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1호 교인의 탄생
난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매우 크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공짜로 얻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탓도 있지만 거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쉽게 내 속내를 내비치지 못한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부탁을 하거나 제안을 할 때는 상황을 잘 살피고 성사 되겠다 싶은 얘기만 꺼낸다. 아니면 미리 나름의 상황 설정 후 말을 꺼낸다.
교회를 시작하며 마음 속에는 '이 사람이 함께 해 주면 좋겠다' 싶은 분들이 여러 명 있었는데 아무에게도 함께하자는 얘기를 대놓고 하지 못했다. 얘기 해보고 안 되면 말고, 이게 잘 안 된 탓이다.
우리 가족 이외의 교인 없이 교회를 시작하는 건 영 자신이 없었다. 우리 가족끼리만 있으면 분명 예배를 안 드릴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교인 한 명은 있어야지 싶어 교육전도사 시절 고등부 학생이었던 청년에게 연락을 했다(사실 페이스북으로 소식은 나누고 있었다.) 함께 교회를 시작하자는 말에 흔쾌히 그러겠노라 대답이 돌아왔다.
첫 예배를 드리고 두세달 쯤 지났을 때인가보다. 우리 부부를 포함해 어른 5-6명이 예배를 드릴 때였는데, 사실 길벗교인은 우리 부부와 청년 한명이 전부였고 다른 분들은 개척교회 돕는 마음으로 예배에 참여해 주던 분들이었다.
예배 시간에 그 청년이 폭탄 발언을 했다. 중국 상해로 파견근무를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두 달 정도 파견으로 예배 참석이 어렵겠다는 얘기를 꺼냈고 나는 쿨하게 잘 다녀오라고 복을 빌어주었다.
그 청년이 상해로 떠나고 예배에 참석하시는 교우 한 분이 내게 진지하게 물었다. 정말 괜찮으냐고.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괜찮을리가 없었다. 한 명뿐인 교인이 두 달이나 떠나 있는데 괜찮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래도 괜찮은 척 했다. "상관 없습니다. 그 청년에겐 자신의 삶이 더 중요한겁니다." 멋있는 척 대답했다.
결국 하나 뿐인 교인은 떠나고 객들이 예배 시간을 채워줬다. 그리고 그 청년은 '1호 교인'이란 별명을 얻었다. 언제 2호, 3호가 생길지 모르는 기약없는 별명이었다.
두 달 뒤, 1호 교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상해 근무가 1년 정도 더 연장이 될 거라는 통첩이었다. 내 여행용 가방까지 빌려가 놓고 너무 했다. 결국 1년을 다 채우지 않고 8개월여만에 길벗교회로 돌아왔다.
사실 돌아보면 1호교인의 부재가 응원차 왔던 몇몇 분들이 길벗교회에 뿌리 내리게 된 계기였는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니 1호 교인에게 감사해야 할 일인지도 모르겠다.
1호 교인은 1년 전 다시 일본으로 떠났다. 이번엔 일 때문이 아니라 공부를 하고 싶다며 훌훌 떠났다. 그래서 우리 길벗교회에 1호 교인은 공석이다. 보고 싶다 1호 교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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