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언급했듯이 구약성서에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하느님의 나라라는 개념이 구약성서에서 낯선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구약성서 전반에 중요한 기둥으로 서 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사울 왕을 시작으로 왕정이 시작됐다. 그리고 남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하기까지 이스라엘에는 쭉 왕이 있었다. 남북왕조의 분열 이후 남북이 서로 다른 신학적 강조점을 가지고 왕조가 이어졌지만 남북왕조 모두 왕정국가라는 형태를 계속 유지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정에는 특별한 점이 있었는데, 사무엘서에서 사울을 왕으로 세울 때 이스라엘의 왕정신학이 잘 드러난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스라엘의 진짜 왕은 야훼 하느님 뿐'이라는 것이다.
현실적 필요를 위해 눈에 보이는 왕을 세우지만 이스라엘의 영원하고 진실한 왕은 야훼 하나님뿐이다. 이스라엘은 사람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는 나라다. 왕은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지만, 왕의 모든 권력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 야훼 하느님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왕에게 부여된 첫 번째 과제는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다. 이것이 성서에서 이스라엘의 왕들을 평가하는 절대적 기준이다. 그 왕이 얼마나 나라를 부강하게 했는가, 대외 정치를 얼마나 잘 했는가 하는 것은 성서의 관심이 아니다. 오직 그가 얼마나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노력했는지, 그리고 그 뜻을 얼마나 잘 실현시켰는지가 그 왕을 평가하는 절대적 기준이 된다.
열왕기서에는 다양한 왕들이 등장한다. 역사적 문헌을 살펴보면 남북왕조 통틀어 가장 부강하고 대외적 영향력이 있었던 왕조가 오므리왕조이다. 오므리, 아합, 여로보암2세로 이어지는 왕들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를 만들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성서는 이 왕조를 가장 부패하고 불온한 왕조로 기록하고 있다. 왕의 가장 첫째 되는 과제인 하느님의 뜻을 따라 통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구약성서는 지속적으로 하느님의 통치를 강조하고 있다. 비록 현실 왕을 통해 나라가 다스려지고 있지만, 그 근본에는 하느님의 통치가 있다. 야훼 하느님은 왕을 통해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이스라엘의 영원하고 유일한 왕이시다.
바벨론의 침공으로 유다와 다윗왕조가 몰락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이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하느님이 왕이시다'라는 신학이었다. 다윗왕조의 몰락은 단순한 왕조의 몰락이 아니라 야훼라는 왕의 몰락이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땅에서 추방당하신 것이고, 왕이신 야훼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난 사건이었다. 더 이상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다스시리는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었다. 하느님은 더 이상 왕이 아니라 추방당해 유랑하는 패배의 신일 뿐이었다.
그러나 왕이신 하느님에 대한 소망이 쉽게 포기될 수는 없었다. 예언자들, 특별히 제2이사야를 비롯한 포로기 이후 예언자들은 다시 '왕의 귀환'을 선포했다. 하느님께서 돌아오실 것이고, 하느님의 영광이 다시 나타날 것을 선언했다. 상실한 하느님의 나라가 다시 회복될 것이란 예언인 셈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나라라는 개념이 예수의 시대까지 이어진다. '하느님의 나라'라고 분명하게 언급할 필요가 없었던 일이, 나라의 멸망으로 인한 하느님의 침묵으로 인해 '하느님의 나라'라는 분명한 개념으로 언급되기 시작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며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절히 원했던 바로 그 사건, 하느님의 영광이 돌아오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으로 다시 왕위에 오르는 사건, 하느님께서 세우신 왕이 이스라엘의 왕좌에 오르는 사건, 바로 그 사건이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첫 선포에 이르렀다. 갈 길이 아직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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