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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24일 화요일

천국과 지옥, 예수의 뒤통수를 치다 - 9. 복음의 이땅성과 그리스도인

저는 지금까지 여덟차례의 글을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천국과 지옥 개념이 어떻게 잘못 되었는지,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과 지옥은 무엇인지,
그리고 왜 천상이주 교리는 복음이 될 수 없는지, 어떻게 예수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이 참된 복음인지를 제 나름대로의 관점에서 설명했습니다.

본래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고
오랜시간 심혈을 기울여 쓴 글이 아닌 즉흥적으로, 생각나는대로 쓴 글이라 글이 썩 좋지는 않지만 제가 이 주제를 통하여 하려고 했던 이야기는 대략적으로나마 대부분 언급한 것 같습니다.

앞 글에서 말 했듯이 이제 마지막으로 부활복음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의미들을 간략히 다루려고 합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의미들이 있겠지만 이 글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한 두가지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모든 글에서 지속적으로 말하려 했던 것, 그리고 제목에서 이미 말하고 있는것, 즉 왜 천상이주가 아니라 부활이어야 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부활복음이 지향하는 것은 이땅성, 즉 성육신(incarnation)입니다. 부활복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땅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며 모든 잘못된 것들이 바로 잡히는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천상이주교리는 우리가 디디고 살아가는 이 세상을 부정합니다. 즉, 탈육신(excarnation)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을 포기해버립니다. 무가치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활복음은 이 땅의 아픔에 동참하고 그것을 치유하고 고치려 하지만 천상이주는 이 땅을 벗어나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축복이 아니라 빨리 벗어버려야 하는 거추장스러운 짐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 떠나기를 거부하는 원초적 딜레마에 빠지기가 십상입니다.


여기에서 부활을 믿는가, 아니면 천상이주를 믿는가에 따른 극명한 삶의 방식과 방향이 달라집니다. 이것이 내가 집요하게 천상이주 교리를 거부하고 부활복음을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삶과 삶의 동기가 180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문제는 우리 신앙의 이유와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의 예배생활에서부터 기도, 구제, 봉사, 전도, 세상을 바라보는 삶의 태도까지 모든 것이 여기에서부터 다른 길을 간다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을 하등한 것으로 여기는 천상이주교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지 못하고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삶을 해석하기 위해 또 다른 교리를 만들어냅니다.
바로 '사후 상급 교리'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을 기준으로 저 세상에 가서 차등으로 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땅에서 잘 해야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후 상급 교리는 천상이주 교리의 핵심입니다. 성도들이 왜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유일한 대답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우선, 사랑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로 말미암은 정의와 평화를 향한 사랑 따윈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도구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오직 내가 천국 가서 상 받는 것이 모든 신앙생활의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충성도 없습니다. 진정한 충성은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가를 바라고 드리는 충성은 엄밀히 말하면 충성이 아닙니다.
이타심도 없습니다. 전도도 내 상급을 위한 것이고 봉사와 헌신도 내 상급을 위한 것입니다. 이들이 그리고 있는 천국은 이기적인 사람들의 집합소일 뿐입니다.

어떤 분은 성경이 분명하게 상급을 말하고 있다고 이야기하실 것입니다. 맞습니다. 성경은 새로운 세상이 오면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에서 나오는 대표적인 구절은 산상수훈에서 예수께서 자주 언급하시는 '하늘에 상이 큼이라' 혹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산상수훈을 찬찬히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사후에 어떤 부가적 상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해 주신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그의 서신 곳곳에서 상을 언급합니다. 면류관도 자주 언급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글들을 종합해보면 바울이 의미하는 상, 혹은 면류관은 그가 그토록 간절히 소망하는 '부활'임을 알게 됩니다. 모든 죽음의 권세가 깨어지고 모든 절망과 아픔을 뚫고 새로운 삶을 얻는 것, 그것이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상급이고 면류관인 것입니다.

즉, 성경이 말하는 상급은 '하나님께서 옳다 인정해 주셔서 새로운 삶을 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누구는 개털모자, 누구는 보석으로 만든 면류관(사실, 저는 이런거 줘도 하나도 안 좋습니다. 있어도 안 쓸 것 같습니다), 누구는 큰 집, 누구는 초가삼간, 이런 싸구려 권력구조가 하나님의 상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글이 조금 길을 벗어났습니다.
어쨌든, 상급에 길들여진 많은 신앙인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이기심, 탐욕, 비교의식, 열등감 등입니다. 진실한 사랑이나 충성, 순전한 용서나 관용을 찾아보기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은 우리를 정의와 평화를 향한 사랑으로 이끌어줍니다. 허황된 저 세상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 겪는 죽음의 권세를 보게해 줍니다. 그리고 그것에 저항할 힘을 주고 이 세상을 변혁시킬 하나님의 능력을 봅니다.
푸념과 한탄과 회피가 아니라 용기와 희망과 저항을 만들어 줍니다.

부활신앙 안에서 예배는 정의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충만해집니다. 기도는 이 세상을 견디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이 세상을 더 사랑하고 변화시키기 위한 결단이 됩니다.
구제와 봉사와 세상을 향한 헌신은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의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된다는 감격을 만들어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뜨거움,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향한 갈망과 자신의 삶을 향한 진솔한 사랑, 이 모든 것이 부활신앙 안에 있습니다. 부활신앙만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래서 부활신앙 안에서 우리의 모든 신앙 생활은 제 자리를 찾고 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천상이주교리가 아닌 부활신앙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입니다.

별로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여기에서 이번 글의 연재를 마쳐야겠습니다.
이후에 더 좋은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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