 시작할 때, 그래서 자신의 감정들을 무가치한 것들로 치부해 버릴 때,

겉으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듯,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듯 경건해 보이지만 사실은 억압된 감정들이 분노와 폭력성으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래서,

강산애의 노랫말 따라

가끔은 소주 한 잔이 필요합니다.


<자우림의 '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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