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래서 '성령받음'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관해 써보려고 합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이전에 성령이 무엇인지에 관해 정리를 좀 해 보려구요.
헌데, 문제가 좀 있습니다. '성령이 무엇인가?' 이 질문에 성경이 명쾌하게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큰 그림을 한 번 그려보겠습니다.
1. 현재의 '성령받음'에 관한 논의는 근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논의가 성령받음의 '현상'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현상이 성령을 받은 것인가 하는 것이 주된 논점이라는 말입니다. 방언을 하느냐 마느냐, 은사가 있느냐 없느냐, 열매가 맺히느냐 아니냐 등의 논의는 모두 성령 받음을 입증할 수 있는 '현상'에 관한 것들입니다.
2. 하지만 그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중요한 것은 성령받음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왜 주셨고,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 하나님의 새창조와 구속의 역사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의미가 빠진 현상에 관한 탐구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3. 먼저, 성령이 무엇인가 큰 틀을 잡고 가야겠습니다. 톰 라이트는 창1:2절을 기초로 성령을 '창조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현존과 능력'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성령의 인격성과 비인격성을 동시에 포함하는 참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성령을 '하나님의 기운'이라고 표현하기 좋아하는데, '현존과 능력'을 한 단어로 표현해 주는 적절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2013년 11월 20일 수요일
2013년 11월 16일 토요일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바울의 글에는 언제나 '믿음, 소망, 사랑'이 같이 나타납니다. 바울이 이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은 일상적 언어습관이 아닙니다. 바울은 매우 조심스럽게 이 단어들을 선택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단어들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매우 소상히 밝혀줍니다. 특별히,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관통하고 있는 그림에는 '의로워짐과 구원'의 진정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글은 그 의미들을 풀어 쓴 것입니다. 특별히 로마서 5장과 8장을 중심으로 의로워짐과 구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상관관계를 풀어봤습니다.
1.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롬5:1).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과 그렇지 않은 자를 나누실텐데, 믿음으로 그 판결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판결이 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완료형입니다.
2. 여기에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믿음으로서(롬4:24) ‘율법의 행위’와 대조를 이루는 말입니다.
3. 율법의 행위란, '선을 행하는 삶의 방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으로서 자동적으로 얻게된 ‘외모’를 의미합니다. 유대인이라는 혈통으로 태어나, 부모에 의해 할례를 받고, 안식일에 회당에서 율법 낭독을 듣는 등의 ‘자동적으로 얻게 된 자격’을 의미합니다. 즉 율법의 행위란 '선행'이 아니라 ‘좋은 외모’를 말하는 것이지요.
4. ‘율법의 행위’에 반하는 ‘믿음’이란, 구원에 대한 확신이나 경건한 생활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이라는 자격에 반해 ‘아무 자격 없어도’ 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오직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믿음 하나만 있으면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단어들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매우 소상히 밝혀줍니다. 특별히,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관통하고 있는 그림에는 '의로워짐과 구원'의 진정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글은 그 의미들을 풀어 쓴 것입니다. 특별히 로마서 5장과 8장을 중심으로 의로워짐과 구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상관관계를 풀어봤습니다.
1.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롬5:1).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과 그렇지 않은 자를 나누실텐데, 믿음으로 그 판결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판결이 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완료형입니다.
2. 여기에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믿음으로서(롬4:24) ‘율법의 행위’와 대조를 이루는 말입니다.
3. 율법의 행위란, '선을 행하는 삶의 방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으로서 자동적으로 얻게된 ‘외모’를 의미합니다. 유대인이라는 혈통으로 태어나, 부모에 의해 할례를 받고, 안식일에 회당에서 율법 낭독을 듣는 등의 ‘자동적으로 얻게 된 자격’을 의미합니다. 즉 율법의 행위란 '선행'이 아니라 ‘좋은 외모’를 말하는 것이지요.
4. ‘율법의 행위’에 반하는 ‘믿음’이란, 구원에 대한 확신이나 경건한 생활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이라는 자격에 반해 ‘아무 자격 없어도’ 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오직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믿음 하나만 있으면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2013년 10월 16일 수요일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기독교 복음
* 이 글은 현재 주류 기독교에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 자리잡고 있는 교리적 위치를 살펴보고, 그것이 과연 성경에 말하는 기독교 복음을 잘 표현해 주고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글이 전개되겠지만 궁극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바는 내가 이해하는 '기독교 복음의 본질'에 관한 것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1.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는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역사적 의구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향해 어떤 이들은 '나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는다' 라고 자신의 신앙심을 표현합니다. 참 믿음 있어 보이는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는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설령 그렇게 믿는다 해도 말이지요.
모든 텍스트는 해석 되어야만 우리의 인식체계 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어떤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미 우리는 무의식 중에 우리의 해석적 틀 안에서 그 텍스트를 해석하고 있는 것이지요. 해석의 과정 없이 텍스트가 우리의 인식 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글자를 먹는다고 그것이 이해되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믿는다고 생각하더라도, 알게 모르게 우리는 이미 성경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모든 것이 사실은 우리의 기본 지식, 문화, 가치, 언어적 습성 등을 통해 해석된 것이지요.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글이 전개되겠지만 궁극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바는 내가 이해하는 '기독교 복음의 본질'에 관한 것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1.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는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역사적 의구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향해 어떤 이들은 '나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는다' 라고 자신의 신앙심을 표현합니다. 참 믿음 있어 보이는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는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설령 그렇게 믿는다 해도 말이지요.
모든 텍스트는 해석 되어야만 우리의 인식체계 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어떤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미 우리는 무의식 중에 우리의 해석적 틀 안에서 그 텍스트를 해석하고 있는 것이지요. 해석의 과정 없이 텍스트가 우리의 인식 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글자를 먹는다고 그것이 이해되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믿는다고 생각하더라도, 알게 모르게 우리는 이미 성경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모든 것이 사실은 우리의 기본 지식, 문화, 가치, 언어적 습성 등을 통해 해석된 것이지요.
2013년 3월 31일 일요일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나?
인간의 삶을 살았던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으로 고백되었을까?
제자들과 초기 교회는 어떻게 자신들이 믿고 따르던 예수를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인식하게 되었을까?
이 글은 "하나님의 열심에 사로잡혀 있던 한 사람을 그의 제자들은 어떻게 신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나?" 하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쉽게 말해 '예수의 신성'이 제자들에게 받아들여지게 된 과정을 간략하게 재구성해 보는 것입니다.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논쟁이나, 삼위일체에 관한 것은 논외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는 문구는 예수를 당연히 신적 존재로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서 밝혀지듯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신적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회복할 '메시아'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대리자인 '이스라엘의 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자들과 초기 교회는 어떻게 자신들이 믿고 따르던 예수를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인식하게 되었을까?
이 글은 "하나님의 열심에 사로잡혀 있던 한 사람을 그의 제자들은 어떻게 신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나?" 하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쉽게 말해 '예수의 신성'이 제자들에게 받아들여지게 된 과정을 간략하게 재구성해 보는 것입니다.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논쟁이나, 삼위일체에 관한 것은 논외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는 문구는 예수를 당연히 신적 존재로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서 밝혀지듯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신적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회복할 '메시아'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대리자인 '이스라엘의 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013년 2월 27일 수요일
(연재) 십자가의 의미- 02. 오늘도 '살롬'
앞에서 우리는 '망가진 세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죽음과 죄라는 무시무시한 권력 앞에 줄 맞춰 늘어선 두려움과 미움과 비교의식과 고통과 정욕과 교만 등이 이 세계의 점령군으로 자처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서 모든 피조물들은 신음합니다.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실낙원한 사람은 수고와 고통 속에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망가진 세계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것들을 수리하기로 작정하셨고,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부르심으로 그 일을 시작하셨음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글의 목적은, 하나님의 계획이 망가진 이 세계를 폐기처분 하고,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을 이 오물천지에서 구출시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폐기처분'이 아니라 '원상복구'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더 중요합니다.
성서에는 망가진 이 세계가 다시 온전하게 회복된 상태를 묘사해주는 매우 정확한 단어가 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슈알롬'이라고 읽고 외래어 표기에 따르면 '살롬'이라고 쓰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우리말로는 평강, 평안, 화평, 평화 등으로 번역을 합니다.
흔히 우리는 이 평안이라는 단어가 '내적 평온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이해는 '살롬'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의 매우 작은 한 부분만을 의미할 뿐입니다. 이 단어는 개인의 내면적 평온만이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전인적 온전함'을 의미합니다. 개인과 공동체가 정신적, 물질적, 육체적으로 완벽하게 충족된 상태를 가리켜 '살롬'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망가진 세계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것들을 수리하기로 작정하셨고,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부르심으로 그 일을 시작하셨음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글의 목적은, 하나님의 계획이 망가진 이 세계를 폐기처분 하고,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을 이 오물천지에서 구출시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폐기처분'이 아니라 '원상복구'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더 중요합니다.
성서에는 망가진 이 세계가 다시 온전하게 회복된 상태를 묘사해주는 매우 정확한 단어가 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슈알롬'이라고 읽고 외래어 표기에 따르면 '살롬'이라고 쓰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우리말로는 평강, 평안, 화평, 평화 등으로 번역을 합니다.
흔히 우리는 이 평안이라는 단어가 '내적 평온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이해는 '살롬'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의 매우 작은 한 부분만을 의미할 뿐입니다. 이 단어는 개인의 내면적 평온만이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전인적 온전함'을 의미합니다. 개인과 공동체가 정신적, 물질적, 육체적으로 완벽하게 충족된 상태를 가리켜 '살롬'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번역(by Sung J. Park)
여자를 버리지 말라
1. 예수께서 그 지역을 떠나 요단강을 건너 유대지방으로 가셨습니다. 무리가 다시 예수께로 모여들었고, 예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2. 그 때 몇몇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가와서 물었습니다. “남자가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그들은(헤롯의 결혼 문제로)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이 질문을 한 것입니다.
3.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모세가 당신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했습니까?”
5.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그런 계명을 써 준 것은 당신들 마음의 완악함 때문입니다.
6. 하지만 (모세가 쓴
창세기에는)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습니다.
7. 그러므로 남자는 자기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8. 두 사람이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더 이상 둘이 아니라 한 몸입니다.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됩니다.”
10. 집에 돌아 왔을 때 제자들이 이 말씀에 관해 다시 물었습니다.
11.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자기 아내에게 간음을 하는 것입니다.
12.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간음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번역(by Sung J. Park)
영광의 모습과 인자의 고난
2. 엿새 후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습니다.
3. 그의 옷은 어떤 빨래꾼도 그렇게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희고
빛났습니다.
4. 그리고 엘리야와 모세가 그들 앞에 나타나서 예수와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5. 그 때 베드로가 나서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 있으니 참 좋습니다. 여기에 초막 세 개를 짓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나는 선생님을 위해서, 하나는 모세를 위해서, 다른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서 말입니다.”
6. 사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제자들 모두 겁에 질려 있어서 한 말입니다.
7. 바로 그 때, 구름이
일어나서 그들을 뒤덮었습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8. 제자들이 곧바로 주위를 둘러 봤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만
남아 있었습니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 그들이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10. 제자들은 이 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부활은 이 세대의 마지막에나 일어날 일인데)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서로 물어보다가
11. 예수께 “그렇다면
왜 율법학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어떻게 죽을 수 있는가, 혹시 이분은 메시아가 아니라 엘리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12.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엘리야가
정말로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할 것’이라는 성경 말씀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13. 내 말을 들어보십시오. 엘리야는
이미 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를 자기들 마음대로 함부로 대했습니다.”
마가복음 8장 번역(by Sung J. Park)
사천 명을 먹이시다
1. 그 무렵에 다시 큰 무리가 모여들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2. “저 사람들이 너무 불쌍합니다.
나와 함께 사흘이나 있었는데, 먹을 것이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3. 만약 이렇게 배고픈 채로 집에 돌려 보내면 가는 길에 쓰러질
것이 뻔합니다. 저들 중에는 아주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4. 제자들이 예수께 대답했습니다.
“이 외딴 곳 어디에서 이 많은 사람들이 배부르게 먹을 빵을 구해올 수 있겠습니까?”
5. 예수께서 물어보셨습니다. “당신들에게는
빵이 얼마나 있습니까?”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일곱 덩어리가
있습니다.”
6. 예수께서는 무리를 땅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빵 일곱 덩어리를 손에 들고 감사기도를 드린 후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무리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7. 또 작은 물고기도 몇 마리 있었는데, 예수께서 그것도 감사기도를 드리고 나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8.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주워 모으니 일곱 바구니가 되었습니다.
9. 빵을 먹은 사람은 약
4,000명쯤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돌려보내셨습니다.
10. 그리고 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마가복음 7장 번역(by Sung J. Park)
전통이냐 하나님의 말씀이냐
1. 바리새파 사람들과 예루살렘에서 온 몇몇 율법학자들이 예수 앞에
몰려왔습니다.
2. 그런데 그들은 예수의 제자 몇 명이 손을 씻지 않은 더럽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3. 바리새파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먼저 손을 깨끗이 씻지 않으면 먹지 않았습니다.
4. 또 사람들 많은 시장에서 돌아온 뒤에 물로 씻지 않고는[1]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 외에도 그들이 지키는 전통이 꽤 많았는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을 씻는 일 등이었습니다.
5.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습니까? 왜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6.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이사야가
당신들 같은 위선자에 관해 매우 정확하게 예언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2013년 2월 23일 토요일
(연재) 십자가의 의미- 01. 태초에 언약이 있었다
교회에 몇 번이라도 기웃거려본 사람은 다 알듯이 성경은 '창세기'라는 책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그 처음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온 세계를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 이름도 '창세기'입니다. 하지만 창세기를 조금만 더 읽어보면, 창세기의 핵심 내용은 '창조'가 아니라 그 이후에 벌어지는 사건들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창세기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족장들의 이야기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창세기가 아니라 '족장기'라고 불리는 것이 더 정확해 보입니다.
어쨌든, 창세기에는 창조 이야기에 이어 본격적으로 '족장기'가 시작되기 이전까지, 학자들이 '원역사'라고 부르는 내용들이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 그리고 뱀에 관한 이야기, 가인과 아벨 이야기, 노아와 홍수 이야기, 바벨탑 이야기 등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창세기 11장까지 이어집니다. 이 이야기들을 '원역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현주소'를 보여주기 위한 상징적 사건들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들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현상을 이해하고 그 밑바탕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원역사'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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