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 이야기의 주제가 '하느님의 나라'라는 것을 알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나름대로 성서도 읽고 교회에 관심도 많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신학대학에 진학할 정도의 열심은 있었지만 복음서의 예수 이야기가 하느님 나라 이야기라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
교회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여러차례 성서공부 인도를 했다. 주로 복음서와 예수 이야기를 했는데, 복음서의 이야기가 하느님의 나라에 맞춰져 있다고 알고 있는 성도를 만나기는 참 어려웠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듣는다는 사람이 부지기수였고 들어는 봤으나 대략적 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천국'과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구별되느냐 물었을 때, 그 둘이 같은 개념이라고 답한 사람은 10년 동안 한두명 밖에 만나보지 못했다.
이렇듯 성서의 핵심 개념인 하느님 나라와 일반교회에서 성도들이 이해하고 있는 기독교 복음 사이에는 과연 극복될 수 있을까 싶을만큼 동떨어져 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말씀하시고, 하느님의 나라가 왔다고 선언하시고,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사셨는데, 이 시대의 교회는 예수 믿어 천국 가는 이야기, 이 땅에서 복 받는 이야기를 한다.
이런 예수 없는 예수복음 이야기가 복음의 핵심으로 전수되고 확대 재생산 되는 근본적 이유 하나가 바로 복음서의 핵심인 하느님 나라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를 그저 죽어서 가는 천국, 혹은 예수 잘 믿고 복 받아서 마음 편하고, 교회 생활 잘 하고, 가정 행복한 것 정도로만 이해한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이 송두리째 부정당하고 있다.
나는 어릴적부터 나름 믿음이 좋았다. 죽으면 꼭 천국에 갈 것이라 확신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음을 철썩같이 믿었다. 마음에 늘 감동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대부분 억지 울음을 짜냈지만 가끔은 정말 마음에 큰 감동으로 눈물도 흘렸다.
신학교에 진학해 공부를 시작하면서, 성서가 말하는 천국이 내가 믿던 그 천국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이해해가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믿어왔던 천국이 부정당하는 현실을 견딜 수 없어서 적절한 선에서 두 개의 개념을 동시에 가지고 타협해 왔지만, 엄밀히 말해 내게서 예전의 천국은 사라져버렸다. 대신 예수께서 '이미 왔다'고 선언한 하느님의 나라가 들어왔다.
전통적 천국관에서 시작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발견하고, 그 이후의 거의 모든 신학자들이 연구 몰입한 하느님 나라 이야기들을 공부하면서 나도 나름 하느님의 나라를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여겼다. 그래서 교회에서 가르치기도 했고 설교도 했고, 그리 살아야겠다 결심도 했다. 어느 교회를 가든지 열렬한 하느님 나라 전파자였다.
그러나 요즘은 그렇게 확신있게 말할 수가 없다. 하느님 나라의 정체가 불분명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현실적이지 않아 보이는 것은 내 믿음 탓이라 하더라도 예수의 말씀과 태도가 일관성이 없어 보이기도 하고,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모호해 보이기도 한다. 이런 느낌은 바울이 해석한 예수와 하느님을 함께 봐도 가시지가 않는다.
그래서 나 스스로의 답답함을 해결해 보고자 이 글을 시작했다. 길지 않은 글들로 가급적 쉽게(라고 쓰고 얕게) 풀어가보려 한다. 핵심적 단어로 붙잡고 있는 것은 '예언자 예수', '묵시가 예수', '하느님 나라의 비유' 이렇게 셋이다.
예수께서 어떤 생각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말하셨는지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예수의 정체성이다. 나는 그 정체성의 핵심에 예언자로서의 예수와 묵시가로서의 예수가 공존한다고 본다.
복음서는 분명하게 예수를 예언자로 그린다. 사람들이 예수를 예언자로 봤고, 예수 스스로도 자신을 예언자로 묘사한다. 따라서 예언자가 어떤 사람들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예수를 이해하는 첫 걸음이다.
또한 예수의 말씀들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풍성한 묵시적 비전이 나온다. 예수 당시 가장 강력한 시대정신이었던 묵시의 영향에서 예수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말과 행동에는 자연스럽게 묵시적 세계 인식과 비전이 등장한다. 이 또한 예수를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배경이다.
예수께서 이해한 하느님 나라는 이러한 예언자 전통과 묵시적 세계관 그 중간 어디쯤에 있지 않을까. 아니, 중간이 아니라 이 둘이 잘 섞이고 조화를 이뤄내면서 둘의 특성 모두를 포괄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현재의 내 추론이다. 예언자 전통이 강조되면 이 세계의 변화와 이 세계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이 드러날 것이고 묵시적 관점이 강조되면 이 세계가 부정되고 오는 세계(혹은 내세)가 더 잘 보일 것이다. 거칠게 표현해보자면 전통적 천국 개념은 예수의 묵시적 비전이 강조된 형태이고, 사회구원을 위한 하느님 나라 운동은 예언자작 전통이 더 강조된 형태라 할 수 있다.
나는 예수라는 개인 안에서 뒤섞여 있는 이 두 가지 관점이 충돌하면서 비유라는 하느님 나라 전달 방식이 탄생했다고 본다. 아마 예수께서도 예언자적 하느님 나라와 묵시적 하느님 나라가 혼합된 형태를 말로 풀어 설명하기 어려우셨을 수 있다. 그것이 마음 속에 어렴풋이 그려지지만 설명으로 풀어내기 어려우니 비유라는 특별한 수단을 사용하셨던 것 아닐까.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말씀하실 때마다 비유로 하셨는데, 이 비유 안에는 예언자적 세계와 묵시적 세계가 모두 담겨 있다. 비유 안에서 예언자적 세계와 묵시적 세계가 어떻게 만나는지를 살피는 것이 예수를 이해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의 나라를 이해하는 가장 결정적 열쇠가 될 것이다.
앞으로 그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예언자 전통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어떻게 이해되는지, 묵시 세계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어떻게 이해되는지, 그리고 예수의 비유 안에서 두 세계는 어떻게 만나고 싸우고 화해하는지, 그 여정을 출발한다.
어떻게 결론이 날지 나도 아직 모른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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