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공보 논설위원인 정릉교회 박은호목사의 칼럼에서 박은호목사께서 인용한 부분을 재인용해 봅니다.
"개신교가 '로마천주교회의 교황무오설'을 비성경적이라고 비판하지만 로마천주교회는 교황 한 사람에게만 무오설을 적용할 뿐 모든 사제들이, 모든 본당신부들이 언제나 옳다고 강변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신교회는 사실상 개교회마다, 개교회의 목회자들이 제각기 자신의 무오설을 주장하고 있다" (기독공보 3월12일 칼럼에서 재인용)
개신교가 사회 정치적 권력과 결탁해 교회성장을 이룩해 오면서 교회는 또 다른 하나의 큰 사회적 권력이 되었습니다. 큰 교회에는 정치인들까지 찾아와서 고개를 숙이고 갑니다. 얼마 전 청와대 조찬기도회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무릎을 꿇은 것이 정치가 종교에 굴복한 것 아니냐는 논쟁으로 비화될 정도로 종교는 막대한 권력이 되었습니다(사람들 눈에 개신교가 권력으로 느껴지지 않았다면 이런 논쟁은 아마도 없었을 것입니다).
종교가 권력이 되면 당연히 종교의 대표성을 띄고 있는 종교지도자, (개신교에서는) 목사가 권력의 핵심인물이 됩니다. 특별히 성도를 많이 거느리고 있는 교회에서는 더욱 그렇지요. 물론 개중에는 겸손하게 사명을 잘 감당하시는 분들도 많이 있지만 큰 교회 목사라는 것 자체가 권력이 되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최근, '목사가 성직이냐?' 라는 내용의 발언이 개혁을 외치는 무리에서 자주 들려옵니다. 저도 종종 이 논쟁에 참여하기도 하구요. 그런데 이 논쟁에서 저는 늘 외롭습니다. 대부분의 개혁적 인사들과 달리 저는 목사가 여전히 성직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성직이 아니다. 기능적 차이일 뿐이다. 목사는 성직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기득권과 특권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개혁을 외치는 분들의 한결같은 목소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는 성직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룩한 일을 위한 부르심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이 영적 지도자로서의 삶을 가능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저의 한결같은 반론입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분들의 이야기와 저의 이야기가 다르지 않음을 곧 알게 됩니다. 모두 목사라는 직책이 특권이나 이익을 위한 자리가 아니고 섬김과 책임으로서의 자리임을 강조하는 말들이지요. 결국 같은 뜻, 같은 의도입니다.
하지만 제가 끝까지 목사를 성직자라고 생각하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목사가 성직자로서의 정체성,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이라는 정체성을 내버리고 단지 교회 안에 하나의 기능(설교, 행정, 혹은 교육 등)을 감당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이해할 경우 목사의 권력이라는 당장의 문제는 해결될지 몰라도 더 큰 부작용이 생겨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타자성을 거부한 자유주의신학이 믿음의 능력을 상실한 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습니다(물론 하나님과 목사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단지 패턴이 비슷하다는 말입니다. 말꼬리 잡기는 사절입니다. ^^)
현 시점에서 한국 개신교 목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특권이나 권력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 종의 모습으로 낮아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목사는 더 이상 성직자가 아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신을 부르셨다는 성직 정체성입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분명한 정체성 때문에 목숨을 걸고 말씀을 외쳤던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들은 자신의 특권을 주장하거나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들의 소명에 대한 특수성을 거부한 것은 아닙니다.
'와여히 드바르 엘로힘(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 예언자들의 선포 맨 앞에 빈번히 등장하는 공식 문구입니다.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선포 앞에 '하나님의 말씀' 이라는 분명한 선언을 달았습니다. 조금 교만해 보이지요. 심하게 말해 건방집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이런 선포를 가능하게 해 준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분명한 정체성입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성직자로 여기진 않았겠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확신했고, 그 확신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걸 수 있었습니다.
목사나 교인이나 똑같 것이라는 말들이 많이 들립니다. 교인들은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하지만 목사는 그렇게 생각해선 안 된다는 것이 저의 소견입니다. 목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특별한 메신저로 부르셨다는 예언자적 정체성, 조금 다른 표현으로 성직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이 듭니다.
목사는 달라야 합니다. 더 높아서 다른 것이 아니라, 더 우수해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특수한 부르심의 소명의식 안에서 특별해야 합니다. 말씀을 맡았다는 소명의식과 이 말씀에 내 생명을 걸었다는 사명의식이 있어야 목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 앞에서 더 진지해야 하고, 두려움을 가져야 하겠지요. 아는 척, 잘난 척 건방을 떨어선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목사를 향해 원하는 것은 교인들과 똑같아지라는 것이 아닐겁니다. 단지 특권을 내려놓고 평등해지라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목사가 더 목사다워지라고, 종교인이라면 더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라고, 인생길의 지도자로서 더 큰 역량을 갖추라고, 더 성직자 다워지라고 요구하는 것일겁니다. 목사는 성직자가 아니다라고 하는 말보다 성직자가 무엇인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이 더 현명한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사람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막 10:42~45)."
글쎄요... 목사가 특권을 내려놓는 것보다는 일반 성도가 성직이 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닐지... 저는 목사가 특권을 내려놓는다고 성도들이 그것을 받아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늘 목사 망치는 것은 성도라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런 성도 만드는 것도 목사지만요...) 그렇기때문에 저는 목사가 성직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기존 교회의 시스템 속에서 안주하는 말뿐인 개혁파를 싫어합니다. 모든 성도가 성직이 되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 목사가 성직이 아니고 모두가 그만큼 자기 삶에 대한 헌신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려면 목사 중심의 시스템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짧은 글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결론적으로 부르심에 대한 사명은 목사만 가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답글삭제하하.. 언제나 비판을 해 주는 전도사님이 있어 안심입니다. ^^
답글삭제저도 같이 함 해 보죠^^ㅋㅋ
1. 일반성도는 성직이 아닙니다. 물론 큰 의미에서는 모든 사람이 성직, 거룩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목사가 성직자인가?' 라는 질문에서 사용하는 성직이라는 의미는 이런 큰 의미에서가 아니라 종교계에 종사하는 특별한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는 구체적 의미에서 사용된 말입니다. 그러니 일반성도는 성직이 아닙니다.
그리고 일반성도는 성직이 될 필요도 없습니다. 위와 마찬가지로 큰 의미에서 성도는 누구나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거룩한 삶을 특별한 의미로 묶을 필요가 있을까요? 하나님을 신앙하고 부활을 소망하며 현재의 삶을 책임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면 충분합니다.
2. 성도는 목사를 망치지 않습니다. 목사가 성도를 망치고 스스로를 망칠 뿐입니다. 예수께서 종교지도자들을 비판하셨지요. 하지만 그들을 그렇게 만든 대중을 책망하진 않았습니다. 어그러진 한국교회의 모든 책임은 목사들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일들을 바로잡아 가는 것은 성도들의 몫이 될 겁니다.
3. 저도 말뿐인 개혁파 정말 싫습니다. 그들에게선 자신을 개혁할 의지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시스템을 벗어난 사람들이 좋아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들에겐 한국교회를 향한 진정성있는 책임감이 보이지 않습니다. 외부에선 누구나 바른 소리 할 수 있습니다.
4. 10명만 모여도 그 조직은 중심이 필요합니다. 목사중심의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면 다른 중심에 대한 분명한 대안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 인간적, 사회적 중심 말입니다. 성경이니 말씀이니 하는 추상적 중심은 사절입니다.^^ 무조건적 해체를 말하던 포스트모던의 영향력이 사그러들고 있듯이 교회의 개혁 방향도 새로워져야 합니다.
저는 내부에 머물기를 택했고,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희망 걸기를 택했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개혁하기 위해 노력중이고, 제가 선택한 개혁방법은 성직자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갖는 것입니다. ^^
이상입니다.
ㅎㅎㅎ 블로그는 댓글을 달아야 제맛이죠.
답글삭제1. 목사로써의 부름과 성도로써 혹은 일반직장인으로써의 부름이 구분된다는 것이 목회자가 갖는 잘못된 자의식이 아닐까요? 성도가 '성직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일상의 일이 성직자가 하는 일의 가치와 구별될 이유도 없습니다. 그 차이를 '질'의 차이로 만들지 않는 이상 결국 둘 사이의 차이는 '기능'만 남게 됩니다. 그래서 목사는 성직이 아니라 하는 것이지요.
2. 예수님도 회중이 자신을 왕 삼으려 하시는 것을 아시고 피하셨습니다. 누가 먼저라는 문제가 있을지 몰라도 오늘날 목사의 자의식 형성에 성도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3. 시스템 밖이 아니라 그 시스템 안에서 틀을 바꾸는 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밖에서야 늘 바른 소리를 하지요. 하지만 안에서는 유지해야 하는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안에 있으면서 깨지 않으면 소용이 없지요. 다만 어디서부터 개혁이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4. 꼭 중심이 하나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이에게 중심을 주어야 할 필요까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집단 지성'을 말하는 시대에 다양함이 분열이 아닌 방식으로 공존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누구 덕에 저 역시 교회를 버리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ㅋㅋ 하지만 제가 선택하는 개혁 방법은 제가 먼저 성직자의 정체성을 내려 놓고 특별한 기능을 성도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직자가 아니라고 교회가 위임한 기능에 불충실해도 된다거나 모든 성도가 성직자처럼 살아야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저도 한 번 더 댓글을 달아보겠습니다. 자려고 했는데...^^
답글삭제우선, 전도사님과 저의 생각이 아주 작고 사소한 차이일 뿐이라는 생각 먼저 전합니다.
1. 동일한 가치를 지녔다고 동일한 부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직자로서의 부름은 우월한 가치인준이 아니라 특수한 역할인정입니다. 이는 단지 기능의 차이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현실적 문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말로는 뭐든 안 되겠습니까?^^
2. 스스로 피해야 하겠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군중을 향해 책임을 묻지 않았습니다.
3. 공감입니다. 다만, 다 깨트린다고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4. 지성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는 것도 우상이지 싶습니다. 종교집단 안에 다양함이 공존할 수 있을지는 현실적 의문이 듭니다.^^ 제가 너무 부정적인가요?
저는 제가 목사 된 것, 그리고 목사의 직무를 행하는 것이 교회의 위임 이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믿습니다. 이 것이 제가 가진 예언자적 정체성으로서의 목사직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힘입니다.
교회의 위임이 우선이라면 저는 교회의 필요에 따라 움직여야 하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만 살아야 합니다.
결국 교회가 우상이 되겠지요. 저는 교회를 많이 사랑합니다만 교회가 우상이 되어선 안 된다고 믿습니다.^^
오는 토요일 오후 3시쯤에 윤택이랑 은혜 온다는데, 시간 되면 놀러와요.^^
다른 부분들은 목사님 말씀대로 사소한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가지, 교회에 대한 인식은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저는 목회자란 교회를 위해 위임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우상이 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가 곧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부분도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떤 것이 교회의 필요인가를 가려내는 문제가 있겠으나 교회의 필요를 제외하고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것도 아이러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름만 들어서는 누군지 잘 기억이...ㅋㅋ 토요일 오전엔 안된다고 하셔서... 저녁에 가야 하는거죠?
답글삭제어떤 의미인지 충분히 공감합니다. 말씀하신대로 교회를 위한 위임, 그리스도의 몸, 생각해야 합니다.
답글삭제제 말의 의도는 무엇에 조금 더 무게를 두느냐, 무엇이 먼저 고려되어야 하는가입니다.^^
오윤택, 고은혜... 기억이 안 나나요?^^
3-4시쯤 오면 좋죠.. 저녁 전엔 와야 밥 먹습니다.^^
세상의 많은 일들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에따라 각자의할일이 있지요 동화에도 나오듯 눈이 입이 되고 싶다고 귀가 코가되고싶다고 우길 수 없듯이 하나님이 주신 목사의 직분은 엄숙한 성직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그러한 각오를 갖은분만 아니, 사명과 견뎌낼 끈기와 훈련이 되신 분만 목사님이 되셔야 한다고 외치고 싶습니다. 성도가 잘못하면 몇날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죄송해서 더잘하려고 안간힘 쓰곤하여 흙탕물을 가라앉히려 겸손해 지지만 성직을 받으신 목사님들에 의한 파장은 너무나 크기때문에 결코 가볍게 생각할 사명이 아닌것이라 생각됩니다 작은 생각도 섬세해야하고 작은일도 두세번 기도 후 실행되야 할것같아서요 성도들도 각자 맡은 세상일 속에서 많은 노력과 신중한 거룩함 닮기위해 늘 기도할께요 너무 심각해서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 니자가 안없어지네요 안녕히 주무세요...니
답글삭제네.. 맞습니다. 여러가지 제도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개혁하기 위한 의지가 없다면 무용지물일 뿐이지요.
답글삭제모두가 거룩한 삶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겁니다.
목사가 그렇게 유명인사가 되지 않으면 파장이 그렇게 크지도 않을텐데 너무 유명해지셔서 그러네요...^^
목사가 성직이 아닌것은 만인 제사장설과 그맥을 같이한다고 생각합니다.
답글삭제Roman Collar..예수님의 동정 순결을 뜻하는거에요....
답글삭제그리고 자기가 믿는 사람의 대상...구교에서는 하느님...이고 하느님을 대신하여 인간의 삶으로 사시는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사는 사람을 성직자라 하죠..
목사는...결혼하고 애 낳고..교회가 기업도 아니고...헌금걷어서 XXXX 다들 아시리라..
목사는 성직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카톨릭의 형식을 반대해서 나온것이 신교입니다... 그런 신교에서 왜 로만칼라 형식을 지금와서 하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되네요...동정도 아니면서...
걍 하던대로 하세요~~
그리고 신교신자들....하나님...서수에 존칭 붙히는건 국어 문법에 어긋남...
답글삭제정말 너무 무식하네요~~
2014년 7월 20일 댓글 다신 익명님...
답글삭제가톨릭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계시네요.
전 개신교인으로서 개신교의 치부를 드러내고 고쳐 가는 것이 옳다고 여기기에 늘 개신교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가톨릭을 비판하지 않는 것은 가톨릭이 잘해서가 아니라 제가 외부인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기론 가톨릭이 개신교를 비난할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가려져 있을 뿐이지 수 많은 문제들이 가톨릭 내부에 있음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사는 건 성직자가 아니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지요.
근데,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을 말하며 첫 번째로 언급하는 부분이 고작 성적인 동정이라니, 좀 안타깝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 결혼 안 하고 살았던 것도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호칭 문제로 무식 논하는 건 님을 더 무식하게 보이도록 만듭니다.
하느님이 더 본래적 호칭인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란 표현은 '하나'라는 수에 님을 붙여서 생겨난 호칭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단어에 발음의 변화가 생겨 발생한 호칭입니다.
설령 하나님의 '하나'가 숫자라 하더라도, 이미 하나님이란 단어는 대다수 사람들이 사용하는 일반명사로 굳어진 표현입니다. 우리 말에는 이런 용례들이 많이 있지요. 그걸 가지고 무식하다고 말하는 건 님의 무지를 표현하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카톨릭이 아니라 가톨릭이 국어 문법에 맞는 표현입니다.
그니까 글쓴분은 만민사제주의를 부정하는건가요? 유병언도 이만희도 안상홍도 모두가 성직자군요
답글삭제우연히 지나가다가 글을 읽게 되어서 답변합니다.
답글삭제위의 익명이라는 분은 로마 가톨릭(천주교) 신자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박성장님 말씀처럼 가톨릭이 표준어입니다. 정확히는 로마 가톨릭이죠. 우리나라 용어로 가톨릭이구요. 카톨릭, 캐도릭 같은 용어는 과거에 쓰이던 용어죠. 하느님, 하나님의 용어도 박성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북한에서 하느님을 하나님으로 사투리를 썼다는 것과 로마 카톨릭(천주교)과 차별성을 두기 위해 하나님이라고 표현했다는 것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 또는 로마 가톨릭 내에 수 많은 문제가 있고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요? 정확히 어떤 어떤 문제들이 있는지 천주교 신자로서 궁금해서 여쭤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다 결혼 안하고 살았던 것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을 따랐던 사도들은 모두 결혼을 했어도 예수님을 따른 이후로는 독신생활을 했습니다. 사도들을 제외한 예수님을 따르던 일반적인 사람들이 결혼을 한거죠. 예수님의 '예언직, 왕직, 사제직' 중에서 사제직을 대신하는 성스러운 일을 하는 로마 가톨릭 사제와 개신교의 목사님들하고는 상황이 다르다고 여겨집니다. 누가 더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고 있을까요? 또한 전 개신교에 궁금한 것 중에서 십계명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분류한 십계명을 따르는데, 개신교는 왜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유다인 필론이 분류한 십계명을 따르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어느 십계명이 옳고 그른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성경에 십계명을 따로 구분지어 번호를 매기지는 않았으니까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개신교는 예수님을 믿고 있으면서 예수님을 부정하는 유다인의 십계명을 따르는지 궁금합니다. 좋은 답변과 가르침 주시길 바랍니다. 전 '홍 예로니모'입니다. 프로필 쓰면 쪽지 같은거 날아오고 하는게 귀찮아서 익명으로 하겠습니다. 이점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제가 블로그에 자주 들어오지 않아 답글이 늦었습니다. 이 글을 보시게 될지 어떨지도 잘 모르겠네요.
삭제가톨릭 안에도 많은 문제들이 있지요. 아마도 내부에서 보다 외부에서 듣게 되는 얘기들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제의 결혼 문제가 나왔으니, 하나의 예를 들자면 성당 신부님들의 성적인 문제는 사실 공공연한 비밀 아닐까 싶네요. 제법 많은 신부님들이 여신도와 성적 관계를 맺고, 때때로 임신도 하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임신까지 가는 경우가 많진 않지만 그 문제 때문에 성공회로 옮기신 분 얘기도 종종 들었습니다.
제자들의 결혼 문제에 관해서도 바울 서신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 부활 이후에도 아내와 함께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제의 비결혼이라는 관념에 잡혀 이런 부분을 보지 못하셨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십계명 관련된 부분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입니다. 누가 분류했건 그런 전혀 중요하지 않죠. 그저 성서 텍스트를 얼마나 정직하게 보고 이해하느냐가 중요해 보입니다. 얼마나 고정관념없이 보고 따르느냐가 핵심이겠ㅈ.
솔직히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삶을 들여다보면, 사제같은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가톨릭 신부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개신교 목사 같지도 않습니다.
가톨릭 사제가 더 예수님을 따라 사느냐, 개신교 목사가 더 예수님을 따라사느냐 하는 잣대가 참으로 어리석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누가 이웃을 더 사랑하느냐, 누가 진실함으로 평화를 위해 일하느냐가 중요하겠지요. 그게 사제든 목사든 그저 무명의 성도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