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교회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SERVICE' 라는 7가지 가치에 의해서 운영됩니다.
그 시대의 사회적 약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사회적 약자는 조금씩 변해가기 때문입니다.
고대 시대에는 군사력을 가지지 못한 약소 국가, 또는 부족이 약자였습니다.
때로는 권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 때로는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 사회적 약자로 부각되기도 합니다.
물론, 사회적 약자의 전무후무한 강자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최근에는 사회적으로 40대 남성이 돈벌이 자리로 몰려나면서 약자의 자리에 선 것 같습니다.
또, 정신적 문제가 대두 되면서 사회적으로는 성공한 듯 하지만 심리적, 가정적 문제로 고통받는 약자들도 있습니다.
어쨌든, 약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더 구체적으로 차근차근 풀어갈 것이고, 상상교회는 지역 사회의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SERVICE'를 이루어 가는 교회입니다.
Serving (섬김과 봉사) : 교회는 세상을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 섬기는 곳이기에 가장 핵심적인 가치는 섬김입니다.
Education (교육) :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교육입니다. 심리적, 사회적, 기능적으로 적절한 교육이 지원될 때 그들은 도움을 가장 적절하게 받게 됩니다.
Restore and healing (회복과 치유) : 사회적 약자들은 심한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치유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들은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Valuation (가치부여) : 교육과 치유를 통해 자존감이 회복되면 스스로 자신들에 대한 가치 부여가 가능해지고 이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동기부여가 됩니다.
Influence extention (영향력 확대) : 사회적 약자를 향한 섬김의 핵심에는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시켜 사회 구성원으로서 긍정적 삶을 살아가게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Contribution (기부) : 교회는 사회적 약자들을 교육하고 치유하기 위하여 많은 사회적 비용이 필요하고 이는 교회구성원들의 기부를 통하여 해결됩니다.
Evagelism (복음 전파) : 이 모든 섬김은 복음 안에서 이루어지며 복음의 능력을 통해 사회적 약자들은 구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2010년 8월 25일 수요일
2010년 8월 20일 금요일
당신의 가치
어떤 순간, 어떤 처지에서도
당신의 고귀함은 변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비하하고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는다면
당신은
깊은 사막 한 복판에 당당히 피어난
선인장 꽃처럼 생명의 향기를 발할 것입니다.
믿음의 어깨를 펴고
생명의 기지개를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이십니다.
당신의 고귀함은 변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비하하고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는다면
당신은
깊은 사막 한 복판에 당당히 피어난
선인장 꽃처럼 생명의 향기를 발할 것입니다.
믿음의 어깨를 펴고
생명의 기지개를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이십니다.
2010년 8월 18일 수요일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방향
교회의 사회참여가 한때 교계의 논쟁거리인적이 있었다.
주된 논지는 교회의 사회참여가 정당한 것인지, 하나님의 뜻에 합한 것인지, 등등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논의는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사람들이 교회의 사회 참여를 인정하며 동참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시점에서의 논점은 가,불가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사회에 참여하며 교회가 사회에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되짚어 볼 때,
교회의 사회참여는 전반적으로 비교적 진보적 교단과 목회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보수교단과 보수목회자가 교회성장과 전도에 힘을 쏟았다면
진보교단 및 진보적 목회자는 사회참여와 교회의 책임에 집중해 왔다.
물론 이 말은 모든 보수가, 모든 진보가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런 성향을 조금 더 가졌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제는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정치인들에게 목소리를 내고 영향력을 행사하며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방식으로, 혹은 어떤 방향으로 세상에 발을 들여 놓아야 하는가?
우리나라에 선교사들이 들어온 이후 80년대까지 교회의 사회적 책임은 단연 교육과 의료서비스였다.
교육과 의료 서비스에 형편 없던 시절 선교사들이 세운 병원과 학교는 세상을 고치고 싸매는 매우 중요한 도구였다. 그 때 세워진 학교와 병원들이 지금도 명문학교, 명문병원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90년대 들어서면서 교회의 사회참여 방향에 변화가 왔다.
국가의 교육, 의료 서비스 질이 높아지면서 복지 쪽으로 뱡향을 돌린 것이다.
특별히, 아동에 대한 복지,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고 이는 전반적인 복지서비스에 대한 국가적 정책들을 이루어냈다.
2000년대에는 지속적인 복지정책 수립과 가정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강세를 보였다.
복지는 특별히 노인들에 대한 관심이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며 높아졌고 이혼가정, 한부모 가정이 늘어나면서 가정에 대한 프로그램들이 많아졌다.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에 이어지는 사회적 필요는 '상담'과 '교육'이다.
물론 의료나 복지 등 지금까지 교회가 관심을 가져왔고, 그 결과 국가적 정책으로 확립된 주제들은 여전히 중요하고 더 확장될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러한 주제들은 이제 더 이상 교회가 관심을 갖고 주도해 나가지 않아도 국가가 담당하기에 충분해 졌다.
국가의 복지정책들은 지난 10년간 매우 잘 다듬어졌고 확장되었다. 의료서비스 또한 비교적 잘 정착했고 일반적인 교육 또한 그렇다.
누구나 원하면 어렵지 않게 이러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며 사람들에겐 새로운 필요들이 생겨난다. 가정의 문제와 정신적 황폐화로 사람들은 '전문적 상담'을 더욱 필요로 하게 되었다.
또한, 지나친 경쟁교육과 공교육의 황폐화로 교육에 대한 새로운 요청이 대두되고 있다. 누구나 원하면 기본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지만 바른교육, '정상적인' 교육에 대한 요청이 강력해 지고 있는 것이다.
향후 20년은 교회가 세상을 향해 '상담'과 '교육'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
일반적인 복지 정책은 국가가 감당한다. 그러나 아직 '상담'은 그렇지 못하다.
상담비용은 아직도 턱없이 비싸고 기관도 많지 않다. 의료보험도 안 된다.
학위과정중에 있는 실습생에게 상담을 받아도 시간당 5만원이 넘는다. 외국물 먹은 박사에게 상담을 받는 것은 시간당 최소 10만원에서 30만원을 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상담을 필요로 하지만 아직은 넘기 힘든 산이 가로막고 있다.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사교육비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이건 아니지 하는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딱히 대안이 없다.
지나친 경쟁에서 아이들을 구원해 내고 싶어도 길이 없어 막혀 있는 사람들이 많다. 더욱이 이런 비정상적인 교육 환경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교회는 정신적, 가정적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고치는 일을 해야한다. 또한 잘못된 교육 환경을 개선시키고 바른 인격과 마음으로 양육될 수 있는 교육환경을 교회가 만들어 가야 한다.
상상교회의 사회참여 방향은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네트워크이고 다른 하나는 주도적 운영이다.
국가가 주도적으로 감당하고 있는 복지정책들은 마땅히 교회가 함께 품고 가야 할 일들이다.
그러나 80-90년대처럼 교회가 이런 복지정책들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수는 없다.
그래서 상상교회는 지역 사회의 복지정책들과 연합하고 네트워크하여 지역을 섬긴다.
지역사회 복지정책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이다. 이제는 비교적 복지 예산이 풍족하고 더 풍족해질 것이다. 문제는 다양한 자원봉사자의 부족이다.
상상교회는 이 일을 감당할 것이다.
상담과 교육적 대안은 아직 국가가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들이다. 이 부분은 향후 10-20년 간 교회가 주도적으로 감당해야 할 부분들이다.
상상교회는 상상카페를 중심으로 상담실이 운영되고 전문적인 상담에서부터 가정문제, 신앙상담에 이르는 전반적인 상담 센터를 운영한다.
또한 지속적으로 교육 대안을 연구하고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주도적으로 운영해 갈 것이다.
적어도 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반경 10Km 안에서 누구든 이런 서비스를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주된 논지는 교회의 사회참여가 정당한 것인지, 하나님의 뜻에 합한 것인지, 등등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논의는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사람들이 교회의 사회 참여를 인정하며 동참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시점에서의 논점은 가,불가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사회에 참여하며 교회가 사회에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되짚어 볼 때,
교회의 사회참여는 전반적으로 비교적 진보적 교단과 목회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보수교단과 보수목회자가 교회성장과 전도에 힘을 쏟았다면
진보교단 및 진보적 목회자는 사회참여와 교회의 책임에 집중해 왔다.
물론 이 말은 모든 보수가, 모든 진보가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런 성향을 조금 더 가졌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제는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정치인들에게 목소리를 내고 영향력을 행사하며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방식으로, 혹은 어떤 방향으로 세상에 발을 들여 놓아야 하는가?
우리나라에 선교사들이 들어온 이후 80년대까지 교회의 사회적 책임은 단연 교육과 의료서비스였다.
교육과 의료 서비스에 형편 없던 시절 선교사들이 세운 병원과 학교는 세상을 고치고 싸매는 매우 중요한 도구였다. 그 때 세워진 학교와 병원들이 지금도 명문학교, 명문병원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90년대 들어서면서 교회의 사회참여 방향에 변화가 왔다.
국가의 교육, 의료 서비스 질이 높아지면서 복지 쪽으로 뱡향을 돌린 것이다.
특별히, 아동에 대한 복지,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고 이는 전반적인 복지서비스에 대한 국가적 정책들을 이루어냈다.
2000년대에는 지속적인 복지정책 수립과 가정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강세를 보였다.
복지는 특별히 노인들에 대한 관심이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며 높아졌고 이혼가정, 한부모 가정이 늘어나면서 가정에 대한 프로그램들이 많아졌다.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에 이어지는 사회적 필요는 '상담'과 '교육'이다.
물론 의료나 복지 등 지금까지 교회가 관심을 가져왔고, 그 결과 국가적 정책으로 확립된 주제들은 여전히 중요하고 더 확장될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러한 주제들은 이제 더 이상 교회가 관심을 갖고 주도해 나가지 않아도 국가가 담당하기에 충분해 졌다.
국가의 복지정책들은 지난 10년간 매우 잘 다듬어졌고 확장되었다. 의료서비스 또한 비교적 잘 정착했고 일반적인 교육 또한 그렇다.
누구나 원하면 어렵지 않게 이러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며 사람들에겐 새로운 필요들이 생겨난다. 가정의 문제와 정신적 황폐화로 사람들은 '전문적 상담'을 더욱 필요로 하게 되었다.
또한, 지나친 경쟁교육과 공교육의 황폐화로 교육에 대한 새로운 요청이 대두되고 있다. 누구나 원하면 기본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지만 바른교육, '정상적인' 교육에 대한 요청이 강력해 지고 있는 것이다.
향후 20년은 교회가 세상을 향해 '상담'과 '교육'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
일반적인 복지 정책은 국가가 감당한다. 그러나 아직 '상담'은 그렇지 못하다.
상담비용은 아직도 턱없이 비싸고 기관도 많지 않다. 의료보험도 안 된다.
학위과정중에 있는 실습생에게 상담을 받아도 시간당 5만원이 넘는다. 외국물 먹은 박사에게 상담을 받는 것은 시간당 최소 10만원에서 30만원을 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상담을 필요로 하지만 아직은 넘기 힘든 산이 가로막고 있다.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사교육비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이건 아니지 하는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딱히 대안이 없다.
지나친 경쟁에서 아이들을 구원해 내고 싶어도 길이 없어 막혀 있는 사람들이 많다. 더욱이 이런 비정상적인 교육 환경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교회는 정신적, 가정적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고치는 일을 해야한다. 또한 잘못된 교육 환경을 개선시키고 바른 인격과 마음으로 양육될 수 있는 교육환경을 교회가 만들어 가야 한다.
상상교회의 사회참여 방향은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네트워크이고 다른 하나는 주도적 운영이다.
국가가 주도적으로 감당하고 있는 복지정책들은 마땅히 교회가 함께 품고 가야 할 일들이다.
그러나 80-90년대처럼 교회가 이런 복지정책들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수는 없다.
그래서 상상교회는 지역 사회의 복지정책들과 연합하고 네트워크하여 지역을 섬긴다.
지역사회 복지정책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이다. 이제는 비교적 복지 예산이 풍족하고 더 풍족해질 것이다. 문제는 다양한 자원봉사자의 부족이다.
상상교회는 이 일을 감당할 것이다.
상담과 교육적 대안은 아직 국가가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들이다. 이 부분은 향후 10-20년 간 교회가 주도적으로 감당해야 할 부분들이다.
상상교회는 상상카페를 중심으로 상담실이 운영되고 전문적인 상담에서부터 가정문제, 신앙상담에 이르는 전반적인 상담 센터를 운영한다.
또한 지속적으로 교육 대안을 연구하고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주도적으로 운영해 갈 것이다.
적어도 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반경 10Km 안에서 누구든 이런 서비스를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2010년 8월 11일 수요일
목사의 월급과 촌지
한 포털 사이트 정보검색에 한 청년이 질문을 올렸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 담임 목사의 연봉이 1억원, 매달 활동비로 1천만원이 지급되는데 적정한 것인지 묻는 질문이었다.
많은 답글이 달린 것은 아니지만 역시나 대다수가 기독교를 비난하는 글이었다.
목사의 월급, 얼마 정도면 적당한 것인가?
사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목사들은 월 200~300만원의 월급을 받는다. 내 생각엔 70% 가량의 목사가 그렇다.
5% 미만의 목사가 월 500만원 이상의 월급을 받고 20% 이상은 200만원 미만의 월급으로 생활을 한다.
목사의 하루 일과는 새벽 5시 새벽기도로 시작해서 심방과 상담, 설교준비, 잡다한 행정 업무, 때로는 차량 운행과 교회 보수작업, 심지어 교회 청소까지 매우 다양한 일들로 채워져 있다.
하루 일과가 일찍 끝나면 5-6시, 보통은 10-11시에 끝이 난다.
또한, 정규 교단에 소속된 목사들은 대부분 석사 학위 이상의 공부를 마친 고학력자이다.
이러한 여러 상황들을 종합해 볼 때, 비슷한 수준의 학력과 능력을 갖추고 비슷한 양의 업무를 처리하는 다른 직종에 비해 사실 월급의 수준은 현저히 낮은 것이 사실이다.
목사의 월급을 가지고 목사를 비난하는 글을 볼 때 목사로서 솔직히 속이 상한다. 대부분의 목사가 기초 생활비 밖에 안 되는 돈으로 생활하며 밤낮으로 일하는데 억울한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또한 한국교회의 자화상이고 세상에 비쳐지는 모습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더 속상하다.
그러나 일부 목사들이 지나치게 많은 월급을 받는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일명 촌지(寸志)가 그것이다.
교인들은 일반적으로 목사에게 감사의 표현으로 교통비나 책값에 보태라고 촌지를 건넨다.
목사의 월급이 지금보다 훨씬 더 형편 없던 시절, 교인들이 목사의 궁핍한 생활에 도움을 주고자 했던 일종의 기부 행위가 관례로 남아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학교나 다른 기관에서, 혹은 정치인들이 댓가를 바라고, 혹은 모종의 이익을 얻기 위해 건네는 촌지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댓가를 바래서, 혹은 이익을 얻고자 하는 행위가 아니라 대부분이 마음의 감사나 기부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 촌지 문화는 빨리 정리되어야 할 구습이다. 이유는 여러가지이다.
첫째, 목사에 대한 감사의 표현은 돈이 아니라 존경과 순종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목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가르치며 바른길을 지도하는 자로서 교인들의 존경을 먹고 산다. 그러므로 목사에 대한 감사의 표현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다.
둘째, 목사에 대한 예우는 성도들 개인의 몫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몫이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헌금을 목사 개인이 관리하고 유용한다고 오해한다. 그러나 교회에 기부되는 헌금은 교회 공동체가 세운 사람들에 의해 투명하게 관리된다. 마찬가지로 목사에 대한 예우도 교회 공동체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 틀 안에서 목사의 월급과 기타 필요 경비가 지출되는 것이다. 목사의 생활비나 활동비가 부족하다면 그것을 채우는 것은 성도 개인의 몫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결정에 따른 몫이다.
셋째, 교회 안에서는 누구도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 안에는 부자도, 가난한 자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데 조금의 불편함이나 열등감으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 촌지 문화는 이러한 연합과 일치를 깨뜨리기 쉽고 불필요한 갈등을 초래하게 된다. 목사의 양심과 공정성을 위해서 촌지는 사라져야 한다.
상상교회는
적절한 수준에서 목사의 월급을 결정한다. 촌지는 어떠한 경로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교인들은 헌금 중 일부를 '목회자 지원비'로 기부할 수 있고
그렇게 모여진 헌금은 목회자의 활동과 더 나은 목회를 위한 교육비, 예비목회자 양성을 위한 장학금 등으로 사용될 것이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 담임 목사의 연봉이 1억원, 매달 활동비로 1천만원이 지급되는데 적정한 것인지 묻는 질문이었다.
많은 답글이 달린 것은 아니지만 역시나 대다수가 기독교를 비난하는 글이었다.
목사의 월급, 얼마 정도면 적당한 것인가?
사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목사들은 월 200~300만원의 월급을 받는다. 내 생각엔 70% 가량의 목사가 그렇다.
5% 미만의 목사가 월 500만원 이상의 월급을 받고 20% 이상은 200만원 미만의 월급으로 생활을 한다.
목사의 하루 일과는 새벽 5시 새벽기도로 시작해서 심방과 상담, 설교준비, 잡다한 행정 업무, 때로는 차량 운행과 교회 보수작업, 심지어 교회 청소까지 매우 다양한 일들로 채워져 있다.
하루 일과가 일찍 끝나면 5-6시, 보통은 10-11시에 끝이 난다.
또한, 정규 교단에 소속된 목사들은 대부분 석사 학위 이상의 공부를 마친 고학력자이다.
이러한 여러 상황들을 종합해 볼 때, 비슷한 수준의 학력과 능력을 갖추고 비슷한 양의 업무를 처리하는 다른 직종에 비해 사실 월급의 수준은 현저히 낮은 것이 사실이다.
목사의 월급을 가지고 목사를 비난하는 글을 볼 때 목사로서 솔직히 속이 상한다. 대부분의 목사가 기초 생활비 밖에 안 되는 돈으로 생활하며 밤낮으로 일하는데 억울한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또한 한국교회의 자화상이고 세상에 비쳐지는 모습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더 속상하다.
그러나 일부 목사들이 지나치게 많은 월급을 받는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일명 촌지(寸志)가 그것이다.
교인들은 일반적으로 목사에게 감사의 표현으로 교통비나 책값에 보태라고 촌지를 건넨다.
목사의 월급이 지금보다 훨씬 더 형편 없던 시절, 교인들이 목사의 궁핍한 생활에 도움을 주고자 했던 일종의 기부 행위가 관례로 남아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학교나 다른 기관에서, 혹은 정치인들이 댓가를 바라고, 혹은 모종의 이익을 얻기 위해 건네는 촌지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댓가를 바래서, 혹은 이익을 얻고자 하는 행위가 아니라 대부분이 마음의 감사나 기부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 촌지 문화는 빨리 정리되어야 할 구습이다. 이유는 여러가지이다.
첫째, 목사에 대한 감사의 표현은 돈이 아니라 존경과 순종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목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가르치며 바른길을 지도하는 자로서 교인들의 존경을 먹고 산다. 그러므로 목사에 대한 감사의 표현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다.
둘째, 목사에 대한 예우는 성도들 개인의 몫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몫이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헌금을 목사 개인이 관리하고 유용한다고 오해한다. 그러나 교회에 기부되는 헌금은 교회 공동체가 세운 사람들에 의해 투명하게 관리된다. 마찬가지로 목사에 대한 예우도 교회 공동체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 틀 안에서 목사의 월급과 기타 필요 경비가 지출되는 것이다. 목사의 생활비나 활동비가 부족하다면 그것을 채우는 것은 성도 개인의 몫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결정에 따른 몫이다.
셋째, 교회 안에서는 누구도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 안에는 부자도, 가난한 자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데 조금의 불편함이나 열등감으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 촌지 문화는 이러한 연합과 일치를 깨뜨리기 쉽고 불필요한 갈등을 초래하게 된다. 목사의 양심과 공정성을 위해서 촌지는 사라져야 한다.
상상교회는
적절한 수준에서 목사의 월급을 결정한다. 촌지는 어떠한 경로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교인들은 헌금 중 일부를 '목회자 지원비'로 기부할 수 있고
그렇게 모여진 헌금은 목회자의 활동과 더 나은 목회를 위한 교육비, 예비목회자 양성을 위한 장학금 등으로 사용될 것이다.
상상카페, 상상교회
교회개척을 생각중이다.
물론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교계의 상황과 개인적인 미래 사역 계획에 이르는 현실적인 문제들과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교회들이 지역사회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들을
극복해 보고자 하는 개인적 도전,
급변하는 시대에 교회의 미래전망과 표본 샘플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소망,
그리고 참 교회를 향한 영적 갈망 등이 함께 작용하고 있다.
상상카페, 이것이 시작이다.
세상과 소통하며 세상을 치유할 수 있는 곳,
위엣것을 생각하며 아래로 내려가는 곳,
그곳이 상상카페이고 상상교회이다.
바른 교회를 생각하며 변해야 하고 집중되어야 할 것들을 정리하기 위해 문을 열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해...
물론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교계의 상황과 개인적인 미래 사역 계획에 이르는 현실적인 문제들과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교회들이 지역사회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들을
극복해 보고자 하는 개인적 도전,
급변하는 시대에 교회의 미래전망과 표본 샘플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소망,
그리고 참 교회를 향한 영적 갈망 등이 함께 작용하고 있다.
상상카페, 이것이 시작이다.
세상과 소통하며 세상을 치유할 수 있는 곳,
위엣것을 생각하며 아래로 내려가는 곳,
그곳이 상상카페이고 상상교회이다.
바른 교회를 생각하며 변해야 하고 집중되어야 할 것들을 정리하기 위해 문을 열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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