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1학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해서 '신학공부'란 것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철없고 아는 것 없이 떠들던 시기였지만 제 인생의 방향이 송두리째 뒤집히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처음 신학을 접하면서, 내가 알던, 내가 경험했던 모든 것이 흔들렸습니다.
워낙에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런 변화를 감당할 내적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저는 다른 신학도들이 겪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내홍을 겪으며 20대 초중반을 보냈습니다.
'이전의 나'와 '새로운 내'가 끊임 없이 싸우며 갈등을 했지요. 물론 덕분에 많이 크긴 했습니다.
처음에 나에게 찾아왔던 도전은 '성경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였습니다.
성경 안에 있는 내부 모순들이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내부모순들 뿐만 아니라 역사나 과학과의 불일치도 성경을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데 한 몫을 했습니다.
이 질문은 끝도 없이 이어져, 성경을 믿을 수 없다면 영적 경험들을 어떻게 증명할 것이며
하나님이라는 실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예수라는 인물은 단순히 역사적 인물이고 기독교는 하나의 종교적 현상이 아닌가 하는 질문들로 이어졌습니다.
끝도 없는 논쟁과(밤 세워 논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내적 갈등, 그리고 고독감 때문에 꽤나 힘든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이후에 좋은 책들을 만나고, 좋은 신학자들을 알게 되고, 그러면서 차츰차츰 고민들이 해결되고 신앙의 참 의미들을 찾아가면서,
신앙인으로서의 참 자유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고민과 갈등을 덮어 두었을 때는 절대로 느끼질 못할 자유와 해방감, 그리고 평안함을 느끼게 된 것이죠.
아프고 고독한 시간들이었지만, 내게는 너무나 소중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의 '황금기'였던 셈입니다.
이러한 신앙적 갈등의 시간들이 내게 남겨준 위대한 선물 중 하나는 교회를 향한 관심과 사랑입니다.
개인적이고 이기적 신앙, 그 안에서 자신을 향한 열정을 좋은 신앙이라고 여겼던 내게 이런 갈등의 시간들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향한 눈을 열어주었습니다.
특별히, 교회를 사랑하는 것, 진심으로 교회를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고민하게 했습니다.
내가 고민했던 질문들, 내가 겪었던 어려움들이 나만의 것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고민을 가지고 있지만 대충 덮어 두고 살아갑니다. 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런 질문들은 꺼내지도 못하게 합니다.
'교회'라는 커다란 우상을 위해 개인의 삶과 고민과 신앙이 희생을 당하는 것이지요.
어쨌든 '교회성장'만이 유일한 성공이라고 믿었던 나에게 더 큰 하나님의 뜻이 있고 더 바른 길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이 그 고독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 고독의 시간들이 내게 교회를 향한 진지한 사랑의 문을 열어 준 셈입니다.
오늘도 나는 한국교회를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에 대한 기사들을 읽고 한국교회를 향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고민합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영광스럽게 하나님을 드러낼까를 고민하고, 망해가는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교회의 문제들을 비판하며 내 의견 제시하는 글들을 보며 그것이 과연 교회를 위한 길인지 생각해 보라고 충고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깜냥에는 그것이 교회를 위한, 교회를 사랑하는 길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읽어봐도 그렇게 하는 것이 성경에 나타난 신앙선배들이 했던 일입니다.
한국교회, 아직까지 겉모습은 화려합니다.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고 아직 그럴듯 하게 서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일까요? 몇 년이나 더 갈 수 있을까요? 너무 안타깝고 속이 상합니다.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은 갈수록 세상에서 배척을 받는데,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행사에 가면 언제나 자화자찬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라 하는 사람들은 세상과의 소통을 고사하고 교인들과의 소통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앉아 있는 자리가 신적인 영광을 가진양 큰 소리 칩니다.
전도서에 나오는 말씀처럼 언제나 '때'가 있는 법입니다. 웃을 때가 있고 울 때가 있는 것이지요.
지금은 울어야 할 때, 울어야 할 때, 울어야 할 때, 울어야 할 때가 아닐까요?
사랑하는 한국교회를 위하여, 사랑하는 목회자들을 위하여, 사랑하는, 너무나 연약한 양들을 위하여 울어야 할 때가 아닐까요?
거짓 평안을 전하는 거짓선지자들을 위해서도 울어야 할 때가 아닐까요?
지금은 우는 것이 사랑이지 싶습니다.
애가를 부르고 탄식하고 애통해해야 사랑이지 싶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애통하며 울었던 예레미야의 심령이,
예루살렘을 보며 눈물을 흘리셨던 예수님의 마음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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