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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27일 수요일

(연재) 십자가의 의미- 02. 오늘도 '살롬'

앞에서 우리는 '망가진 세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죽음과 죄라는 무시무시한 권력 앞에 줄 맞춰 늘어선 두려움과 미움과 비교의식과 고통과 정욕과 교만 등이 이 세계의 점령군으로 자처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서 모든 피조물들은 신음합니다.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실낙원한 사람은 수고와 고통 속에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망가진 세계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것들을 수리하기로 작정하셨고,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부르심으로 그 일을 시작하셨음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글의 목적은, 하나님의 계획이 망가진 이 세계를 폐기처분 하고,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을 이 오물천지에서 구출시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폐기처분'이 아니라 '원상복구'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더 중요합니다.

성서에는 망가진 이 세계가 다시 온전하게 회복된 상태를 묘사해주는 매우 정확한 단어가 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슈알롬'이라고 읽고 외래어 표기에 따르면 '살롬'이라고 쓰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우리말로는 평강, 평안, 화평, 평화 등으로 번역을 합니다.

흔히 우리는 이 평안이라는 단어가 '내적 평온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이해는 '살롬'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의 매우 작은 한 부분만을 의미할 뿐입니다. 이 단어는 개인의 내면적 평온만이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전인적 온전함'을 의미합니다. 개인과 공동체가 정신적, 물질적, 육체적으로 완벽하게 충족된 상태를 가리켜 '살롬'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성서에서 이 단어는 매우 다양하게 사용이 됩니다. 인사말에서부터 하나님이 인간과 맺으시는 언약의 내용까지 매우 다양합니다. 병에서 회복된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고 특별한 어려움 없이 살아가는 삶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내적 평온을 나타내기도 하고 전쟁이 없는 상황을 말할 때 사용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단어가 성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이 단어에 신학적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라는 일반적 현상에 신학적 의미가 부여되어 '죄'라는 중요한 개념이 생겨나는 것처럼, '살롬'이라는 단어 안에는 '모든 망가짐이 회복된 충족의 상태'라는 신학적 개념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살롬'은 개인의 전인적 완전함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공동체적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망가진 세계가 온전하게 회복되고 수리된 상태를 말해는 단어가 바로 '살롬'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성서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데,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단연, 예언자 이사야가 '고통 받는 땅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에 관하여 말한 너무도 아름다운 구절입니다.



          6 한 아기가 우리에게서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얻었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7 그의 왕권은 점점 더 커지고 나라의 평화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가 다윗의 보좌와 왕국 위에 앉아서, 이제부터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다. 만군의 주의 열심이 이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이사야 9장 6-7절 표준새번역)


이 구절에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시는 일에 대한 매우 중요한 개념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평화의 왕을 세우고, 온 세계에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이 일을 이루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살롬'이라는 말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려고 하는 말씀은, 이 세상이 망가졌으니 이 세상은 포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더럽고 추하지만 너만은 마음에 평화를 누리라는 것도 아닙니다. 엉망이 된 세상을 향해서는 눈을 감고 너의 마음에만 집중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너의 우물 속에서 나와서 망가진 세계를 보라는 것이고,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로 평화의 세계가 견고해져가는 것을 똑똑히 살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망가진 세계를 수리하는 일에 우리도 함께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롬'의 의미입니다.


구약성서에서 이 단어가 가장 처음 나오는 곳은 창세기 15장입니다. 앞의 글에서 이미 말한 것처럼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언약을 맺으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역을 맺시며, 비록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이방 나라에서 객이 되는 어려움을 겪겠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큰 민족을 만들어내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평안을 약속하십니다. 물론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개인적 평안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브라함의 모든 자손, 이스라엘의 평안이고, 온 세계의 평안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이 세계의 회복과 '살롬'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 바울이 창세기 15장을 해석한 로마서 4장과 5장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로마서에서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궁극적으로 이루신 일이 무엇인지를 매우 심도 있게 설명을 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진행하면서 창세기 15장에 있는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 이야기를 꺼내놓습니다. 로마서 4장에 있는 내용입니다.

로마서 4장에서 말하는 바울의 요지는 '누가 아브라함의 상속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망가진 세계를 수리하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와 언약 맺으셨음을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진정한 아브라함의 상속자는 누구인지 묻는 것입니다.

바울의 논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새롭게 하시기 위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런데, 누가 진정으로 그 언약의 상속자가 되는가? 율법을 지키는, 할례받은 사람인가? 아니면, 아브라함과 같이 언약을 향한 믿음, 즉 신실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가?"

물론 바울은, 아브라함이 언약을 맺은 것은 할례받기 전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진정한 상속자는 할례를 통해 증명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대신 아브라함과 같은 언약을 향한 신실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진정한 언약의 상속자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그 신실함이 아브라함에게 의가 된 것처럼, 언약을 향한 신실함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도 의롭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신실함, 즉 믿음과 의, 그리고 평화의 관계에 관해서는 다음 글에서 자세하게 다룰 예정입니다.)

조금 복잡하지만, 그리고 나중에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지만,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드디어 성취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 언약의 성취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오랜 계획, 망가진 세계를 수리하시려는 계획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살롬이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어지는 로마서 5장 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신실함)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충족되어지고, 하나님의 계획이 궁극적으로 이루어진 상태가 곧 '살롬'입니다. 인간의 불성실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모든 진노가 그쳤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신실하심에 의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약이 충족되었기 때문인데, 그 상태가 바로 '살롬'입니다.

그래서 이 살롬은 구원을 의미합니다. 완전한 회복과 치유를 의미합니다. 내면의 건강과 평온함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육체적 질병에서 회복되고 깨어진 모든 관계들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망가진 온 세계가 하나님 '안에서' 회복되고, 하나님'과' 회복되고 하나님을 '향해'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 살롬을 향한 하나님의 열정이 '하나님의 믿음'입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평화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예수의 탄생이 이 땅에 평화를 가져왔다고 말합니다. 가장 소극적으로는 예수 안에서 누리는 내적 평화와 인격의 성숙을 의미하고, 더 넓게는 세상의 모든 전쟁이 그치고 모든 민족에 평화가 임함을 의미하며, 궁극적으로는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이 땅에 모든 억압과 고통이 그치고 진정한 평화가 임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망가진 세계를 온전하게 치유하는 '평화의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살롬을 소망합니다. 이 세상은 유기되거나 폐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이 땅에 정의와 공평을 만들어내고 평화를 이루어갑니다. 망가짐은 수리되고, 깨어짐은 다시 연결되며, 불균형은 조화를 이루어냅니다. 이것이 오늘도 우리가 '살롬'하고 인사를 나누는 이유입니다.

댓글 2개:

  1. 반대로 너의 우물 속에서 나와서 망가진 세계를 보라는 것이고,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로 평화의 세계가 견고해져가는 것을 똑똑히 살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망가진 세계를 수리하는 일에 우리도 함께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롬'의 의미입니다.
    이부분 제 마음에 확 와닿아요. 샬롬이 그저 우리가 샬롬!하고 가볍게 인사나하는 그런 가벼운 단어가 아니었군요. 아는만큼 믿는다고 하던데.... 오래간만에 들어온 카페에서 샬롬의 진정한 의미를 새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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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 권사님...
      저도 몇달간 방치해 뒀다가 요즘 다시 글을 조금씩 씁니다. 집중해서 써야 글도 늘텐데... 일단 초안으로 쓴 글이니 다음에 다시 잘 정리해 봐야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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