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나라라는 표현은 구약성서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다가 신약성서가 시작되는 마태복음서에 뜬금없이 '천국'이라는 말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것도 신약성서의 핵심인 예수와 세례자 요한에 의해서 말이다. 그러니 구약과 신약의 흐름, 더 나아가 구약과 신약의 비어 있는 중간시기에 대한 이해 없이 성서를 읽으면 '예수께서 천국이라는 새로운 복음을 선포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래왔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전한 천국복음이란 것이 구약 시대에는 알지 못하던 새로운 세계, 즉 사후의 천국에 관해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선구자를 넘어 인간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하느님께서 계시는 천상의 세계를 보여주신 분이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도, 구원자라는 말도, 메시아라는 말도 모두 천국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신 분이라는 의미에서 해석된다.
그러나 앞 글에서 언급했듯이, 복음서에서 말하는 천국은 그런 천국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천국이라는 단어가 복음서에서 처음 나올 뿐, 이미 동일한 개념은 구약성서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예수께서는 동시대인들과는 전혀 다른 인식 속에서 천상의 것을 전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동시대인들의 사고와 문화 안에서, 하느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여주신 분이다. 하느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유대인들에겐 이미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기본적 인식이 있었고, 그에 대한 깊은 갈망이 있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하느님의 나라가 왔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하느님의 나라는 '야훼 말라크' 즉, '야훼가 왕이시다(혹은 야훼가 다스리신다)'라는 표현안에 담겨 있다. 야훼께서 왕이 되어 다스리시는 나라, 그것이 곧 하느님의 나라이다. 이스라엘이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하며 벌였던 논쟁, 하느님께서 다윗의 자손에게 영원한 왕위를 허락하시는 다윗언약, 바벨론의 침공으로 나라가 멸망하고 하느님께서 세우신 왕이 폐위되는 모든 과정 가운데 가장 중심에 있는 개념이 바로 '야훼가 왕이시다'라는 하느님 나라였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 '하느님의 나라' 즉 야훼께서 다시리시는 나라가 곧 도래 한다고, 아니 벌써 시작되었다고 선언하셨다. 그것이 예수의 사역이었고 가르침이었고 삶의 방향이었다. 그리고 예수는 그런 삶 때문에 살짝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셨다.
(물론 많은 논증이 필요하겠지만 이 글에서의 핵심은 이 지점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바라던 하느님의 나라와 예수께서 선언하신 하느님 나라의 간극이기 때문에 자세한 논증은 생략한다. 궁금하신 분은 이미 수 많은 자료들이 출간되었기에 그런 책들을 참고하시길..)
예수께서는 사후 천국이라는 신세계를 지상의 무지한 영혼들에게 깨우쳐 주시러 오신 분이 아니다. 사실 예수는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의 문화속에 살았고, 유대인들이 보편적으로 바라고 소원하던 하느님의 나라를 함께 꿈꾸던 사람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보편적 유대인들이 바라던 하느님의 나라와는 조금 다른 비전을 가지고 계셨다. 그리고 그 비전 안에서 사셨고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다. 이것이 예수를 특별하게 만든다. 특별함을 넘어서 인류의 새로운 시작을 창조했다.
예수께서 꿈꾸셨던 것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계시는 천상의 도시로 인도할까?'가 아니었다. 예수께서 갈망하셨던 것은 '이미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를 어떻게 깨우치고 전파할 것인가?'였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온 세계의 왕으로 왕좌에 오르고 계신데 이 사실을 어떤 방식으로 설명해야 하는지, 그것에 예수의 주 관심이었던 셈이다.
이것이 예수에게 쉽지 않은 과제였다. 1년 이상을 함께 보낸 제자들도 예수의 죽음 이전에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복음서가 증언하고 있다. 이는 예수께서 이미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인지 제자들을 깨우치는데 큰 어려움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어려움은 제자들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다. 이미 살펴본대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2천년 가까운 시간동안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에게 오해되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서 하느님의 나라에 관해 말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여전히 그 분명한 그림이 잘 나오지 않고 있다.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오늘 우리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뿐더러, 성서가 제자들이 어리석음을 지적하며 다시 해석해서 말해주고 있는 내용도 우리는 여전히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핵심적 질문은 이것이다. 예수 당시 대다수의 경건한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셨지만 유대인들에게 배척당하셨다. 이유가 무엇인가? 유대인들과 예수께서 바라본 하느님 나라는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었는가? 중세를 거쳐 종교개혁자들이 이해했던 천국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와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 자유주의자들이 발견한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께서 꿈꾸고 성서 기자들이 증언한 하느님의 나라와 얼마나 유사한가? 그리고 우리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에 얼마나 근접해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어지는 글에서는, 그렇다면 과연 유대인들이 바라던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이었는가에 먼저 답해보고, 다음으로 예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거의 유일하게 사용했던 방식인 비유들을 통해 그 차이점을 찾아보려고 한다.
특별히 예수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되는 예언자 전통과(실제로 예수는 예언자라고 불렸다) 예수의 언행에서 자주 드러나는 묵시사상을 살펴볼 것이다. 솔직히 나는 전문적인 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대단히 학술적인 글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개략적인 그림을 그려볼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예언자 전통과 묵시사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펴보고, 예수의 비유 안에서 그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얽히고 풀리는지를 찾아보면, 예수께서 바라고 선언하신 하느님의 나라가 어떤 형태였는지 대략적 그림이 우리에게 그려지리라 기대한다.
쉽지 않은 이런 작업이 의미가 있는 이유는, 우리같은 보수적 신앙인들에겐 예수의 삶과 말과 방향이 매우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를 읽는 눈, 이 시대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더 가까울지를 깨닫는 지혜, 이 모든 것이 예수의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는가에 달려있다. 그래서 나는 내 안에 정리되지 않은 이 문제를 풀어보려 하는 것이다.
부족한 글을 겁도 없이 까발려놓음으로 내 수치를 스스로 드러내는 시간들이 되겠지만, 그만큼 내 안의 갈증이 크다. 때론 상처가 능력이 되기도 한다는 말을 믿으며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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