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젊은 사람들이 점점 줄어듭니다.
오른쪽 사진은 제가 전에 섬기던 교회 모습입니다. 노인은 넘쳐나는데 젊은 사람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40대도 너무 젊다고 교회 일을 안 맡깁니다.
현재 제가 섬기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이 점을 심각하게 생각하며 문제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참에 젊은 사람들이 교회를 멀리하게 되는 이유들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전문적 분석의 글은 아닙니다. 신학적 분석도 아닙니다.
그저, 제 자신이 아직 젊은 사람으로서, 교회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들을 중심으로 생각을 풀어볼까 합니다.
나는 불편하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젊은 사람들이 교회를 멀리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불편함'에 있습니다.
제 경험으로 비추어볼 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것에 진지한 관심을 갖게 되는 나이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교회에 열심인 사람들이 꽤 있지만, 외부적 조건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종교적인 것들, 자신의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되는 시기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부터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물론 사람마다 편차가 있겠지요.
그래서 20대, 30대 젊은 사람들은 40대 이상에 비해 상대적으로 종교적 관심이 적은 게 사실입니다.
종교가 자신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낮고, 성경이나 기도에 관한 관심도 적습니다. 아직 스스로의 힘이 많이 남아고 관심 갖아야 할 것들이 많은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종교적인 것에 아예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은 교회에 나오면서 내적 갈등이 많습니다.
신앙적 관심은 있지만, 그것이 삶을 통제할만큼 큰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20-30 세대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교회가 나에게 얼마나 편안한가 하는 것이 교회선택의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불편한 교회는 피하고, 편한 곳을 찾아갑니다. 편한 곳을 찾지 못하면 아예 교회를 포기하는 사람도 꽤 있습니다. 스스로는 기독교 신앙인이라 생각하지만 교회는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성교회는 그들을 향해, '교회도 안 나오는데 네가 무슨 신앙인이냐' 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그렇게 말하는 교회를 더 불편해 합니다. 악순환에 빠지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의 특징을 말하다 보니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꼭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그러면 잘 가르쳐서 교회에 정착하게 해야지...
물론 그 말도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 만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좋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젊은 사람들을 잘 가르쳐서 기존 체제에 적응하게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사실은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사회나 교회의 핵심 세력으로 정착하게 되는 것이지 그들에게 구 시대를 강요한다고 될 일은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의 문화와 정서에 맞는 흐름을 만들어 낼 것이고, 그들 뒤에 일어나는 젊은 세대와 또 다시 대립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면, 젊은 사람들을 기존 구체제에 적응시키려 합니다. 현재 체제도 한때는 젊은이였던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시스템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젊은 사람들이 교회를 선택하는 가장 핵심적 화두는 '불편함'입니다. 불편하면 피합니다. 그것이 핵심입니다.
비단 교회뿐만이 아닙니다. 정말 죽을만큼 급한 일이 아니라면 옆의 그림처럼 생긴 편의점에 들어갈 젊은 사람은 없습니다.
수십년을 한결같이 단골로 다닌 노인이라면 상황은 다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렇다고 젊은 사람들이 모든 불편함을 싫어하고 피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불편함이 만족감보다 커지면 피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얻게되는 영적, 정신적, 육체적 만족감보다 불편함이 커지면 그 교회에 대한 매력을 잃어버리고 교회를 떠납니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느끼는 만족감이 노년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에 불편함을 더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불편함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몸이 불편한 것입니다. 주차할 장소가 없고, 아이들 데리고 가서 쉴 곳이 없고, 아이들 맡길 곳이 없으면 불편합니다.
이것을 잘 알기 때문에 교회들마다 편의시설 만드느라 분주합니다.
물론 이런 불편함도 상당합니다. 하지만 젊은 사람들이 더 큰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다른데 있습니다.
바로 마음이 불편한 것입니다.
(몸이 불편한 문제도 다음에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콩사탕이 싫어요
마음이 불편하면 몸이 불편한 것보다 수십배는 괴롭습니다. 그래서 몸이 불편한 건 좀 참아도 마음이 불편한 것은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 사실 몸이 편한 구조가 아닌 곳이 꽤 많습니다. 그래도 그 교회에 젊은 사람이 모이는 것은 마음을 편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반면, 아무리 교회 편의시설 잘 해놔도 젊은 사람의 발길이 끊긴 곳이 많습니다. 몸은 편해도 마음이 불편하면 그 공동체를 향한 정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요즘 시대에 젊은 사람의 마음을 가장 불편하게 하는 것 1순위는 바로 '권위적 소통구조'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말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말 할 수 있는 공간을 원합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해당되지만, 특별히 젊은 사람들에게는 더합니다.
요즘 SNS(Social Network Service)가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곳이 자기 생각을 말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주고 그 권리를 보장해 주기 때문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능동적 주체가 되기를 원하는데,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교회에서 젊은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통로가 차단되어 있습니다. 교회에서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막혀 있습니다.
위 아래로 소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권위적 소통구조 때문입니다.
권위적 소통구조의 상대 개념은 열린 소통구조입니다. 권위적 소통이 수직관계라면 열린 소통은 수평적 관계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수직적 소통을 싫어하는 이유는 권위 자체를 무시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권위가 행사되는 방식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가 표현되는 방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국가를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군부 독재시절을 겪어온 사람들에게 국가는 충성의 대상입니다. 대통령은 국가의 아버지이고 마땅히 존중 받아야 할 권위의 상징입니다. 그들에게는 국가의 성공이 곧 자신의 성공이고 국가의 번영이 자신의 번영이라는 수동적 사명감이 있습니다.
이 시기를 겪어온 사람들에게 옆에 있는 사진은 그저 익숙한, 때로는 향수를 불러오는 사진일 뿐입니다.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시민세력으로 등장한 젊은이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들은 국가를 충성의 대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국가와 거래하고 교섭하면서 자기에게 유리한 제도를 만들어가는 주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대통령은 국가의 아버지가 아니라 정치인입니다. 자신의 입장을 대변해주고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선출한 정치인인 것이지요.
선생님이나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합리적 관계가 잘 유지되고 있어야 권위가 인정되는 것입니다. 위의 사진과 같은 폭력적인 교사,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모르는 목사에게는 권위를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사고가 모든 권위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권위를 인정합니다. 존중할 사람을 존중하고 존경할 사람을 존경합니다. 권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권위가 실행되는 방식을 중요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방식으로 권위를 행사하려고 하면, 그 권위 자체도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권위와 관련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 권위를 가진 사람과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기 바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자신들의 이야기가 맞다면 그것을 반영해 주길 바라는 것이고, 틀렸다면 왜 틀렸는지, 왜 그렇게 할 수 없는지 합당한 이유로 설명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과정이 잘 진행 될 때, 비로소 권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말할 수 있는 구조를 원합니다. 자신들의 모든 의견이 수용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말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고, 그것이 옳든 그르든 합리적 판단 과정을 통해 설득하고 또 설득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합의가 이루어질 때, 그 합의의 결과로 도출된 메시지, 규칙, 혹은 사명에 권위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이런 합의를 능동적으로 이루어가는 사람에게도 권위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런 합리적 판단 과정이 사라지고 누군가에 의해, 혹은 무엇인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메시지나 사명에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나 조직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비합리적인 일들이 반복되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뭅니다. 소통이 사라지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교회가 매주 교인들에게 콩사탕을 나눠준다고 생각해 봅시다.
교인은 네 부류로 나뉘게 됩니다.
첫째, 콩도 좋아하고 사탕도 좋아해서 콩사탕 나눠주는 것에 적극 찬성인 사람들입니다.
둘째, 콩은 좋아하지만 사탕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사탕은 맘에 안 들지만 콩이 몸에 좋으니 그냥 받아들입니다.
셋째, 사탕은 좋아하지만 콩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콩이 몸에 좋아도 맛이 없어서 싫어하지만, 그래도 사탕이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넷째, 콩도 사탕도 다 싫어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입니다.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들이겠지요.
콩은 유익하지만 재미가 없는 것을, 사탕은 재미는 있지만 별로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교회에서 진행되는 프로그램이나 표방하고 있는 사명들은 이런 콩사탕과 같은 면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콩사탕을 마땅치 않게 여기던 두 번째나 세 번째 부류의 한 교인이 콩사탕 나눠주는 것에 반론을 제기합니다(당연히 네 번째 교인들이 거들겠지요). 사탕이 몸에 좋지도 않은데, 콩 사탕 그만 나눠주자고 제안합니다(혹은 반대로 맛 없는 콩은 그만 먹자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누군가는 콩의 유익함을 생각할 것이고, 자연스럽게 콩사탕의 유익이 많은가 해가 많은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토론과 설득의 과정을 거쳐, 콩사탕을 계속 나눠 줄 것인지, 그만 나눠 줄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으로 바꿀 것인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 결정에는 권위가 따라오게 됩니다. 이것이 열린 소통구조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콩사탕에 관해 반론을 제기 했을 때,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이 이 의견을 무시하거나 묵살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콩사탕을 나눠주는 것은 우리 교회가 설립될 때부터 내려온 전통이다.'
'콩사탕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데 왜 그러냐?'
'콩사탕을 나눠주는 것이 우리 교회의 사명이다.'
'불평하지 말고 콩사탕 나눠주는 거나 거들어라.'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이 되돌아오면,
사람들은, 특별히 젊은 사람들은 무의식 중에 그 공동체와 지도자를 권위적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권위적 소통구조에서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옆에 있는 사진의 아이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면 이런 비슷한 문제에 관해서 입을 다뭅니다. 그것이 맘에 들거나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말 할 이유를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불편함이 지속되면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콩사탕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콩사탕과 관련된 일련의 의사소통 과정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거부하는 것은 권위가 아니라 그 권위가 일방적으로 실행되는 과정입니다.
진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가 전달되는 권위적 방식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군부 독재시절, 많은 사람들이 국가의 권위적 소통방식을 거부하며 이민길에 올랐습니다. 나라를 버리고 떠난 것입니다. 하지만 국가의 지도자와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나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 나라를 떠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소통이 되지 않는 권위 아래서 젊은 사람들은 그저 그 권위 체계가 빨리 지나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선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물론 선거에 참여하는 젊은 사람들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닙니다만 그것은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사정은 많이 다릅니다. 얼마든지 쉽게 떠날 수 있습니다.
물론, 연세가 드신 분들은 자신이 수십년간 섬겨온 교회를 떠나는 것이 쉽지 않겠지요. 그래서 좀 불편하고 마음에 들지 않아도 꾹 참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은 교회 조직을 향한 충성도가 낮습니다. 그만큼 쉽게 교회를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위적 소통구조에서 불편함을 느끼면 쉽게 교회를 떠납니다. 다른 교회를 가거나, 다른 종교를 선택하거나, 아니면 교회를 다니지 않는 크리스천이 되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떠나며 마지막으로 권위적 구조에 갇혀 하지 못했던 한 마디를 남깁니다.
"나는 콩사탕이 싫어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답글삭제부드럽고 차분한 문체의 글이라 잘 읽혀지고, 공감되는 부분도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글의 방향에 있어서 종교적 관심이 30대 후반부터라고 전제한 뒤 논지가 전개되고 있음을 볼 때, 그 전제에 공감하기가 어렵습니다.
평생을 교회에 몸담고 살아온 사람으로서 제 생각에는 오히려 신앙적 도전과 관심은 20-30대에 훨씬 더 치열하며, 그 시기에 충분한 신앙적 다루어짐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그 이후 30대 후반이 되어서도 여전한 갈증은 있지만, 교회에 정착하고, 교회 공동체에 관계적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 이상의 진정한 신앙적 변화는 없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또한 글의 전체적 흐름을 볼 때, 글을 쓰신 분께서는 아마도 단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현상에 대한 생각을 쓰신 것 같습니다.
교회의 편안함을 제공한다고 해서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보는 것은 교회의 본질과 작금의 교회 실태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 다소 피상적이고, 현상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추신 것은 아닌가 합니다.
실제로 교회의 편의시설에 투자하는 것이 소위 앞서 간다는 교회들의 현실이기는 합니다만, 그리고 그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에 대한 조금 더 본질적인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의 댓글에 혹시 언짢으셨다면 용서하시구요.
바른 교회, 건강한 교회를 함께 고민해보자는 뜻으로 몇 자 올려 봅니다.
네.. 감사합니다.
답글삭제생각해 보니 20대, 30대, 40대 뭐 이런 구분이 잘못 되었을 수도 있겠네요.
호세아님께서 지적하신 부분도 맞는 것 같습니다.
단지 제 경험상, 일반적으로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순수하게 종교적인 것들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는 시기가 30대 후반, 혹은 40대부터라고 보였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제 개인적 관찰과 경험입니다.
호세아님의 관찰이, 혹시 너무 교회 안에서만 종교를 이해하고, 또 종교적 열심을 가진 주류인들을 중심으로 생각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조금 드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쭙니다.^^ 물론 논쟁이나 싸움 거는 것 아닙니다.
최근 기독교 인구는 줄고 있지만, 카톨릭은 급성장하고, 불교는 정체이지만 40대 신도수가 많이 늘었다고 합니다. 이런 통계도 제 관찰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대로 젊은이들(20-30대를 의미합니다^^)이 교회를 떠나는 현상에 관해 쓴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이유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사회현상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기 때문에 더 치밀한 분석이 요구될 것 같습니다.
제 글은 이런 전문적인 분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쉽게 접하게 되는 이유, 그리고 어렵지 않게 개선할 수 있는 이유들을 찾아보려는 것입니다. 치밀한 분석은 깜냥이 되지 못합니다.^^
좋은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니 더욱 감사하네요^^
아... 참고로
답글삭제한국 사회에서 교회의 위치에 대한 분석,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가는 핵심적 요인에 대한 분석은
김진호의 '시민 K, 교회를 떠나다' 에서 잘 이루어졌습니다.
네, 댓글 잘 읽어보았습니다.
답글삭제박성장님의 지적대로, 제가 종교적 열정을 가진 주류인들 중심으로 생각했을 수 있다는 말씀에 공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만 저의 논지는 교회의 본질이 그저 사람들을 많이 머물게 하는 것에 있는가? 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저 와서 편안한 분위기에서 좋은 말씀 듣고, 불편하지 않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려 피상적인 공동체성을 누리고 가는 것이 교회의 본질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현상에 대해 좀 더 본질적인 고민과 접근도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저에게도 다시 한버 생각하게 되는 기회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답글삭제저도 더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겠습니다.
교회 밖에도 구원은 존재 합니다.
답글삭제그러나 그리스도 밖은 아닙니다.
마틴 루터의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랑을 만나지 못해서
주님의 피와 살을 먹는 것이 무엇인지
자기를 부인하고, 생명을 부인하고, 가족을 부인하고
자신의 전부를 드리기 위해 살아가지 않는 명목상의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부라고
고려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지역교회의 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지근한 물
맛을 잃은 소금
명목상의 신자
크리스천 입니까?
정말 주님의 참된 제자들은 희생과 불편함을 감수 합니다.
그러나 모든 지역교회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빵집에 빵이 없으면 하등 갈 이유가 없듯이
지역교회에 주님과 형제 사랑이 없다면,
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네.. 구원에 관한 말씀은 공감합니다.
답글삭제하지만
그래도 저는 교회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도, 그 문제 많던 교회, 어린 아이들만 가득한 고린도교회를 향해 뜨거운 사랑을 보여줬습니다.
부족해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격려해줬습니다.
지역교회, 부족해도 사랑하고 품는 것이 제 사명이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