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나는 카스테라가 싫어요
세계 4대 기독교 종파 중 유일학게 개신교만 성만찬 없는 예배를 드린다. 정교회, 로마가톨릭, 성공회 모두 매 주일 성찬례를 행하지만 유독 개신교만은 성만찬이 없다. (크게보면 성공회도 개신교의 한 분파로 볼 수 있지만 개신교와는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으니 구분해 보았다.)
개신교의 성만찬은 자주 하는 곳이 한 달에 1회정도, 나머지는 연 4회 혹은 2회 정도다. 개신교 예배에서 성만찬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설교가 차지했다. 결국 과도한 설교 집착으로 인한 목사의 설교능력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되었다.
나는 예배의 중심이 설교가 아니라 성만찬에 있다고 믿는다. 물론 다변화된 현대사회에서 이것이 크게 중요한 문제거리가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문제로 누구와 논쟁할 마음도 없다. 다만 지나치게 비대해진 설교 집착과 목사의 역할을 설교에만 국한하는 모든 문제들의 근원에 성만찬 실종이 놓여있다는 확신은 분명하다.
길벗교회는 첫 예배부터 지금까지 매 주일 함께 빵과 포도주를 나눈다. 보통은 '성만찬'이라 부르는 것도 '주의 만찬'이라고 호칭한다. 주님과 함께하는 식사라는 의미를 더 부여하고 싶기 때문이다. 예배 순서에 잠깐 들어가 있는 예식이라기보단 주님과 함께하는 일상의 식사가 더 적절해 보이기에 '거룩한 만찬'이라는 표현보다는 '주의 만찬'이 더 좋겠다는 판단에서다.
내가 이해하기에 초기교회는 '예배'를 위해 모이지 않았다. 그들은 빵과 잔을 나누기 위해, 즉 주의 만찬을 함께 먹기 위해 모였다. 바울의 서신들에 이런 정황이 잘 나타난다. 그들에게 교회됨은 주의 이름으로 모여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들이 섬기던 하느님을 향한 가장 핵심적 신앙의 고백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길벗교회는 지금까지 매 주일 모일때마다 빵과 포도주를 나눈다. 함께 빵과 포도주를 나누며 하느님의 한 가족임을 확인하고 우리가 메시아 예수 안에 있음을 고백한다. 교인 수련회를 가서 예배는 안 드려도 주의 만찬은 함께 나눈다. 종종 설교 없는 예배는 진행하지만 주의 만찬은 있다. 설교를 통해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주의 만찬을 통해 하느님의 얼굴을 본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교회, 로마가톨릭, 성교회, 그리고 개신교의 성만찬을 참여하면서 한 가지 늘 아쉬운 점이 있었다. 지나친 엄숙주의와 '식사'의 의미를 상실한 예식이라는 부분이다. 엄숙주의는 특별히 개신교에서 더욱 강한데 주님의 살과 피를 마신다는 명목하에 대화 한 마디 못하고 눈물 찔끔 흘려야 은혜가 되는 어색한 식사를 하는 셈이다. 심지어 개신교 대부분의 교회가 사용하는 빵은 카스테라다. 카스테라를 가지런히 잘라 스테인리스 쟁반에 올려 두는데, 솔직히 보기만 좋다.
나는 주님과 함께하는 식사의 엄숙주의를 깨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한 '식사'의 의미를 살리고 싶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사람들과 식사하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세리와 죄인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예수의 모습을 보며 나는 그것이 주의 만찬이 가진 본래의 의미라고 이해한다. 그 식사를 통해 얻은 예수의 별명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 '먹보요 술꾼'이었다. 이것이 바로 주의 만찬 아니겠는가.
그래서 길벗교회는 맛있는 빵을 준비한다. 포도주도 맛있는 걸로, 알코올 섭취를 안 하시는 분들을 위해 포도주스도 준비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테이블에 진설하고 마음껏 먹고 마시며 대화한다. 근황도 나누고 때론 떠들썩 떠들기도 하고, 또 때로는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보기도 한다. 그것이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던 주님과 함께하는 식사라 믿기 때문이다.
늘 감동이 넘치는 건 아니다. 때로는 무미건조한 시간처럼 흘러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주님의 살과 피를 마시며 하느님 나라의 길을 걷고 있는 걸벗들이고 한 형제자매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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