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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23일 토요일

(연재) 십자가의 의미- 01. 태초에 언약이 있었다


교회에 몇 번이라도 기웃거려본 사람은 다 알듯이 성경은 '창세기'라는 책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그 처음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온 세계를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 이름도 '창세기'입니다. 하지만 창세기를 조금만 더 읽어보면, 창세기의 핵심 내용은 '창조'가 아니라 그 이후에 벌어지는 사건들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창세기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족장들의 이야기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창세기가 아니라 '족장기'라고 불리는 것이 더 정확해 보입니다.

어쨌든, 창세기에는 창조 이야기에 이어 본격적으로 '족장기'가 시작되기 이전까지, 학자들이 '원역사'라고 부르는 내용들이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 그리고 뱀에 관한 이야기, 가인과 아벨 이야기, 노아와 홍수 이야기, 바벨탑 이야기 등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창세기 11장까지 이어집니다. 이 이야기들을 '원역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현주소'를 보여주기 위한 상징적 사건들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들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현상을 이해하고 그 밑바탕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원역사'라고 부릅니다.


이 원역사를 통해 창세기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이 세계의 현주소는 한 마디로 '망가진 세계'인데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세계를 만드시고 '아! 참 좋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아름다움이 철저하고 처절하게 망가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이 원역사의 요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원역사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속상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성들여 만들어 놓은 작품이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깨끗하게 정리해 놓은 방이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아침에 깨끗이 청소하고 외출한 방이 저녁에 들어와보니 방 바닥엔 온갖 책과 장난감들이 굴러다니고 구석구석 빨랫거리들이 처박혀 있고 온갖 쓰레기들은 쓰레기통을 기어나와 악취를 풍기고 있는 것입니다. 딱 이 모습이 '원역사'를 통하여 창세기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로 '망가진 세계'입니다.

아름다움과 선함이 다스리던 세계는 이제

두려움
거짓
책임전가
탐심
고통
가시덤불
미움
시기
살인
비교의식
경쟁
살육
도피
전쟁
착취
정욕
교만이 다스리는 세계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원역사의 여러 이야기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망가진 세계의 모습입니다.

이런 망가진 세계의 현상들의 꼭지점에는 '죽음'이라는 현상이 놓여 있습니다. 이 죽음은 죄와 동전의 양면인데, 현상적으로 보면 죽음이고 신학적으로 보면 죄라고 부릅니다. 망가짐의 출발점인 아담의 선악과 탈취사건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향해 '네가 기필코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고통과 수고와 두려움과 책임전가와 미움과 형제살해와 한숨 속에 살다가 결국 죽게 됩니다. 마치 우리의 삶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담은 우리 모두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사실, '아담'이라는 말은 특정 인물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고 일반적인 사물의 이름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입니다. 쉽게 말해 아담이라는 마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구약성경에 매우 많이 쓰이는 단어입니다. 모든 사람이 곧 아담이라는 말이고 우리의 처지가 바로 아담의 처지라는 의미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원역사'를 통하여 죽음 혹은 죄라는 중심에서부터 원심력에 의해 팽창되고 있는 망가짐의 현상들을 보게 됩니다. 뒤에 자세히 다루겠지만, 바울은 이런 일련의 현상들을 '모든 사람이 죄 아래 놓였다'라는 신학적 언어를 써서 설명합니다. 현상적 언어를 사용하자면 '모든 사람이 죽는다'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권세 아래에서 모든 망가짐의 징후들이 우리 삶에 스며들어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에서부터 원역사까지의 서론은 이제 끝나고 창세기, 아니 '족장기'는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본론은 '하나님의 위대한 선택'과 함께 시작합니다. 무엇을 위한 선택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무슨 일을 시작하시려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이 '선택'을 통해서 하시려고 하는 일은 망가진 세계를 수리하시는 것입니다. 엉망이 된 방을 다시 정리하시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망가진 세계의 정점에 있는 사건이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소위 '바벨탑' 사건입니다. 탐욕스런 인간들이 땅을 망가뜨리는 것으로 모자라 하나님의 영역인 '하늘'을 침범하고자 하늘에 이르는 탑을 쌓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의 망가짐을 볼 수 없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언어를 뒤섞어 버리셔서 더 이상 하늘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셨고 이 땅의 망가짐도 유보해 두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 직후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표준새번역 창 12장 1-3절)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왜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선택했는지는 모릅니다. 아브라함이 특별히 훌륭하거나 믿음이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망가진 세계를 수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엉망이 된 방을 다시 정리하시기 위해서 선택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을 상실한 온 세계에 다시 복을 불어넣는 일, 그것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분명한 이유입니다.

물론 이런 수리과정은 아브라함 개인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한 '민족'을 만드시고 그 민족을 통해 온 세계에 복을 불어넣겠다는 소망을 아브라함에게 나눠 주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 소망을 품게 하십니다. 그래서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을 다시금 하나님의 복으로 채워서 두려움, 거짓, 책임전가, 탐심, 고통, 미움, 시기, 살인, 비교, 경쟁, 살육, 도피, 전쟁, 착취, 정욕, 교만, 가시덤불이 끝장난 세계로 회복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마치 엉망이 된 아이들 방 앞에 엄마가 불러 세운 '큰 딸'과 같습니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방을 다시 정리하기 위해 큰 딸을 부르고 깨끗이 정리하는 일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후 진행되는 창세기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형성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구약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하시고자 했던 일들이 어떻게 진행이 되는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계획이 어떻게 좌절되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 인간은 실패해도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인간의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성실함을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구약성경의 가장 중심되는 주제입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이라는 주제는 성경에 등장하는 수 많은 사건과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는 튼튼한 뚝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이라는 뚝 안에서 때로 물결이 일고, 바람도 불고, 홍수가 나기도 하지만 단 한 번도 하나님의 성실하심이라는 뚝을 넘어 범람하지 못했습니다. 그 뚝이 워낙 강하고 높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속성을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헤세드'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주로 '인자'라고 번역을 했는데, 더 정확한 의미는 '사랑'입니다. 그것도 그냥 사랑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사랑', '실패하지 않는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바로 '헤세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헤세드'란 인간의 태도와는 상관없이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온 세계에 복을 불어넣으시겠다 말씀하신 이후로 성경은 줄곧 하나님의 '헤세드'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부르신 이후 창세기 15장에는 아마도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는 이야기입니다. '언약'이란 '말로 약속을 한다'는 뜻인데, 히브리 말에서는 '가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짐승을 두 개로 갈라놓고 언약을 맺는 당사자가 그 사이를 지나가는데서 유래된 말입니다. 창세기 15장에는 정확히 그런 장면이 나오는데, 저녁 어두울 때 횃불 하나가 갈라놓은 동물 사이로 지나갑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언약이 맺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아브라함은 갈라놓은 동물 사이로 지나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 언약에서는 하나님의 절대적 의지가 선명하게 부각이 됩니다. 이 장면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 역사가 어떻게 흘러갈지를 이미 알수 있게 됩니다. 언약을 향한 인간의 불성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하나님의 성실함.

언약의 내용은 아브라함을 통해 큰 민족을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언약이 중요한 이유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이 민족을 통해서 망가진 세계에 하나님의 복을 불어넣겠다는 하나님의 결단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이 언약이 구약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과 사건들의 전제입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어떻게 이루어가시는가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언약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서사의 시작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후,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도 망가진 이 세계를 고치시고자 하는 계획을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계를 폐기처분하는 것이 아닙니다. 망가졌다고 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망가진 이 세계에서 우리를 탈출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통해 망가진 이 세계를 수리하고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통하여, 바울의 표현대로 하면,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우리를 통하여 망가진 이 세계를 수리하는 것이 하나님의 유일하고도 변치 않는 계획입니다.

여전히 인간은 불성실하고 실패하겠지만 하나님의 '헤세드'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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