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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20일 금요일

천국과 지옥, 예수의 뒤통수를 치다 - 8. 악의 뿌리를 뽑다.

저는 지난 글에서(7. 부활이 복음이다) 부활의 핵심은 '되돌아 오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그래서 부활신앙은 되돌아 옴을 소망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모든 잘못된 것들을 되돌리실 것임을 바라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이 복음인 이유는 부활만이 악의 문제를 정당하게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만 악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천국지옥 교리는 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관심조차 두지 않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악해도 이곳을 탈출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악은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기보다는 악을 피해 좋은 곳으로 도망가면 끝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천상이주 교리는 다분히 이기적입니다. 남이야 어떻든 나만 좋은 곳으로 가면 된다는 심리가 매우 깊숙히 박혀 있습니다.
물론 천상이주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천상이주 교리는 인간안에 있는 이기심을 적절히 자극하며 가장 밑바닥에 '나만 아니면 돼' 라는 생각을 심어줍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의 회복, 악이 해결되고 우리 모두가 함께 잘 사는 길, 모든 인류의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일 등에는 관심이 없고 나와 내 가족들만 좋은 곳으로 이주할 수 있다면 다 괜찮다는 이기심을 믿음으로 포장해 주는 것이 바로 천상이주 교리입니다.

현재 개신교를 오염시키고 있는 핵심적 특징 하나가 이기주의입니다. 신앙조차도 이기심을 기반으로 해석하고 오히려 지지해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리 불경기라도 나만 잘 되면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들, 다른 교회 아무리 어렵고 세상에서 욕을 먹어도 내 교회만 부흥하면 된다는 극도로 이기적인 사고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천상이주교리입니다.
물론 더 따지고 들어가면 이원론적 사고가 나옵니다. 이 이원론적 사고가 이기적 신앙관과 만나는 지점이 천상이주교리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부활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활을 향한 소망은 개인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는 영생의 사건이지만 우주적 차원에서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바른 것으로 되돌리시고 모든 불의와 죽음의 세력을 처단하시는 심판행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하 구절에서 생각해 보건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난다는 의미는 '몸의 속량' 즉 부활을 의미하는 듯 합니다.
온 우주가 부활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부활만이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는 하나님의 궁극적 심판이고, 죽음의 권세가 깨어질 때 온 세상이 회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 사상이 생겨난 발화점은 포로기 이후 지속되는 유대인들의 박해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끝까지 신실함을 지켰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 둘 죽어 나가는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다시 살리심을 붙잡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 돌아옴을 통하여 모든 악의 세력을 척결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신원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부활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악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물론 여기에서의 악은 이방 통치자들입니다. 이방의 집권자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짖밟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린하며 호의호식하는 상황에서 악의 세력은 철저하게 이방의 집권자들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하나님께서 왕이 되셔서(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왕이라는 표현입니다) 이방의 통치자들을 심판하시고 모든 악을 해결하신 후에 의와 평강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고 핵심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유대인들의 부활신앙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말합니다.
부활로 상징되던 하나님의 통치와 회복과 신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말입니다. 메시아(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메시아라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예수 안에서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보았고 모든 것을 되돌리시고 모든 피조물을 죽음에서 되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초기 기독교 신앙의 핵심중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것이 그토록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박해를 받은 원인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을 보면 기독교가 반대를 받은 단 하나의 이유는 '예수의 부활'을 전파하기 때문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유대교인들에게 부활은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예수를 받아들일 수 없고 이방인들에게 부활은 말도 안 되는 허황된 사상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매우 불편한 진실이고 이방인들에게는 얼토땅토 않은 허황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유대교의 부활사상에 의해 해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심판의 개시를 본 것입니다.
다만,
기독교 복음은 예수 안에서 악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리는데요,
유대인들을 유린하는 이방의 통치자들이 아니라 '죽음 자체'를 악의 원흉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하는 '맨 나중 심판받을 원수는 죽음이다'라고 선언한 말씀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방 통치자가 아니라 죽음이 진정한 원수라는 것입니다(복음서는 이 죽음을 '마귀'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특별히 요한복음은 마귀가 세상의 왕, 세상의 통치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로써, 부활신앙 안에서 구원이 완성됩니다(구원의 의미에 관해서는 앞의 글 5. 죽음의 의미를 보시기 바랍니다). 즉, 죽음의 문제로부터 해방되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죽음을 돌아가지 않아도, 피하거나 숨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어떤 악의 세력 앞에서도 죽음을 당당하게 맞아들이고 이길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로 말미암은 '구원'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들을 빼내서 어딘가로 데려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신천지라는 이단은 자기들 스스로를 하나님께서 빼낸 사람들로 생각하는데, 이는 구원이라는 말의 의미를 오해한데서 출발한 착각입니다).
오히려 구원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향하여 최종적 심판을 실행하시며 모든 악의 원흉인 죽음을 끝장내시고 하나님의 의와 평강으로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내가 있음이 구원입니다.

점점 글이 어려워진다고 느껴지는데요,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악의 뿌리를 뽑아내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이자 실행입니다.
우리는 예수에게서 부활을 보았고 그 부활을 믿음으로 우리의 부활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바로잡으시도록 우리의 삶을 드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진정으로 복음인 이유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써 보려고 합니다.
아마도 이번 연재의 마지막 글이 될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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