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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19일 금요일

요한복음연구 12

요한복음 4장 1-15절

야곱의 우물


요한복음은 지속적으로 예수의 사역을 ‘세례’와 고리를 만들어간다. 그 유명한 사마리아 여인과의 우물가 대화도 그 근본 시초가 세례 때문이었음을 말하면서 이 사건 자체도 예수의 세례, 즉 그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토대 위에서 진행된다.

요한복음에는 지속적으로 ‘물’ 또는 ‘세례’에 관한 모티브가 등장한다. 특별히 물에 관한 모티브는 요한복음의 가장 핵심적 뼈대를 이루는 일곱 가지 표적에서 변함없이 등장한다. 첫 번째 표적은 물을 포도주로 만든 것이었다. 우물가에서의 대화 이후에 두 번째 표적이 등장하는데 이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곳’에서 이루어진 것이다(4:46). 세 번째 표적은 베데스다 연못가 물이 움직이는 곳에서 이루어졌고(5:3) 오천 명을 먹이신 네 번째 표적은 논쟁 중간에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가는 사건이 등장한다(6:19). 다섯 번째 표적도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것이고(9:7) 여섯 번째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사건도 요한이 ‘세례’ 주던 곳에서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10:40) 죽은 자를 살리는 사건은 직접적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표적이다. 마지막 예수의 표적인 그의 죽음에서 요한복음은 예수의 몸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다고 말함으로(19:34) 모든 표적을 ‘물’이라는 모티브로 연결한다.

이런 물과 관련된 모티브는 요한복음이 철저하게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집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표적은 궁극적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광(1:14)을 나타내는데,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 요한복음의 핵심적인 선포이다.

본문의 가장 핵심적인 모티브도 ‘물’이다. 특별히 본문은 생명의 근원이 예수께서 주시는 물에서 나온다고 말한다(4:14). 요한복음의 전체 메시지 안에서 예수께서 주시는 물은 그의 몸에서 쏟아져 나온 물을 의미하며 이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이 세상의 회복을 의미한다.

물을 모티브로 하여 본문에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대립이 나타난다. 역사적으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은 지속적인 갈등관계에 놓여 있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가장 핵심적인 갈등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향한 유다백성들과 사마리아 지역에 남아있던 백성들과의 갈등이다.

그러나 둘 사이의 갈등은 훨씬 더 깊은 골을 가지고 있다. 지파동맹시절부터 시작된 갈등은 결국 남북왕조의 분열로 이어지는데 그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지점이 ‘성전’이다. 남 왕조 전통은 다윗의 성전을 가장 핵심적 신앙지표로 이해하여 단과 벧엘에서 제사를 드리는 북 왕조를 우상숭배자들로 단죄하며 끊임없이 핍박하였다. 이런 뿌리 깊은 갈등이 포로 귀환 이후 성전 재건 사업에서의 첨예한 대립을 초래하였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인들의 지역을 통과해서 다니지도 않았다. 철저하게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 취급하였기 때문에 그들과 한 자리에 있거나 함께 음식을 먹는 행위 등은 유대인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불경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를 만나고 있는 이 여인은 남의 눈을 피해 살아가고 있던 사람인 것 같다. 그가 정오 가장 뜨거운 시간, 사람들의 이동이 거의 없는 시간에 물을 길러 우물에 나왔다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4:6). 물론 이것은 그녀가 평판이 좋지 않았다거나 윤리적인 문제를 가지고 살았다는 것을 증명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에게 일어난 일을 알아맞힌 예수를 사람들이 보러 나온 것이나(4:29-30) 그녀의 증언이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가졌던 것을 볼 때(4:42) 그녀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다는 정황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분명한 것은 그녀의 남편과 관련된 안 좋은 일들이 그녀에게 겹쳐서 일어났고 모든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알았으며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을 피하며 살았다는 정황이다. 그 안 좋은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녀에게 여러 명의 남편이 있었다는 것 외에는 그 상황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또한 그런 상황이 그녀의 성적 타락이나 윤리적으로 비난받을만한 행동은 아니었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그녀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우물가에 나타난 것은 그녀가 윤리적으로 비난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녀 안에 있는 상처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찌됐든 지금 예수께서 만나고 있는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고 여자였고 수많은 상처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는 미천한 사람이었다. 요한복음은 이 점을 부각시키며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이 여인을 만나셨고 그녀에게도 동일하게 생명을 전하고 있음을 전해준다. 예수의 생명은 인종과 지역과 성별과 지위를 넘어 누구에게나 경험되는 죽음과 부활의 능력인 것이다.

북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야곱’이란 조상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야곱은 ‘이스라엘’이란 이름의 실제적 조상으로서 북이스라엘은 야곱의 자손이라는 특별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4:12). 특별히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던 북이스라엘은 야곱의 자손으로서의 정통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즉 자신들을 야곱의 자손으로 부르는 것은 자신들에게 이스라엘 민족의 정통성이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당신이 야곱보다 더 위대한 분입니까’ 라는 여인의 질문은 이런 신학적 맥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이 여인의 말을 통해 예수의 존재가 남북 왕조의 전통과 정통성을 넘어서는 더 근원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예수께서는 유대 전통을 따르는 것도, 이스라엘 전통을 따르는 것도 아니다. 야곱보다 더 크신 예수는 이 민족의 태초에, 그 이전에 존재하셨고 이스라엘과 유대민족 모두를 하나님의 생명으로 초청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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