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교양 있는 척 하는 사람 출입금지
가정교회를 지향한 건 아니었다. 처음엔 몇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식당이나 카페, 학원 등 주일에만 예배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곳을 빌리는 것이 최상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들이 현지인 교회를 빌려 사용하듯이 다른 교회 공간을 빌려 쓰는 것도 생각해 봤다. 그것도 안 되면 집에서 시작 하겠다 마음먹었다.
헌데 타이밍이 썩 좋지 못했다. 괌에서 부목사로 일하다 귀국 하자마자 교회를 시작하는 터라 아는 사람도 많지 않고 도움 받을 곳도 별로 없었다. 인천에 터를 잡고 예배 공간으로 사용할만한 곳을 몇 군데 알아보다가 포기했다. 결국 예배는 우리 집에서 시작되었다. 5층짜리 오래된 아파트 5층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없이 강제 운동을 해야 하는 20평 조금 안 되는 공간에서 길벗교회가 시작됐다.
교인이라곤 우리 가족 외에 청년 한 명 이었고 몇몇 지인들이 격려차 예배 시간에 방문해 주시던 때였는데 현관문 앞에 이렇게 써 붙였다. “교양 있는 척 하는 사람 출입금지” 어디선가 지나치며 본 문구였는데 내가 바라는 교회의 모습을 너무도 잘 표현해주는 듯해서 가져다 썼다.
어느 교회를 가든 교양 있어 보이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부드럽게 말하려 노력하고 믿음 있어 보이려 노력한다. 최대한 자신을 ‘좋은 신앙인’으로 보이려 애쓴다. 그것이 일종의 교회 문화로 자리 잡았는데, 비교와 경쟁을 통해 교인들을 통제하려는 목사들의 욕망이 가장 큰 이유로 보인다.
나는 교양 있어 보이는 ‘성숙한 신앙인’들의 이면에 분노와 편견과 배제가 자리 잡고 있음을 보았다. 진짜 교양을 배우지 못하고 교양 있는 척하는 법만 배웠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면과 현실의 문제를 솔직하게 고백하지 못하고 그저 믿음이라는 구호 하나로 자신의 문제조차 덮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신앙적 노력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는 기도와 말씀을 통해 자신의 약점을 고쳐나가려는 부단한 노력들이 있었다. 그러나 개신교 안에 자리 잡은 뿌리 깊은 개인주의는 진짜 교양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교양 있는 척 하도록 부추겼다.
나는 우리 교회가 그런 교양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자신을 꾸미지 않음으로 얻는 자유와 평화를 꿈꿨다. 자신의 약점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를 배우도록 격려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도 안전한 공간, 그런 만남이 길벗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소망했다.
난 여전히 그런 교회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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