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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16일 수요일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기독교 복음

* 이 글은 현재 주류 기독교에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 자리잡고 있는 교리적 위치를 살펴보고, 그것이 과연 성경에 말하는 기독교 복음을 잘 표현해 주고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글이 전개되겠지만 궁극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바는 내가 이해하는 '기독교 복음의 본질'에 관한 것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1.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는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역사적 의구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향해 어떤 이들은 '나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는다' 라고 자신의 신앙심을 표현합니다. 참 믿음 있어 보이는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는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설령 그렇게 믿는다 해도 말이지요.

모든 텍스트는 해석 되어야만 우리의 인식체계 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어떤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미 우리는 무의식 중에 우리의 해석적 틀 안에서 그 텍스트를 해석하고 있는 것이지요. 해석의 과정 없이 텍스트가 우리의 인식 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글자를 먹는다고 그것이 이해되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믿는다고 생각하더라도, 알게 모르게 우리는 이미 성경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모든 것이 사실은 우리의 기본 지식, 문화, 가치, 언어적 습성 등을 통해 해석된 것이지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그렇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믿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는 순간 이미 해석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해석의 과정 없이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그 해석의 도구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이미 다양한 문화적, 역사적, 사회적, 상징적, 심리적 도구들을 통해 해석이 된 것이지요. 그래서 스스로 '이해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성경을 해석 없이 있는 그대로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여기에서 스크롤을 멈추시기 바랍니다. 그런 분들에게 이어지는 글들은 아무런 의미 없는 자판 두드림의 흔적들일 뿐입니다.



2. 동정녀 탄생의 역사성?

본격적으로 예수의 동정녀 탄생 문제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우선,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 '역사적 사실'인가의 문제부터 다뤄야겠습니다. 물론,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의 논쟁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사실, 저는 부정하지도, 적극적으로 긍정하지도 않습니다만 제겐 그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제가 언급하려는 것은 그 본문이 해석되는 다양한 방식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이 역사적 사실은 아닙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만 봐도 그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가 많이 다르지요. 둘 모두가 역사적 '사실'일 수는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해서 기독교 복음이 흔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족보가 다르다고 해서, 혹은 역사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예수의 '역사적 실재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족보가 틀렸으니 예수의 존재도 인정할 수 없다'라고 말할 수 없지요. 왜냐하면 예수의 역사적 실존이 우선이고 족보는 다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역사적 실재가 부정되면 족보는 아무 의미가 없지만, 족보가 틀렸다고 해서 예수의 역사적 실재가 무효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렇듯, 성경에는 우선 되어야 할 핵심적 기둥들이 있고, 그것이 기독교 복음의 정당성을 부여해줍니다. 성경의 모든 부분이 역사적으로 일치해서 기독교 복음이 진리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결정적 계시를 먼저 경험한 사람들이 그것을 설명해 가는 과정이 성경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 안에는 핵심적 사건들(예수의 실존성, 부활, 교회의 성립 등)의 역사적 진술 이외에도 다양한 상징, 의미부여, 강조, 창조적 해석, 의미들의 연결과 같은 부가 장치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것이 성경 안에 현대 합리주의적 관점에서 보는 '오류'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그런 '오류(순전히 현대적 관점에서 이해할 때의 오류)'들이 기독교 복음을 위협하는 것이 아닙니다. 족보가 틀렸다고 예수의 역사적 실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듯 말입니다.
쉽게 말해, 족보가 역사적 사실과 합치하기 때문에 기독교 복음이 존속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은 궁극적 계시가 있기 때문에 족보의 이기조차도 그 계시를 설명하는 다양한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사실 이런 오류도 근대적 합리주의의 관점에 국한됩니다. 성경 기록 당시의 사람들에게 이런 것은 진리라는 맥락에서 오류가 아닙니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텍스트도 같은 맥락에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마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면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나 유년시절 이야기를 일절 언급하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몰랐기 때문일까요? 아니지요. 그런 이야기들이 복음의 중심 기둥이 아니라고 봤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없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이었겠지요.
족보 없이도 실재했던 예수를 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정녀 탄생 없이도 복음의 핵심을 말하는데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 역사적 사실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족보가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내게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비롯한 모든 탄생기록과 유년 기록은 복음을 설명하는 부가장치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핵심적 기둥이 아니기 때문인 것이지요.
예를 들어,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셨기 때문에 메시아가 되신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말하는데 있어,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의 메시아되심은 물 위를 걸은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기엔, 예수의 동정녀 탄생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 사실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말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는 것입니다. 마가나 요한처럼 말입니다.
(여기에서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지만, 동정녀 탄생의 역사성을 의심하는 것이 할 일 없어서 괜히 트집 잡는 것은 아닙니다. 나름의 그럴만한 이유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 기독교를 설명하는데 중요합니다. 그래서 역사적 사실이라는데 목숨을 걸고 집중(이라 쓰고 집착이라 읽는다)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 그들이 이해하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적 맥락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동정녀로 말미암아 탄생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이해하는 기독교 복음이 붕괴되기 때문이지요.

내가 이 글에서 다루려고 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동정녀 탄생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신학적 구조와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과 어떻게 다른지 말입니다. 만약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 기독교 복음의 필수 요소라면, 마가복음은 복음을 설명하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반쪽짜리 복음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1장 1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란 문구도 틀린 말이 되고, 결국 내부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3. 죄의 성적 유전?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 기독교 복음에서 필수적으로 인식되는 이유는 '죄가 성적 결합에 의해 유전된다'고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오신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대전제를 만족시켜야 하는데, 죄가 성적으로 유전된다고 믿기 때문에 예수는 성적 결합에 의해 태어나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성립하는 것이지요.

사실, 죄가 성적 결합(성행위 뿐만 아니라 성에 의한 생식을 포함하는 의미)에 의해 유전된다는 생각이 기독교 안에 뿌리 내리게 된 것은 어거스틴의 공로가 큽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어거스틴은 회심 전에 매우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성적으로도 매우 방탕하게 살았죠. 그리고 회심 이후로 그는 성적인 것들에 굉장히 민감해 집니다. 심지어 부부간의 성생활 조차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는 죄가 성적 결합의 결과로 유전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거스틴은 원죄가 성적 결과로 유전된다고 철저하게 믿었은 반면, 펠라기우스는 원죄의 유전을 믿지 않았죠. 결과는 잘 아시는대로 어거스틴이 이겼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 이겼다고 영원히 옳은 것은 아니지요.

전통적 원죄 교리(죄가 성적 결합을 통해 유전된다)가 기초로 하고 있는 성경은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부분들입니다. 그런데 정말 로마서 5장이 죄의 유전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본문을 살짝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5:12)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로마서5:14)


언뜻 보면 이 구절이 '죄의 유전'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담의 죄가 그 후손에게 전가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좀 자세히 보면 좀 다른 이야기들이 보입니다.

우선, 바울은 아담으로 인해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고(물론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만),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죽음이 함께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하지요.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말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말합니다. 자동적으로 죄인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죄에 가담했다'는 표현입니다.

더 중요한 부분은, '죽음이 이 세상의 왕으로 자처하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아담과는 다른 종류의 죄를 지은 사람들까지도 모두 죽음의 왕권 앞에 놓였다고 말합니다. 태어나면서 자동적으로 죄인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죽음(혹은 죄)이 다스리는 나라에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죽음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종류는 다르지만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말이지요.

'죽음이 왕노릇 한다'는 표현은 17절, 21절에서 바울이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이 왕노릇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17절).
바울에게 죄, 혹은 죽음(사실, 죄와 죽음은 동전의 양면 같습니다.)은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왕으로 통치하는 권세입니다. 유전이 아니라 통치의 개념이지요. 그리고 모든 인간은 그 죽음과 죄의 권세 아래 죽음의 백성으로 태어나는 것이지요.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아담의 죄'는 성적 결합을 통해 유전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 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세계 안으로 죄와 죽음이라는 권세가 들어오게 된 것이지요.
마치 첫 열매와 같은 것입니다. 아담이 '죽음의 첫 열매'가 된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다른 본문(고린도전서 15장)에서 첫 사람 아담, 마지막 아담을 말하며 죽음에서의 부활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을 통한 생명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말합니다.
아담의 죄를 통해 이 세상은 죄와 죽음이 다르시는 곳이 되었습니다. 죽음이 왕 노릇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왕권 아래 있는 사람들은 그 죽음의 법(혹은 '죄와 사망의 법', 롬8:2)에 따라 살아가기 때문에 모두가 죄를 짓습니다. 모두가 되인인 것이지요. 그리고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우리가 '아담의 죄' 아래 있다는 말은 유전적으로 죄가 전가된다는 말이 아니라 이 세상 전체가 죄가 다르시는 왕국이 되었다는 의미인 것이지요.

예수께서는 이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이지요. 예수께서 성적 혈통을 따라 태어나지 않으셨기 때문에 구원자가 되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임금인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셨기 때문에 우리를 아담의 죄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4. 예수의 '성적 무죄' 혹은 '법정적 무죄'

이렇게 볼 때, 예수께서 죄가 없으시다는 말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그 말은 예수께서 아담의 죄를 유전으로 물려받지 않으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죄가 왕노릇 하는 세상에 오셨지만, 이 세상 왕의 지배를 받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부활로 나타납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죽음의 왕권 아래서 패배하는 듯 보이셨습니다. 죽음의 공격으로 무덤에 묻히신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죄, 혹은 죽음이 더 이상 왕 노릇 할 수 없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통해 예수의 무죄가 확증된 것이지요. 예수의 죽음이 정당하지 않았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의 무죄'에 관해서 조금 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로워 진다' 혹은 '심판을 받는다'는 말은 '법정적'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법정적 개념이지요. 이 부분에 관해서는 바울이 로마서에서 매우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의로워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법정에서 '무죄'를 선고하신 것입니다. 정당성을 입증해 주신 것이지요. 이런 무죄선고를 통해서 죄가 사라집니다. 의롭다고 선고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의 의로움, 예수의 무죄는 바로 이런 법정적 무죄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세상 왕(정치권력 혹은 죽음)으로부터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를 다시 살리심으로 그 판결이 잘못 되었음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정당하셨음을 되찾아 주신 것이지요. 죄가 없으신 분임을 분명하게 밝혀 주신 것입니다.

성경이 예수에 관해 '죄가 없다'고 말하는 맥락은 바로 이것입니다. 성적(혹은 유전적)으로 죄가 없이 태어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의 왕국에 태어났지만, 오직 하나님의 통치를 받은 분이시고, 죄의 왕국에서 죽음을 경험했지만 부활하심으로 그 죽음의 부당성이 폭로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결국 죄의 힘인 죽음을 심판하신 것이지요(고전15:26).


5. 모든 것은 부활에서부터

성경은 죄가 유전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이 죄의 권세인 죽음의 통치 아래 놓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세주가 되신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기독교 복음에서 필수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임마누엘로 오신 하나님의 계시를 설명하는 부가장치일 뿐이지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사실 이미 말했듯이), 예수의 '유전적 무죄'가 아니라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은 '법정적 무죄'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사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부활입니다. 모든 것이 부활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고 부활로 설명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선재사상이나 동정녀 탄생에서 시작하지 않고, 예수의 부활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실, 기독교의 발생과 형성도 모두 부활로부터 촉발되었고 부활에 의해 지탱되었습니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부활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결정적 행동 안에서 제자들은 진리를 발견했고 그것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와 함께 다양한 부가장치들을 성경 안에 담아 놓은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 기독교의 핵심 기둥이 되어버리면, 예수의 부활이 약화됩니다. 동정녀 탄생 교리 안에서 예수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오신 분으로 '죄가 없어야 한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결국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것이 핵심이 되지요. 부활은 예수께서 선재적으로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부가장치로 전락합니다.

이것이 요지입니다. 동정녀 탄생 교리를 강하게 붙잡는 기독교 이야기 안에서 부활의 의미는 필연적으로 약화됩니다. 굳이 부활을 말하지 않아도 죄 용서를 말할 수 있고, 예수의 무죄를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중심이 된 기독교 이야기는 부활이 죽음을 깨뜨린 하나님의 능력이고, 그래서 부활로 인해 예수께서 의롭다고 인정되셨고, 예수의 부활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넘어선 새로운 생명을 얻으며, 죄와 죽음의 권세로 지탱되던 이 세상의 죄와 악이 심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필수 사항이 아닙니다. 마가복음이 복음을 소개하며 말 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6. 하나님의 신비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은 말 그대로 신비입니다. 인간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이지요.
여자의 몸을 통해서 왔으면 신비이고, 성적 결합을 통해서 왔으면 신비가 아닌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거대한 신비 앞에 그런 사소한 차이가 문제가 되는 것일까요?

예수께서 항간의 소문처럼 사생아로 태어난 평범한 인간이었다 할지라도, 그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그 안에 성육신 하셨다는 기가막힌 신비 앞에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소한 구분들은 너무 보잘것없어 보입니다.

나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 역사적, 생물학적으로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꼭 그렇다고 믿지도 않습니다. 그리 중요한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성육신 하신 하나님을 봅니다. 내게 더 이상의 신비는 없습니다. 모든 이론과 사소한 구분들을 무력화 시키는 거대한 신비가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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