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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박성장입니다.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하늘을 보며, 하늘의 뜻을 생각하며 오늘도 힘 내시기 바랍니다.

2015년 11월 16일 월요일

예수가 말한 하느님 나라 5 - 예언자 예수

예수는 누가 봐도 예언자였다. 이는 복음서를 조금만 유심히 읽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예수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예언자라고 불렸다. 그 유명한 베드로의 대답 '주는 그리스이십니다'라는 답변 이전에 제자들은 '사람들이 주님을 예언자라고 부릅니다'라고 말했다.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예수의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이 발생했지만 무리가 예수를 예언자로 알기에 함부로 손을 대지 못했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군중과 제자들은 예수를 예언자로 이해했다.
타인뿐만 아니 예수 스스로도 자신을 예언자로 이해했음을 성서는 우리에게 보여준다. 자기를 배척하는 고향 사람들을 향해 '예언자가 자기집 이외에는 존경 받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예수는 종종 자신이 받을 박해를 말하면서 예언자들이 이미 받은 박해를 언급한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말하면 예언자가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법이 없다 말하면 끝까지 그 길을 가겠다는 의지를 표현한다. 이런 예수의 언행들을 종합해보면 그가 예언자의 전통에 서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예수께서도 스스로를 예언자의 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예수는 스스로를 예언자의 전통에 서 있는 고독한 예언자로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 주변에 있는 제자들을 비롯한 군중들도 그를 예언자로 봤다. 그의 언사는 영락없이 예언자의 그것과 닮아 있었던 것이다. 예수는 철저하게 예언자의 모습이었다. 여기가 논의의 시작이다.

2015년 10월 26일 월요일

예수가 말한 하느님의 나라 4 - 야훼가 왕이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구약성서에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하느님의 나라라는 개념이 구약성서에서 낯선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구약성서 전반에 중요한 기둥으로 서 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사울 왕을 시작으로 왕정이 시작됐다. 그리고 남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하기까지 이스라엘에는 쭉 왕이 있었다. 남북왕조의 분열 이후 남북이 서로 다른 신학적 강조점을 가지고 왕조가 이어졌지만 남북왕조 모두 왕정국가라는 형태를 계속 유지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정에는 특별한 점이 있었는데, 사무엘서에서 사울을 왕으로 세울 때 이스라엘의 왕정신학이 잘 드러난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스라엘의 진짜 왕은 야훼 하느님 뿐'이라는 것이다.

2015년 9월 20일 일요일

예수가 말한 하느님의 나라 3 - 드디어 서론!

하느님의 나라라는 표현은 구약성서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다가 신약성서가 시작되는 마태복음서에 뜬금없이 '천국'이라는 말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것도 신약성서의 핵심인 예수와 세례자 요한에 의해서 말이다. 그러니 구약과 신약의 흐름, 더 나아가 구약과 신약의 비어 있는 중간시기에 대한 이해 없이 성서를 읽으면 '예수께서 천국이라는 새로운 복음을 선포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래왔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전한 천국복음이란 것이 구약 시대에는 알지 못하던 새로운 세계, 즉 사후의 천국에 관해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선구자를 넘어 인간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하느님께서 계시는 천상의 세계를 보여주신 분이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도, 구원자라는 말도, 메시아라는 말도 모두 천국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신 분이라는 의미에서 해석된다.
그러나 앞 글에서 언급했듯이, 복음서에서 말하는 천국은 그런 천국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천국이라는 단어가 복음서에서 처음 나올 뿐, 이미 동일한 개념은 구약성서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2015년 9월 12일 토요일

예수가 말한 하느님의 나라 2 - 가짜 서론: 꼭 해야하는 얘기지만 서론은 아닌.

죽어서 가는 천상도시(농촌이 아닌 도시!)로서의 천국에 대해 성서는 침묵하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서가 말하는 천국은 신자들의 사후에 맞이하게 될 천상의 도시가 아니다. 우리는 흔히 신자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천국이라고 불리는 천상도시로 이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천국은 그런 '장소'가 아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가짜 서론'에서 잠시 다루려고 한다. 이 글이 가짜 서론인 이유는 글 전체의 논지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천국에 대한 완전히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꼭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론 부분에서 다루고 넘어가지만 진짜 서론은 아니다.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지, 예수께서는 왜 하느님의 나라를 전했는지 이해하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천국'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는 것이다. 물론 천국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는다고 하느님 나라가 절로 깨달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천국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바로 잡혀야 비로소 예수께서 전한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의 첫 걸음이 시작될 수 있다.

2015년 9월 11일 금요일

예수가 말한 하느님의 나라 1 - 서론을 위한 서론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 이야기의 주제가 '하느님의 나라'라는 것을 알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나름대로 성서도 읽고 교회에 관심도 많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신학대학에 진학할 정도의 열심은 있었지만 복음서의 예수 이야기가 하느님 나라 이야기라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
교회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여러차례 성서공부 인도를 했다. 주로 복음서와 예수 이야기를 했는데, 복음서의 이야기가 하느님의 나라에 맞춰져 있다고 알고 있는 성도를 만나기는 참 어려웠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듣는다는 사람이 부지기수였고 들어는 봤으나 대략적 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천국'과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구별되느냐 물었을 때, 그 둘이 같은 개념이라고 답한 사람은 10년 동안 한두명 밖에 만나보지 못했다.

이렇듯 성서의 핵심 개념인 하느님 나라와 일반교회에서 성도들이 이해하고 있는 기독교 복음 사이에는 과연 극복될 수 있을까 싶을만큼 동떨어져 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말씀하시고, 하느님의 나라가 왔다고 선언하시고,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사셨는데, 이 시대의 교회는 예수 믿어 천국 가는 이야기, 이 땅에서 복 받는 이야기를 한다.
이런 예수 없는 예수복음 이야기가 복음의 핵심으로 전수되고 확대 재생산 되는 근본적 이유 하나가 바로 복음서의 핵심인 하느님 나라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를 그저 죽어서 가는 천국, 혹은 예수 잘 믿고 복 받아서 마음 편하고, 교회 생활 잘 하고, 가정 행복한 것 정도로만 이해한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이 송두리째 부정당하고 있다.

2015년 5월 23일 토요일

성서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

하느님의 영
 
 
들어가며
 
도대체 성령이 뭐기에 그 난리들일까?
나는 어릴 적 근본주의식 성서읽기와 오순절식 은사주의가 결합된 독특한 환경에서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였고 그런 환경에서 10대를 보냈다. 지금의 나를 보면 상상조차 힘들겠지만...
아무튼 그 땐, 사도행전을 기반으로 근본주의식 문자적 해석을 통해 오순절식 성령 이해가 절대적이고 온당한 진리라고 믿었다. 더 나아가,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방언을 해야 성령을 받은 것이라는 인식도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다.
사실 내가 속한 교단은 줄곧 장로교였는데, 장로교가 성령에 대해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였다. 장로교에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면 성령을 받은 것이라는데(고전 12:3) 이런 밍밍한 종자들 같으니라구, 이리 생각했다.
양 진영 사이에 이런 논쟁은 여전하다. 한 쪽은 다른 쪽을 향해 밍밍한 율법주의자라 욕하고 다른 쪽은 천박한 것들이 기독교를 모독한다고 비웃는다. 욕과 비웃음, 과연 누가 이길 것인가?
그런데 이런 갈등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닌 듯 하다. 성서를 들여다보면 2천 년 전부터 이미 이런 갈등이 존재했다. 고린도교회가 그랬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방언이나 예언을 중시하는 열광주의자들이 있었던 듯 하고, 그로 인해 교회가 분열되고 갈등이 있었던 듯하다. 사실 고린도전서는 이런 상황에 대한 바울의 해법으로 기록된 편지이기에 오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어쨌든 성령에 관한 이야기는 뜨거운 감자와 같다. 성서가 성령에 대해 이렇다 할 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면 우리가 성령에 관한 성서의 이야기 아래에 흐르고 있는 이야기 되지 않는 전제를 모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떤 학자는 성령을 다양한 얼굴이라고 표현했는데, 이제 그 얼굴들을 들여다보자. 히브리성서에서부터 복음서, 그리고 바울에게까지 이르면 중요한 얼굴들은 익히게 되지 않을까 싶다.


1. 성령, 그 편협한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