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래서 '성령받음'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관해 써보려고 합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이전에 성령이 무엇인지에 관해 정리를 좀 해 보려구요.
헌데, 문제가 좀 있습니다. '성령이 무엇인가?' 이 질문에 성경이 명쾌하게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큰 그림을 한 번 그려보겠습니다.
1. 현재의 '성령받음'에 관한 논의는 근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논의가 성령받음의 '현상'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현상이 성령을 받은 것인가 하는 것이 주된 논점이라는 말입니다. 방언을 하느냐 마느냐, 은사가 있느냐 없느냐, 열매가 맺히느냐 아니냐 등의 논의는 모두 성령 받음을 입증할 수 있는 '현상'에 관한 것들입니다.
2. 하지만 그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중요한 것은 성령받음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왜 주셨고,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 하나님의 새창조와 구속의 역사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의미가 빠진 현상에 관한 탐구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3. 먼저, 성령이 무엇인가 큰 틀을 잡고 가야겠습니다. 톰 라이트는 창1:2절을 기초로 성령을 '창조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현존과 능력'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성령의 인격성과 비인격성을 동시에 포함하는 참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성령을 '하나님의 기운'이라고 표현하기 좋아하는데, '현존과 능력'을 한 단어로 표현해 주는 적절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4. '어라?' 하시는 분들이 있을겁니다. 성령이 곧 '하나님'이시지 무슨 잡소리냐, 하시겠지요. 물론 더 넓게 보면 성령이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도 하나님이시구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삼위일체는 그런 기계적인 삼위일체가 아닙니다. 궁극적으로는 성령도 하나님이시만, 성경이 성령에 관해 표현하는 것은 그렇게 기계적으로 '성령=하나님' 이런 등식이 아닙니다. 사실, 삼위일체는 이 글의 주 논점이 아니기에 여기에선 그만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5. '하나님의 영'인 성령은 곧 '하나님의 바람'입니다. '영'을 의미하는 히브리 단어 '루아흐'가 '바람'이라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령을 '하나님의 기운'으로 번역하길 좋아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특별히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바람은 곧 하나님의 현존이고 계시 방법이며 능력의 상징입니다(창3:8; 8:1; 시18:10; 104:4 등).
6. '하나님의 영', 혹은 '거룩한 영'이 쓰인 맥락들을 종합적으로 고려 할 때 성령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자신의 뜻을 실행시키시는 자기 현현 혹은 능력'이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기운이 부는 것이고 그 기운이 임하는 것입니다.
7.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때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며 성령이 임하신 사건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이 가능해집니다. 예수께서 성령을 받으셨다는 것은 곧,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움직임이 예수 안에 충만하게 임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안에 이 세상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현존이 드러나고, 그 능력이 나타났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곧 '공생애'의 출발입니다. 그래서 '성령'과 '공생애'는 불가분의 관계이지요.
8. 그러나 '성령받음'의 더 핵심적인 사건은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제자들의 성령받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주로 오순절계통의 영향으로) 이 본문에서 보는 것은 성령받음의 '현상'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의미'이지요. 이 사건의 의미는 예수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현존과 능력'이 이제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공생애가 제자들에게 이어졌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회복시키고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기운이 예수를 넘어 제자들에게 동일하게 임했다는 의미입니다.
9. 그래서 초기교회는 성령을 '아들의 영', 혹은 '그리스도의 영(메시아의 영)'이라고도 불렀습니다(롬8:9; 갈4:6).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과 능력이 성도와 교회위에 임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10. 이런 성경의 말씀들을 종합해 볼 때,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회복시키며 새로운 창조를 이룩하여 온 세상을 구속하실 하나님의 뜻이 내 내면과 삶의 중심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그랬고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현존과 능력은 우리를 또 다른 '공생애'로 이끌어 가는 것이지요. 그것이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의 '효과'였습니다.
11.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그래서, '하나님의 움직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망가진 창조세계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움직임이 되는 것, 신음하는 피조물들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움직임이 되는 것, 그것이 성령받음의 진정한 '의미'인 것이지요.
12. 성령받음이 개인의 장신구로 전락하고, 은밀한 자기 자랑의 도구가 되어버린 요즘 시대를 보며, 다시 한 번 성령받음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야 되겠습니다.
13. 그렇다면, 하나님의 기운이신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바울은 이에 대해 로마서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사랑을 부으셨다'고 대답합니다(롬5장). 이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갖게 하고, 온갖 환난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는 것이지요. 예수께서 '공생애'를 사시면서 늘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가운데 거하셨던 것처럼 말이지요.
14. 뿐만 아니라 성령은 '교회를 세우는 영'입니다. 이 세상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뜻이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하나님의 현존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을 통해 교회는 세로워지고 견고해집니다. 이것이 바울이 '성령의 은사'를 언급하며 늘 강조하는 것들입니다.
15. 바울에게 성령의 은사는 개인을 위한 치장품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울이 방언을 인정하지만 경계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교회를 세우는 데 유익하지 않은 은사는 존재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16. 바울서신에 나오는 대표적인 은사목록은 고린도전서와 로마서 두 곳에 있는데, 저는 로마서의 목록이 더 보편적인 은사목록이라고 봅니다.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목록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라는 특수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며 등장하는 목록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로마서의 목록은 바울이 복음에 관해 구체적으로 설명한 뒤에 등장하는 교회의 모습 가운데 나옵니다. 그래서 그것이 더 보편적인 은사목록이라고 보입니다.
17. 로마서의 은사 목록은 예언(말씀은 전하는 역할을 의미합니다),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위로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입니다. 모두 교회를 세우는데 핵심적인 역할들입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교회 안에서 하시는 일들이지요. 교회는 '창조세계의 회복'이라는 하나님의 프로젝트를 감당해야 할 '하나님의 움직임'이기 때문입니다.
18. 성령받음은 하나님의 움직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 창조에 참여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기운이 우리 안에 살아 있는 것이며, 그래서 결국 예수의 마음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예수의 영'이 임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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