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장 16-26절
영과 진리의 예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의 핵심에는 성전이 있다. 성전이 유대교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상징으로서 자리잡아 가면서 이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미 앞에서도 잠간 살펴본바와 같이 분열왕국 이후 남북의 갈등은 성전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반란을 통해 정권을 잡은 여로보암은 혁명의 정통성을 세우고 다윗왕가를 부정하기 위해 벧엘과 단에 예배처소를 마련했다(왕상12:25-30). 반대로 다윗왕가는 정통성의 근간을 성전에 두었고 갈등은 본격화 되었다.
남왕조 중심으로 기록된 구약 역사서들은 북왕조 왕들을 모두 악한 왕으로 평가하는데, 이는 성전제사를 거부하고 벧엘과 단에 산당을 세운 여로보암의 죄를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이다(왕상15:34, 16:19, 왕하10:31, 북왕조 거의 모든 왕들에게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평가가 등장한다).
이렇게 시작된 갈등은 포로귀환 이후 성전 재건 사업에서 극대화된다. 스룹바벨 총독의 지휘아래 진행되던 성전재건 사업이 사마리아 사람들에 의해 방해를 받아 중단되었다(스4:1-24). 결국 중단되었던 성전재건사업은 우여곡절 끝에 다시 시작되어 성전 완공으로 이어졌지만 남북 왕조의 갈등은 골이 더 깊어졌다.
성전을 중심으로 한 남북 왕조의 갈등은 그들 각각의 신학적 배경에서 기인한다. 남북 왕조가 각각 다른 신학적 주안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생된 갈등인 것이다.
다윗언약(삼하7:10-16)은 남왕조 신학의 핵심이다. 다윗과 다윗성전은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징표이다. 성전은 인간의 창조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은혜의 통로이고 이 성전을 하나님께 드린 다윗 가문을 통해 하나님은 영원히 이스라엘을 통치하신다. 이것이 다윗언약 안에 머물러 있던 유다 백성들의 핵심적인 신앙고백이다.
혈통과 성전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인해 남왕조는 왕의 혈통에 계승될 수 있었고, 성전과 혈통이 무너진 북이스라엘을 핍박할 수 있는 정당한 근거를 확보할 수 있었다.
반면 북왕조에는 사사전통이 강하게 남아있었다. 사사전통은 시내산 언약에 더 강하게 밀착되어 있었기에 ‘산’이라는 모티브가 더 강하게 작용했다. 시내산에서 축복이 선포되었던 그리심산으로, 그리심산에 이어 여로보암이 세운 산당으로, 더 나아가 오므리가 사마리아로 천도하며 성을 건축한 사마리아산(왕상16:24)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움직이고 있다고 믿었다.
북왕조가 사사전통에 더 많이 기울어 있었기 때문에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를 이루고자 했다. 왕이나 성전을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를 통한 하나님의 임재를 구했고 이런 신학적 흐름은 필연적으로 왕권의 약화를 가져왔다. 북왕조가 여러 차례 왕권의 혈통교체를 겪은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남북왕조의 신학적 맥락 안에서 둘은 서로 다른 하나님 이해를 가지고 있었고 다른 방법과 도구들로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예배를 발전시켜왔다. 사마리아 여인이 ‘우리 조상은 이 산(아마도 그리심산을 의미하는 듯하다)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4:20)’ 라고 한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남북왕조 각각의 전통이 다른점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신학적 강조점이 다르고 사용하는 방법과 상징들이 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유하고 있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바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갈망하는 그들의 소망이었다.
남유다는 성전이라는 상징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다스림을 소망했다면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를 갈망하며 산이라는 상징물을 발전시켰다. 이렇게 서로 다른 신앙의 상징과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동일하게 하나님께 예배하기 원했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다스림을 간구했다.
예수께서는 남유다의 성전을 통해서도 아니고, 북이스라엘의 산에서도 아니고 영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해야 함을 말씀하셨다(4:21). 남과 북의 분열을 통합하면서 그 둘 모두를 넘어서는 진정한 예배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이 예배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선하신 창조의 본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 영과 진리는 예수를 표현하는,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언어이다. 사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하나의 실상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이 둘이 14장 이후로 가면 통합되어 나타나는데 그것이 ‘진리의 영’이다. 진리의 성령께서 오셔서 예수에 관하여 증언하며(15:26) 예수의 말씀들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14:26).
진리와 영은 예수의 정체성을 증언하며 그의 사역이 드러나는 방식이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일곱 가지 표적을 기본 골격으로 하여 예수의 ‘가르침’에 집중한다. 예수의 사역이 주로 그의 가르침을 통해 이루어지는 모양을 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다’라는 예수의 말씀(6:63)은 영, 그리고 진리가 예수의 사역을 드러내는 통로이고 방식임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란 메시아이신 예수(4:25-26) 안에서 경험되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북왕조의 방식도 아니고 남왕조의 방식도 아닌 하나님의 영광이 유일하게 드러난 예수 안에서 참된 예배가 가능하다.
하나님은 영이시고(4:24) 하나님께서는 그 영을 인간에게 부어주셨다(창2:7).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이 땅은 저주를 받았고 어둠이 찾아왔으며 하나님의 영은 인간을 떠나갔다(창6:3). 하나님께서는 망가진 창조세계를 회복시키며 마지막에 다시금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실 것이다(욜2:28). 이 소망 안에서 이스라엘 남북 왕조는 각기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방식을 넘어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통하여 자신의 영을 한량없이 부어 주신다(3:34).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 예수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인간의 창조 형상을 회복하게 되고 하나님의 진정한 임재 안에 머물게 된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예배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림이다.
예배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표지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남북왕조가 그랬듯이 예배는 갈등의 접전지가 된다. 보수와 진보가, 부와 빈이, 남과 여가, 노인과 젊은이가 예배 때문에 갈등하고 예배 안에서 갈등한다. 서로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고 주장하며 대립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는 모든 분열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능력이 있다. 예수 안에서, 그의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하는 영의 세례를 통해서, 십자가로 나아가는 예수의 진리의 길 안에서 모든 갈등과 반목이 치유되고 회복된다.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이 메시아 예수시다.
성경을 연구하다보면 도무지 풀리지 않는 구절들이 있다. 그럴땐... 그냥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 다음에 내가 좀 더 성경을 이해하는 깊이와 넓이가 넓어지면 알게 될거란 소망을 품고...
답글삭제본문에선 '구원이 유대인(복수)에게서 난다'는 구절이 도무지 해결 불가.
단수가 아닌 복수가 쓰였다. 그래서 더욱 힘들다.
요한복음에서 유대인은 주로 예수의 적대자로 등장하고 전체적인 이미지가 좋지 않다. 그런데 구원이 유대인(들)에게서 난다니...ㅉㅉ
고민하던 구절에 대한 의문이 조금 풀렸습니다.
답글삭제역시 힘들지만 원어에 집중 해야겠어요..
유대인 앞에 쓰인 전치사를 살펴보니 좀 알겠더군요..^^
풀이는 14강에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