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이번 글에서는 '지옥' 문제를 다뤄보겠습니다.
사실, 지옥 문제는 교계에서 워낙 민감한 문제라 좀 걱적이 됩니다.
'천국'이 여러분이 생각하던 그런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보다
'지옥'이 여러분의 생각과는 다른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위험합니다.
지옥에 대해 병적으로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현상이 잘 이해도 되지 않고, 매우 병적인 증상이라고 생각이 들지만 어쩌겠습니까,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상당히 오랜 동안 지옥이라는 공포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마음 깊은 곳엔 언제나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런 생각을 넣어준 사람들 다 용서했지만 참 나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지옥에 대한 공포를 먼저, 강하게 심어줬으니 말입니다.
저는 다음 세 가지 질문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써 보려고 합니다.
첫째, 지옥은 실재로 존재하는가?
둘째, 실재로 존재한다면 그곳은 어떤 곳일까?
셋째, 지옥이 실재하는 장소를 의미하지 않는다면, 성경에서 지옥에 관해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미리 말씀드리자면, 제 글은 세 번째 질문을 중점적으로 다루게 될겁니다.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이리 저리 둘러가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지옥' 이라는 말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지옥' 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성경은 지옥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사람들이 상상하는대로 지옥은 그렇게 무시무시한 곳일까요?
지옥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불입니다.
성경에서도 지옥은 많은 경우 불과 함께 등장을 합니다. '지옥불'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지옥은 불이 있는 곳일까요? 다른 많은 고통이 있을텐데, 왜 하필이면 불일까요?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그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신약성서에서 우리말로 '지옥' 이라고 번역된 헬라말은 '게헨나' 라고 읽습니다.
2012년 5월 29일 화요일
2012년 5월 28일 월요일
천국과 지옥, 예수의 뒤통수를 치다 - 3. 내세, 혹은 죽음 이후
지난 글에서는 천국이라는 용어가 사실은 실제 의미하는 바에서 벗어나 허상을 가리키는 언어가 되었음을 살폈습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들이 가는 천국 이라는 곳은 존재하지 않으며,
성경이 지속적으로 말하는 바는,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세상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 되는 것, 하나님의 왕권이 이 세상에 충만하게 되는 것이라는 점도 살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죽음 이후에 관해서는 뭐라고 말할까요?
우선, 지난 글이 좀 길어지는 관계로 생략했던
'내세' 라는 용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신약성서에서 '내세'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개역개정판 번역을 기준으로 세 번입니다.
(이것도 헬라어 성경을 자세히 찾아보지 않아 헬라어로는 몇번 나오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비슷한 빈도일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30절과 누가복음 18장 30절, 그리고 히브리서 6장 5절입니다.
그 중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병행본문으로서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으니,
엄밀히 말하면 내세 라는 말이 나오는 곳은 두 곳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본문을 표준새번역 성경으로 찾아보면, '내세'라는 단어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표준새번역에 '내세'라는 단어로 검색을 해 보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왜 표준새번역은 '내세'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일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개역성경에서 '내세'라고 번역된 헬라말은
'저 세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오는 세상'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은 '내세'라고 번역했던 세 곳 모두에서 '오는 세상' 혹은 '올 세상'이라고 번역을 고쳤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오는 세대'입니다.
내세에 관해서는 일단 이렇게 요약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내세'는 단 두 차례밖에 나오지 않는 매우 부수적인 개념이다.
또한, '내세'로 번역된 단어의 원래 의미는 '저 세상'이 아니라 '오는 세상(정확히는 '오는 세대')'이다."
그리고 죽은 사람들이 가는 천국 이라는 곳은 존재하지 않으며,
성경이 지속적으로 말하는 바는,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세상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 되는 것, 하나님의 왕권이 이 세상에 충만하게 되는 것이라는 점도 살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죽음 이후에 관해서는 뭐라고 말할까요?
우선, 지난 글이 좀 길어지는 관계로 생략했던
'내세' 라는 용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신약성서에서 '내세'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개역개정판 번역을 기준으로 세 번입니다.
(이것도 헬라어 성경을 자세히 찾아보지 않아 헬라어로는 몇번 나오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비슷한 빈도일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30절과 누가복음 18장 30절, 그리고 히브리서 6장 5절입니다.
그 중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병행본문으로서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으니,
엄밀히 말하면 내세 라는 말이 나오는 곳은 두 곳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본문을 표준새번역 성경으로 찾아보면, '내세'라는 단어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표준새번역에 '내세'라는 단어로 검색을 해 보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왜 표준새번역은 '내세'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일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개역성경에서 '내세'라고 번역된 헬라말은
'저 세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오는 세상'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은 '내세'라고 번역했던 세 곳 모두에서 '오는 세상' 혹은 '올 세상'이라고 번역을 고쳤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오는 세대'입니다.
내세에 관해서는 일단 이렇게 요약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내세'는 단 두 차례밖에 나오지 않는 매우 부수적인 개념이다.
또한, '내세'로 번역된 단어의 원래 의미는 '저 세상'이 아니라 '오는 세상(정확히는 '오는 세대')'이다."
2012년 5월 26일 토요일
천국과 지옥, 예수의 뒤통수를 치다 - 2. 하늘 나라의 허상
나는 지난 글에서 성경의 자기표현 언어로서의 상징에 관해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천국, 지옥 등은 이런 상징적 언어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이 어떻게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지, 특별히 이 글에서는 천국에 관한 문제에 집중해 보려고 한다.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당신이 예수를 믿고 죽으면 가는 그 어떤 곳인가?
확실한가?
성경은 천국에 관해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사실, 천국에 관한 문제는 이미 여러 책들과 학자들을 통해 보편적으로 알려진 부분이어서 특별히 새롭게 다루어야 할 내용이 없다.
그래도 한 번 더 설명해 보자.
하지만, 내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그 이후이다.
천국, 영어로 헤븐, 헬라어로 우라노이스 투 데우.
우리 말로 하면 '하늘 나라'이다.
도대체 정체가 뭐냐?
먼저, '천국' 이라는 단어를 성경 검색창에 넣어보라.
특이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될 것인데 이 단어가 포함된 성경 구절 37개 중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마태복음에 모여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디모데후서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천국, 지옥 등은 이런 상징적 언어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이 어떻게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지, 특별히 이 글에서는 천국에 관한 문제에 집중해 보려고 한다.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당신이 예수를 믿고 죽으면 가는 그 어떤 곳인가?
확실한가?
성경은 천국에 관해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사실, 천국에 관한 문제는 이미 여러 책들과 학자들을 통해 보편적으로 알려진 부분이어서 특별히 새롭게 다루어야 할 내용이 없다.
그래도 한 번 더 설명해 보자.
하지만, 내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그 이후이다.
천국, 영어로 헤븐, 헬라어로 우라노이스 투 데우.
우리 말로 하면 '하늘 나라'이다.
도대체 정체가 뭐냐?
먼저, '천국' 이라는 단어를 성경 검색창에 넣어보라.
특이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될 것인데 이 단어가 포함된 성경 구절 37개 중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마태복음에 모여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디모데후서이다.
2012년 5월 25일 금요일
천국과 지옥, 예수의 뒤통수를 치다 - 1. 성경의 상징에 대하여
"예수 믿고 천국 가세요",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가요"
우리가 흔히 듣는 말이다.
정말 그런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지금 철학적 논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정말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내 생각엔 이런 전통적 천국과 지옥에 관한 개념들은 성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 않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개념이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퇴색시킨다는 점이다.
이것이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이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을
잘 이해는 되지 않지만 하나님의 드라마틱한 사랑의 도구쯤으로만 여긴다.
그리고 부활에는 어떤 의미를 두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죽으면 예수님의 은혜로 이미 천국에 갈건데
굳이 부활의 의미를 찾을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는 것이다.
복음의 핵심인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천국과 지옥에 관한 개념부터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서 앞으로 여러 편으로 나눠서 쓰게 될 짧은 그들을 통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무가치하게 만들어 버리는 전통적 천국과 지옥 개념의 문제들을 다루어 보고
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되는지를 살펴 보려고 한다.
우리가 흔히 듣는 말이다.
정말 그런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지금 철학적 논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정말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내 생각엔 이런 전통적 천국과 지옥에 관한 개념들은 성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 않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개념이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퇴색시킨다는 점이다.
이것이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이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을
잘 이해는 되지 않지만 하나님의 드라마틱한 사랑의 도구쯤으로만 여긴다.
그리고 부활에는 어떤 의미를 두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죽으면 예수님의 은혜로 이미 천국에 갈건데
굳이 부활의 의미를 찾을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는 것이다.
복음의 핵심인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천국과 지옥에 관한 개념부터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서 앞으로 여러 편으로 나눠서 쓰게 될 짧은 그들을 통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무가치하게 만들어 버리는 전통적 천국과 지옥 개념의 문제들을 다루어 보고
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되는지를 살펴 보려고 한다.
2012년 5월 9일 수요일
불의한 청지기 비유(누가복음 16장) 해설
예수님의 비유 중에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 중 하나는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한 번 풀어볼까 합니다.
이 비유는 온통 난해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앞 뒤의 말들이 연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더욱이 이 비유에 이어지는 바리새인들에 관한 이야기는 더욱 앞뒤가 안 맞아 보입니다.
한 번 볼까요?
예수님은 비유를 마치고, 9절에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합니다. 왜 불의한 재물일까요? 주인의 것을 자기 마음대로 했기 때문에 불의하다고 하셨을까요?
그런데 11절에서는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않으면 누가 참된 것을 너희에게 맡기겠는냐' 하고 물으십니다.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비유에 나오는 청지기는 충성하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 13절은 정말 뜬금 없어 보입니다.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라 해 놓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선언으로 끝이 납니다.
이어지는 바리새인과의 대화는 더욱 가관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은 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었을까요?(14절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왜 사람에게 높임을 받는 문제를 거론하시고, 아무 연관이 없어보이는 율법과 선지자의 유효기한에 대해 말씀하셨을까요?(15-17절)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느닷없이 간음에 대한 이야기를 왜 꺼내셨을까요?(18절입니다)
비유 내용 자체로는 어렵지 않지만, 비유에 대한 해석과 사람들의 반응, 그리고 이어지는 예수님의 반응은 일관성을 찾기 어렵고 난해하기만 합니다.
이제, 풀이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이 비유를 한 번 풀어볼까 합니다.
이 비유는 온통 난해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앞 뒤의 말들이 연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더욱이 이 비유에 이어지는 바리새인들에 관한 이야기는 더욱 앞뒤가 안 맞아 보입니다.
한 번 볼까요?
예수님은 비유를 마치고, 9절에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합니다. 왜 불의한 재물일까요? 주인의 것을 자기 마음대로 했기 때문에 불의하다고 하셨을까요?
그런데 11절에서는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않으면 누가 참된 것을 너희에게 맡기겠는냐' 하고 물으십니다.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비유에 나오는 청지기는 충성하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 13절은 정말 뜬금 없어 보입니다.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라 해 놓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선언으로 끝이 납니다.
이어지는 바리새인과의 대화는 더욱 가관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은 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었을까요?(14절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왜 사람에게 높임을 받는 문제를 거론하시고, 아무 연관이 없어보이는 율법과 선지자의 유효기한에 대해 말씀하셨을까요?(15-17절)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느닷없이 간음에 대한 이야기를 왜 꺼내셨을까요?(18절입니다)
비유 내용 자체로는 어렵지 않지만, 비유에 대한 해석과 사람들의 반응, 그리고 이어지는 예수님의 반응은 일관성을 찾기 어렵고 난해하기만 합니다.
이제, 풀이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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