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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박성장입니다.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하늘을 보며, 하늘의 뜻을 생각하며 오늘도 힘 내시기 바랍니다.

2015년 5월 23일 토요일

성서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

하느님의 영
 
 
들어가며
 
도대체 성령이 뭐기에 그 난리들일까?
나는 어릴 적 근본주의식 성서읽기와 오순절식 은사주의가 결합된 독특한 환경에서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였고 그런 환경에서 10대를 보냈다. 지금의 나를 보면 상상조차 힘들겠지만...
아무튼 그 땐, 사도행전을 기반으로 근본주의식 문자적 해석을 통해 오순절식 성령 이해가 절대적이고 온당한 진리라고 믿었다. 더 나아가,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방언을 해야 성령을 받은 것이라는 인식도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다.
사실 내가 속한 교단은 줄곧 장로교였는데, 장로교가 성령에 대해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였다. 장로교에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면 성령을 받은 것이라는데(고전 12:3) 이런 밍밍한 종자들 같으니라구, 이리 생각했다.
양 진영 사이에 이런 논쟁은 여전하다. 한 쪽은 다른 쪽을 향해 밍밍한 율법주의자라 욕하고 다른 쪽은 천박한 것들이 기독교를 모독한다고 비웃는다. 욕과 비웃음, 과연 누가 이길 것인가?
그런데 이런 갈등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닌 듯 하다. 성서를 들여다보면 2천 년 전부터 이미 이런 갈등이 존재했다. 고린도교회가 그랬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방언이나 예언을 중시하는 열광주의자들이 있었던 듯 하고, 그로 인해 교회가 분열되고 갈등이 있었던 듯하다. 사실 고린도전서는 이런 상황에 대한 바울의 해법으로 기록된 편지이기에 오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어쨌든 성령에 관한 이야기는 뜨거운 감자와 같다. 성서가 성령에 대해 이렇다 할 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면 우리가 성령에 관한 성서의 이야기 아래에 흐르고 있는 이야기 되지 않는 전제를 모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떤 학자는 성령을 다양한 얼굴이라고 표현했는데, 이제 그 얼굴들을 들여다보자. 히브리성서에서부터 복음서, 그리고 바울에게까지 이르면 중요한 얼굴들은 익히게 되지 않을까 싶다.


1. 성령, 그 편협한 이름
 

2013년 11월 20일 수요일

성령을 받으라!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래서 '성령받음'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관해 써보려고 합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이전에 성령이 무엇인지에 관해 정리를 좀 해 보려구요.

헌데, 문제가 좀 있습니다. '성령이 무엇인가?' 이 질문에 성경이 명쾌하게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큰 그림을 한 번 그려보겠습니다.

1. 현재의 '성령받음'에 관한 논의는 근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논의가 성령받음의 '현상'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현상이 성령을 받은 것인가 하는 것이 주된 논점이라는 말입니다. 방언을 하느냐 마느냐, 은사가 있느냐 없느냐, 열매가 맺히느냐 아니냐 등의 논의는 모두 성령 받음을 입증할 수 있는 '현상'에 관한 것들입니다.

2. 하지만 그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중요한 것은 성령받음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왜 주셨고,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 하나님의 새창조와 구속의 역사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의미가 빠진 현상에 관한 탐구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3. 먼저, 성령이 무엇인가 큰 틀을 잡고 가야겠습니다. 톰 라이트는 창1:2절을 기초로 성령을 '창조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현존과 능력'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성령의 인격성과 비인격성을 동시에 포함하는 참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성령을 '하나님의 기운'이라고 표현하기 좋아하는데, '현존과 능력'을 한 단어로 표현해 주는 적절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2013년 11월 16일 토요일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바울의 글에는 언제나 '믿음, 소망, 사랑'이 같이 나타납니다. 바울이 이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은 일상적 언어습관이 아닙니다. 바울은 매우 조심스럽게 이 단어들을 선택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단어들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매우 소상히 밝혀줍니다. 특별히,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관통하고 있는 그림에는 '의로워짐과 구원'의 진정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글은 그 의미들을 풀어 쓴 것입니다. 특별히 로마서 5장과 8장을 중심으로 의로워짐과 구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상관관계를 풀어봤습니다.

1.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롬5:1).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과 그렇지 않은 자를 나누실텐데, 믿음으로 그 판결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판결이 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완료형입니다.

2. 여기에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믿음으로서(롬4:24) ‘율법의 행위’와 대조를 이루는 말입니다.

3. 율법의 행위란, '선을 행하는 삶의 방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으로서 자동적으로 얻게된 ‘외모’를 의미합니다. 유대인이라는 혈통으로 태어나,  부모에 의해 할례를 받고, 안식일에 회당에서 율법 낭독을 듣는 등의 ‘자동적으로 얻게 된 자격’을 의미합니다. 즉 율법의 행위란 '선행'이 아니라 ‘좋은 외모’를 말하는 것이지요.

4. ‘율법의 행위’에 반하는 ‘믿음’이란, 구원에 대한 확신이나 경건한 생활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이라는 자격에 반해 ‘아무 자격 없어도’ 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오직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믿음 하나만 있으면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2013년 10월 16일 수요일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기독교 복음

* 이 글은 현재 주류 기독교에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 자리잡고 있는 교리적 위치를 살펴보고, 그것이 과연 성경에 말하는 기독교 복음을 잘 표현해 주고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글이 전개되겠지만 궁극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바는 내가 이해하는 '기독교 복음의 본질'에 관한 것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1.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는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역사적 의구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향해 어떤 이들은 '나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는다' 라고 자신의 신앙심을 표현합니다. 참 믿음 있어 보이는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는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설령 그렇게 믿는다 해도 말이지요.

모든 텍스트는 해석 되어야만 우리의 인식체계 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어떤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미 우리는 무의식 중에 우리의 해석적 틀 안에서 그 텍스트를 해석하고 있는 것이지요. 해석의 과정 없이 텍스트가 우리의 인식 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글자를 먹는다고 그것이 이해되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믿는다고 생각하더라도, 알게 모르게 우리는 이미 성경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모든 것이 사실은 우리의 기본 지식, 문화, 가치, 언어적 습성 등을 통해 해석된 것이지요.

2013년 3월 31일 일요일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나?

인간의 삶을 살았던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으로 고백되었을까?
제자들과 초기 교회는 어떻게 자신들이 믿고 따르던 예수를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인식하게 되었을까?

이 글은 "하나님의 열심에 사로잡혀 있던 한 사람을 그의 제자들은 어떻게 신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나?" 하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쉽게 말해 '예수의 신성'이 제자들에게 받아들여지게 된 과정을 간략하게 재구성해 보는 것입니다.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논쟁이나, 삼위일체에 관한 것은 논외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는 문구는 예수를 당연히 신적 존재로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서 밝혀지듯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신적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회복할 '메시아'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대리자인 '이스라엘의 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