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부 개신교 신도들의 봉은사 땅밟기를 시작으로 개신교와 불교가 대립의 각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다.
불교를 우상숭배라 단정하고 조직적, 계획적으로 불교를 흠집내거나 비하하는 개신교에 대하여 불교가 공식적으로 대응을 시작하면서 대립이 본격화 되었다.
물론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불교에 관해 이런 입장을 지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직도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땅밟기와 같은 미신적, 주술적 신앙행위들을 영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분쟁이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 않다.
목사로서, 이 시대의 한국 기독교인으로서 참 많이 부끄럽다. 한국 기독교의 근본적인 재고, 본질적인 신앙의식 개혁이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나도 대학 초년병 때 땅밟기라는 것을 해 봤다. '예수전도단' 이란 선교단체에서 잠시 활동을 했었는데, 캠퍼스 이곳 저곳을 다니며 기도를 하고, 국내 혹은 해외 전도여행을 가서도 그런 기도 행위를 한다.
사실 땅밟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 행위에서 일종의 쾌감을 느낀다. 장소가 평범한 곳이 아니라 위험한 지역이거나 타 종교의 사찰 등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 행위를 통하여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대단한 전투가 일어나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기고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 실행해야 한다는 긴장감이 쾌감을 증폭시킨다.
또한, 그런 행위를 하면서 '믿음' 이라는 것이 더 강화되기도 한다. 그런 사소한 행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큰 역사가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믿음을 추구할 때, 그 행위에 대한 열정도 생기고 내가 위대한 역사의 중심에 있다는 영웅심, 혹은 의협심도 생겨난다. 나의 경험상 이 모든 것이 이런 행위를 지속하게 하는 일종의 쾌감이다.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혹은 더 나이를 먹은 성인들조차 땅밟기라는 행위에 열중해 있는 모습들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런 행위들을 통해 복잡 미묘한 쾌감을 누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행위들은 타종교에 대한 배려가 없다거나 지혜롭지 못한 행동이었다는 것 이전에 기독교를 이해하는 근본적인 태도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들을 지니고 있다.
첫째, 땅밟기와 같은 이런 행위들은 영적인 것이 무엇인가 하는 데 심각한 오해를 지니고 있다.
이런 신앙을 주장하고 실행하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의 의미를 이원론적 사고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땅밟기와 같은 행위들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은 영계의 전투가 진행되고 있다고 믿으며, 악한 영과의 대립에서 승리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진정한 승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런 행위들을 통한 기도를 무기로 사탄의 세력이 무너져 내린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예수 이름을 일종의 주문처럼 생각한다.
아무런 자기 희생이나 진지한 십자가 짊 없이도 예수 이름을 외치면 사탄의 세력이 무너져 내린다는 무속적신앙을 가지고 예수 이름을 마법 주문처럼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역사 자체를 영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고, 하나님의 역사는 천상에서의 전투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 생활에 스며 있다고 말한다.
선한 양심을 가지는 것, 하나 되기 위해 애 쓰는 것,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 평화를 이루어 가는 것, 재물을 의지하지 않는 것,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 등,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지만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 영적인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존재적 이원론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분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한 영적 전쟁은 저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한 복판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둘째, 또한 이런 행위들은 우상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들은 타종교를 무조건 우상으로 여긴다. 그래서 그 우상이 무너지도록 기도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되묻는다.
물론 불교나 이슬람, 혹은 무속종교와 같은 타종교에 우상적 요소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돌아볼 때 기독교는 우상에서 자유로운지 생각해 봐야 한다.
교회 안에 범람하고 있는 물신숭배, 세속주의는 이미 우리가 극복하기 어려운 우상이 되었다. 수 많은 교회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은 왜 그리 인간의 경제활동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모두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사실, 십계명에 나타난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은 타종교를 배척한다는 의미보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눈에 보이는 다른 것들을 좇지 말라는 의미이다.
다른 종교를 배척하지 말라는 의미보다 하나님을 돈으로 생각하고, 탐심에 가득한 마음으로 기도하지 말라는 의미를 더욱 강하게 담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 5절은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말한다.
분명, 불교 안에는 우상숭배가 있다. 그러나 동일한 우상숭배가 기독교 안에도 존재한다. 여기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우상은 인간의 마음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종교 집단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는 근본적으로 좋은 종교이다. 내가 믿기로 그 안에 가장 핵심적인 진리를 결여하고 있을 뿐이지 우상숭배로 취급될 저급한 종교가 아니다. 물론 불교 안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많은 흐름들이 우상숭배에 빠져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불교는 나쁘지 않다.
오히려 자만심에 가득차서, 탐욕에 눈이 멀어 예수 이름을 주문으로 사용하고, 하나님을 경제활동의 후원자로 생각하는 개신교인들이 더 심각한 우상숭배자들일 수 있다.
셋째,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이들은 예수의 십자가와 그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부르심을 잘못 해석했다.
이들은 세계를 하나님과 악한 사탄의 대결장소로 이해한다.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니 당연히 '영적 전쟁'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전투력을 증강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일부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전투력 증강을 위해 취하는 방법에는 반기독교적 태도라 여겨질만한 것들도 분명 존재한다.
예수님 당시 사탄의 가장 핵심적인 세력은 로마권력이었다. 봉은사를 기습한 이들에게 악의 가장 핵심적인 세력은 불교를 비롯한 타종교로 여겼졌을 것이다.
예수님은 악의 가장 핵심적 세력 앞에서 그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군대를 조직하지도, 기도운동을 일으키지도, '땅밟기'를 하지도, 비밀작전을 수행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악의 중심을 향해 묵묵하게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셨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듯이 십자가는 그의 희생과 낮아짐, 겸손과 용서의 표현이다.
악의 대표적 상징이었던 로마와의 전투가 아니라 그 악에 의해 처형을 당하면서도 용서를 서포하시는 그의 십자가를 통해 악을 해결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이다.
만약, 불교가 악의 상징으로 여겨진다면, 불교와의 전쟁이 아니라 오히려 불도인들을 섬기고 그들이 저지른 잘못들을 용서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할 일이다. 그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길인 것이다.
이 땅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바르고 건강하게 믿음을 지키며 살아간다. 그러나 아직도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잘못된 신앙과 행위에 물들어 있다.
자신의 아집과 독선, 미움과 다툼을 고집하는 것이 신실한 신앙인양 착각하고 있다.
이번 봉은사 땅밟기 사건을 계기로 기독교가 새로워지길 바란다. 잘못된 신앙 행태들이 근본적으로 새로워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쓰고보니 너무 길게 썼네요...
답글삭제읽을 사람이 없겠군...
어렵고 복잡하게 말하는 은사를 거둬 가시도록 기도해야 겠네요..ㅋㅋ
옛날 생각 나네요~ 몽골 땅의 큰 불상을 보면서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답글삭제그래도.. 그래도 말이지요..
저 역시 이 방법과 결과가 매우 부정적이고 옳지 못한 것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대표 목사가 한 인터뷰에서 그 청년들과 그들의 행위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잘못된 행위이며 반드시 사죄해야 할 행동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씁쓸함을 감출 수는 없었습니다.
팔은 안으로 굽기 때문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