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내 설교 동영상을 피드백 차원에서 봅니다.
처음 내 설교 동영상을 봤을 때, 얼마나 민망하고 낯 뜨거웠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이젠 몇 번 보니 그나마 봐줄 만 합니다.
민망해도 종종 봐야 설교에 도움이 됩니다.
종종 지난 일들을 생각하면 후회가 되고 낯이 뜨거워집니다.
왜 그렇게밖에 하지 못했을까 참 부끄럽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돌아보다 보면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2010년 9월 27일 월요일
2010년 9월 25일 토요일
화분(花盆)
사무실 책상에 화분이 하나 있습니다.
'행복나무' 라는 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요녀석이 몇주 전부터 성장을 멈추었습니다.
가까이에 있던 옆 자리 목사님의 스탠드가 멀찌기 떨어져 버린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집에 있던 스탠드를 가져다가 빛을 비춰주었습니다.
실망시키지 않고 몇 주 멈추었던 성장을 다시 시작해 저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행복나무' 라는 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요녀석이 몇주 전부터 성장을 멈추었습니다.
가까이에 있던 옆 자리 목사님의 스탠드가 멀찌기 떨어져 버린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집에 있던 스탠드를 가져다가 빛을 비춰주었습니다.
실망시키지 않고 몇 주 멈추었던 성장을 다시 시작해 저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0년 9월 23일 목요일
요한복음연구 9
요한복음 3장 14-21절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요한복음은 화음이 잘 들어간 노래와 같다. 서로 다른 파트의 음들이 함께 울리며 하나의 노래를 만들어 내듯이 요한복음은 하나의 단어나 사건을 여러 파트의 음색으로 표현해 내고 그것으로 하나의 노래를 만든다.
인자가 들려야 한다는 노래는 예수의 십자가라는 멜로디에 인자의 신원과 영광이라는 화음이 오버랩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능동적 소그룹
각 교회마다 구역예배가 현실적으로 어려워져 가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교회내 소그룹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지만
셀교회를 지향한다고 명시적으로 광고하는 교회들조차 안정적인 소그룹 운영이 어려워지고 있다.
핵심적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모든 사람들이 교회내 소그룹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지만
셀교회를 지향한다고 명시적으로 광고하는 교회들조차 안정적인 소그룹 운영이 어려워지고 있다.
핵심적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2010년 9월 19일 일요일
목사의 처신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부임하여 청년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얻으며 교회를 급성장시킨 ㅅ교회 담임목사가 성추행 스캔들에 휩싸였다.
목회 초기부터 여자 청년들에 대한 처신에 대해 말이 많았다고 한다. 결국 터질게 터졌다는 반응이 많다.
개인적으로 그 목사님이 이해 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럴수도 있겠다 싶다. 이번 스캔들의 양상을 볼 때 조금은 악성 스캔들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는가?
사실, 그 목사님 뿐만 아니라 많은 목사님들이 크고 작은 스캔들로 문제를 일으킨다.
참 생각이 많아진다.
목사로서 처신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여자 성도들과 조금 친해지다 보면 여자 성도들의 태도나 반응이 조금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존경인지, 여자로서의 사적인 감정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내 자신이 그런 반응들을 은근히 즐기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는 것이다.
목회 초기부터 여자 청년들에 대한 처신에 대해 말이 많았다고 한다. 결국 터질게 터졌다는 반응이 많다.
개인적으로 그 목사님이 이해 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럴수도 있겠다 싶다. 이번 스캔들의 양상을 볼 때 조금은 악성 스캔들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는가?
사실, 그 목사님 뿐만 아니라 많은 목사님들이 크고 작은 스캔들로 문제를 일으킨다.
참 생각이 많아진다.
목사로서 처신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여자 성도들과 조금 친해지다 보면 여자 성도들의 태도나 반응이 조금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존경인지, 여자로서의 사적인 감정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내 자신이 그런 반응들을 은근히 즐기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연구 8
요한복음 3장 1-15절
영으로 난 사람
요한복음은 계속해서 표적이란 주제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한 유대인 지도자 바리새인 니고데모가 예수께로 와서 예수의 표적에 대하여 말한다. 예수의 표적이 예수를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으로 증명한다는 고백이다.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는 인자가 모세의 놋뱀과 같이 들려야 할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으로 마무리되며(3:14-15) 표적에 대한 이야기를 강화한다. 이 대화에서 예수의 표적은 궁극적으로 그의 ‘들림’으로 귀결된다.
요한복음은 이중적 의미를 지닌 단어 사용을 자주 사용하는데
2010년 9월 17일 금요일
민주적 교회 운영? 성경연구의 민주화!
교회 개혁을 외치는 교회마다 '민주적인' 교회 운영을 주장한다.
민주적으로 교회를 운영하기 위해 대부분의 교회들이 교회 정관을 만든다.
기존의 교회에서 목회자에게 쏠렸던 권한과 책임을 분산시키고
목회자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는데 정관의 초점이 맞춰진다.
그래서 목회자와 장로의 임기를 정하고
재신임 투표를 통해 임기를 연장하는 것이 대부분의 정관이 가지고 있는 핵심 사항이다.
그런데 과연 민주적 교회 운영이 바른 것인지, 혹은 좋은 것인지는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민주적으로 교회를 운영하기 위해 대부분의 교회들이 교회 정관을 만든다.
기존의 교회에서 목회자에게 쏠렸던 권한과 책임을 분산시키고
목회자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는데 정관의 초점이 맞춰진다.
그래서 목회자와 장로의 임기를 정하고
재신임 투표를 통해 임기를 연장하는 것이 대부분의 정관이 가지고 있는 핵심 사항이다.
그런데 과연 민주적 교회 운영이 바른 것인지, 혹은 좋은 것인지는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요한복음연구 7
요한복음 2장 23-25절
사람을 아시는 예수
유월절에 있었던 예수의 표적은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하는 효과를 낳았다(2:23). 이것이 요한복음이 노리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지속적으로 예수의 표적을 보여주고 그 표적은 유일한 목적, 즉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메시아이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 하려는데 봉사한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었지만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믿지 않았다(2:24). 또 예수께서는 사람을 알기 위하여 사람의 증언을 받을 필요가 없다(2:25).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직접 아시기 때문이다. 이 말들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2010년 9월 15일 수요일
요한복음연구 6
요한복음 2장 13-22절
이 성전을 헐라
소위 ‘성전정화’ 사건은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될 만큼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다른 음색으로 이 사건을 연주한다.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이 사건이 일어난 시점인데 공관복음은 예수 사역의 막바지에 일어난 것으로, 요한복음은 사역의 초반에 일어난 사건으로 그리고 있다.
공관복음에 나타난 성전 사건은 세 복음서 모두 동일한 주제를 보여준다. 핵심은 예수께서 열매 없는 성전을 향하여 멸망을 선언하신 것이다. 유대적 소망의 가장 핵심으로서 성전의 권위는 절대적이었지만 예수께서는 그 성전을 향하여 멸망을 선언하셨고 이것이 예수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막14:58, 15:29).
공관복음에서 성전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복음서의 절정에 성전에서 일어난 사건이 있고 예수의 모든 사역이 마치 성전에서의 대결을 준비하기 위한 것인 듯한 느낌을 받는다. 결국 예수께서는 성전의 멸망을 예고하셨고(막13:1-2) 그 이유로 처형 당하셨다.
공관복음에서의 핵심은 이것이다. 거기에는 성전을 종교적으로 정화하겠다거나 사회적으로 개혁하겠다는 의도가 없다. 오히려 핵심은 성전이 가지고 있던 거대한 기득권과 배타적 소망의 철저한 몰락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로운 소망, 하나님의 나라가 싹트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성전사건은 그 의미가 급격하게 축소된다. 요한복음에는 이 사건 이후에 공관복음과 같은 여파가 없다. 아무런 후폭풍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 사건은 여기에서 일단락되고 이후에도 예수는 자연스럽게 성전에 드나들었다7:28, 8:2). 성전 사건이 곧장 예수의 죽음으로 이어진 공관복음에 비할 때 이 사건은 급격하게 축소되었다.
요한복음의 성전사건에서도 예수의 성전 부정은 변함없이 핵심적이다. 그러나 핵심적 초점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맞춰져 있다. 성전이 무너지고 삼일 만에 다시 일으켜질 것인데 이는 예수의 육체에 대한 상징이다(2:20-21). 제자들이 이 말의 의미를 깨달은 시점이 예수의 부활 이후라는 언급은 이 사건이 말하려고 하는 것이 예수의 부활이라는 것에 대한 분명한 증거이다.
요한복음은 이 성전사건과 포도주 기적 사건을 1장 51절에 대한 연속선상 안에서 제시한다. 하늘에 있는 인자, 즉 부활하여 그 정당성과 의로움이 입증된 인자에 대한 초보적 표적과 행위를 보여주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포도주 기적과 성전사건은 동일한 주제 아래 묶여 있다. 인자의 신원, 예수의 영광, 즉 부활이라는 굵은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부활을 통해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는 것처럼 성전의 재건립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다. 더 이상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을 담지한 하나님 임재의 장소가 아니다. 성전은 무너질 것이고 하나님의 현존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말씀이신 예수를 통해 계시된다. 이것이 성전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는 요한복음의 진지한 메시지이다.
요한복음연구 5
요한복음 2장 11절
예수의 영광
요한복음은 영광의 책이라 불릴 만하다. 공관복음이 겉보기에 예수의 고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분명히 요한복음은 예수의 영광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요한복음에는 영광(헬. 독사)이라는 명사형이 19회, 영광 받다(헬. 독사조)는 동사형이 22회 사용되어 신약성경 중 가장 많이 쓰였다.
요한복음의 영광에 대한 강조는 공관복음을 고난의 복음서로, 요한복음을 영광의 복음서로 보게 만든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영광이 그의 고난, 즉 죽음과 부활에 철저하게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죽음 앞에서 그의 영광의 때가 가까웠다고 말한다(12:23).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의 영광이 드러났다는 것이 요한복음의 중심 주제이다. 특별히 죽음이 예수의 영광과 관련하여 부각되는데(12:24) 그의 죽음과 따르는 부활을 통해 그의 영광이 드러났다. 요한복음은 영광의 복음서이지만 동시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철저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창세전부터 아버지 품속에 있던 영광(1:14, 17:5)이 예수의 첫 표적을 통해 세상에 드디어 드러났다(2:11). 본래 하나님의 영광이었던 예수의 영광은(17:22) 예수의 사역을 통해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17:4). 그리고 예수의 사역은 궁극적으로 그의 죽음과 부활로 귀결된다(7:39, 12:16).
예수의 첫 표적을 통해 예수의 영광이 드러났다는 요한복음의 첫 번째 보도는 그의 첫 표적이 그의 부활에 대한 암시라는 것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첫 표적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화 되듯이 예수의 부활을 통해 근본적인 변화가 창조세계 안에 있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고 이는 궁극적으로 예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결정적 사건이 된다고 보도한다(2:11).
그렇다면 예수의 영광이란 무엇인가? 예수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란 그분의 임재와 현존에 대한 강력한 상징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개념은 특별히 성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성전에 거하시는 하나님, 성전에서 그 위엄을 나타내시며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요한복음은 성전에 임재한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다른 영광을 말하고 있다. 본래부터 있던 말씀이신 예수께서 임재하셨다(1:14). 하나님의 현존이 다른 무엇이 아닌 예수를 통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안에 영광이 있었다는 말씀은(1:14) 철저하게 하나님의 임재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첫 번째 표적을 통해 예수의 영광, 즉 하나님의 현존이 나타났다는 보도에 이어 성전에서의 예수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공관복음이 예수 사역 말미에 그토록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성전사건을 요한복음이 사역의 가장 초기에 배치한 것은 우연이나 부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요한복음은 예수의 영광, 하나님의 현존을 말하면서 피해갈 수 없는 ‘성전’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결론인즉, 더 이상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 임재의 장소일 수 없다는 것이고 그 자리를 예수께서 직접 대신하실 것이라는 선언이다.
예수의 표적은 하나님의 현존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포도주 기적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기적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현존을 표현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표적은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현존을 보도록 우리를 초청한다.
2010년 9월 12일 일요일
요한복음연구 4
요한복음 2장 1-12절
물을 포도주로
요한복음이 첫 번째 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혼인잔치 기사는 공관복음의 이적들과 비교할 때 매우 독특하다.
첫째는 요한복음이 표현하는 ‘표적’이라는 용어에서 공관복음과 구별된다. 공관복음이 예수의 기적을 하나님의 기이한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과 달리 요한복음은 예수의 모든 기적을 ‘표적’으로 지칭한다.
궁극적 진리인 예수에 대한 증언으로서 요한복음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에서 볼 때(20:30) 요한의 ‘표적’ 사용은 그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 또한 ‘봄’을 통한 예수 증언이 요한복음이 지속적으로 끌고 가는 중심 주제임을 생각할 때에도 표적은 요한복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기사가 공관복음과 구별되는 두 번째는 기적의 특성에 있다. 공관복음의 기적은 예외 없이 사람과 관련이 있다. 사람을 고치고, 사람을 먹이고,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부르고,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한다. 그러나 본문의 혼인잔치 기적은 그런 것과 상관이 없어 보인다. 특별히 이 기적을 예수의 첫 번째 표적으로 강조하는 면(2:11)에서 매우 특별하다.
기적의 핵심은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이다. 어머니의 역할이나 하인의 믿음, 또는 잔치의 흥겨움이나 포도주의 맛 등은 기적의 중심이 아니다. 모든 중심에는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이 있고 그 과정에 율법에 의한 정결예식을 위한 항아리가 있었다.
물이라는 상징물 안에 정결법, 즉 율법이 존재하고 있다면 포도주 안에는 예수로 말미암은 부활의 능력이 있다. 물이 하나님을 향한 유대적 체계와 소망을 상징한다면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한다. 특별히 항아리가 여섯 있었는데(2:6) 여섯은 유대 세계 안에서 불완전한 숫자를 의미한다. 이는 불완전한 유대적 소망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 표적은 3일 되던 날에 이루어졌다(2:1). 이는 분명히 예수의 부활에 대한 암시이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일곱 번째 표적으로 분명하게 그의 부활을 보여주고 있고 첫 번째 표적에 그 부활을 암시하고 있다. 썩어질 육체가 썩지 아니할 새로운 육체로 변화 되었듯이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이다.
부활의 상징으로서의 포도주 변화 사건은 또한 예수의 전체 선교사역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예수의 부활은 망가진 자기의 땅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예수의 부활을 통하여 세상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된다. 요한복음이 그리는 예수의 모든 사역은 부활에 집중되어 있고 그 안에서 모든 피조물은 진정한 포도주로 변화하게 된다. 좁게는 정결법 안에 사는 유대인이고 넓게는 창조세계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다.
또한 본문에는 공관복음과의 분명한 차이점 하나가 더 등장한다. 바로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에 대한 언급이다. 공관복음에는 예수가 어머니나 형제들과 공생애 기간에 함께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 오히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가족을 배척하거나(막3:21) 예수를 만나러 온 어머니와 동생들의 청을 거절한 기사만 등장할 뿐이다(막3:31-35).
공관복음 전승에 비교하여 요한복음에는 큰 변화가 있다. 어머니의 지속적인 등장(2:1, 2:12, 19,27)과 형제들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2:12)는 공관복음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공관복음에는 예수께서 자신의 가족뿐만 아니라 가족 자체에 적대적인 모습이 많이 나타난다(마10:35-37, 막10:29-30).
이러한 이유는 요한복음이 처해있던 공동체적 상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공관복음서보다 비교적 후기에 기록되었고 기록된 장소가 에베소 근처일 것이라는 추정, 즉 본토 유대인들이 아니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기록된 복음서라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앙의 표지로 작용했던 대표적 상징들은 율법과 성전, 언약의 땅과 혈통을 이어주는 가족 등이었다. 공관복음은 예수께서 이러한 표지들을 뒤집고 재정의 하거나 무력화 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율법의 권위를 넘어서 말하고(마5:21) 성전을 무력화 시켰으며(막11:15-18, 막13:1-2) 땅의 소산으로 기뻐하는 부자를 비웃으셨다(눅12:13-21).
가족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에 대한 믿음과 배타적 지위를 무너트리고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는 새로운 가족체계를 선언하셨다(막3:31-35). 유대적 혈통체계에 대한 예수의 뒤집기, 이것이 예수께서 가족에 대하여 적대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공관복음의 이유이다.
AD 70년 성전의 멸망과 함께 제2성전기 유대교는 바리새파 유대교로 전환되며 그 중심을 율법이 차지하게 된다. 상대적으로 성전에 대한 관심이나 땅, 혈통체계에 대한 중요성은 줄어들게 되고 율법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특별히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더욱 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상황을 매우 잘 반영하고 있다. 공관복음이 예수의 핵심적인 행동이 성전과의 대립이었다고 보도하는 반면 요한복음은 성전과의 대립은 나타나지 않는다. 예수사역 초기에 나타난 성전 사건은 그 핵심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맞춰져 있을 뿐이다(요2:21). 공관복음이 땅과 그로 말미암은 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과 달리 요한복음은 부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에 대한 차이도 같은 맥락이다. 유대교 내에서 민족적 혈통에 대한 강조가 희미해지고 율법에 모든 초점이 맞춰지는 상황에서, 예수의 동생들이 기독교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하는 상황에서 요한복음은 예수의 가족에 대한 부정적 언급을 제거하고 유대교와의 모든 대립각을 율법에 집중시킨다(요1:17, 1:45, 5:39, 7:19-24, 8:4-11).
물을 포도주로
요한복음이 첫 번째 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혼인잔치 기사는 공관복음의 이적들과 비교할 때 매우 독특하다.
첫째는 요한복음이 표현하는 ‘표적’이라는 용어에서 공관복음과 구별된다. 공관복음이 예수의 기적을 하나님의 기이한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과 달리 요한복음은 예수의 모든 기적을 ‘표적’으로 지칭한다.
궁극적 진리인 예수에 대한 증언으로서 요한복음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에서 볼 때(20:30) 요한의 ‘표적’ 사용은 그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 또한 ‘봄’을 통한 예수 증언이 요한복음이 지속적으로 끌고 가는 중심 주제임을 생각할 때에도 표적은 요한복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기사가 공관복음과 구별되는 두 번째는 기적의 특성에 있다. 공관복음의 기적은 예외 없이 사람과 관련이 있다. 사람을 고치고, 사람을 먹이고,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부르고,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한다. 그러나 본문의 혼인잔치 기적은 그런 것과 상관이 없어 보인다. 특별히 이 기적을 예수의 첫 번째 표적으로 강조하는 면(2:11)에서 매우 특별하다.
기적의 핵심은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이다. 어머니의 역할이나 하인의 믿음, 또는 잔치의 흥겨움이나 포도주의 맛 등은 기적의 중심이 아니다. 모든 중심에는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이 있고 그 과정에 율법에 의한 정결예식을 위한 항아리가 있었다.
물이라는 상징물 안에 정결법, 즉 율법이 존재하고 있다면 포도주 안에는 예수로 말미암은 부활의 능력이 있다. 물이 하나님을 향한 유대적 체계와 소망을 상징한다면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한다. 특별히 항아리가 여섯 있었는데(2:6) 여섯은 유대 세계 안에서 불완전한 숫자를 의미한다. 이는 불완전한 유대적 소망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 표적은 3일 되던 날에 이루어졌다(2:1). 이는 분명히 예수의 부활에 대한 암시이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일곱 번째 표적으로 분명하게 그의 부활을 보여주고 있고 첫 번째 표적에 그 부활을 암시하고 있다. 썩어질 육체가 썩지 아니할 새로운 육체로 변화 되었듯이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이다.
부활의 상징으로서의 포도주 변화 사건은 또한 예수의 전체 선교사역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예수의 부활은 망가진 자기의 땅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예수의 부활을 통하여 세상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된다. 요한복음이 그리는 예수의 모든 사역은 부활에 집중되어 있고 그 안에서 모든 피조물은 진정한 포도주로 변화하게 된다. 좁게는 정결법 안에 사는 유대인이고 넓게는 창조세계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다.
또한 본문에는 공관복음과의 분명한 차이점 하나가 더 등장한다. 바로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에 대한 언급이다. 공관복음에는 예수가 어머니나 형제들과 공생애 기간에 함께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 오히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가족을 배척하거나(막3:21) 예수를 만나러 온 어머니와 동생들의 청을 거절한 기사만 등장할 뿐이다(막3:31-35).
공관복음 전승에 비교하여 요한복음에는 큰 변화가 있다. 어머니의 지속적인 등장(2:1, 2:12, 19,27)과 형제들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2:12)는 공관복음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공관복음에는 예수께서 자신의 가족뿐만 아니라 가족 자체에 적대적인 모습이 많이 나타난다(마10:35-37, 막10:29-30).
이러한 이유는 요한복음이 처해있던 공동체적 상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공관복음서보다 비교적 후기에 기록되었고 기록된 장소가 에베소 근처일 것이라는 추정, 즉 본토 유대인들이 아니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기록된 복음서라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앙의 표지로 작용했던 대표적 상징들은 율법과 성전, 언약의 땅과 혈통을 이어주는 가족 등이었다. 공관복음은 예수께서 이러한 표지들을 뒤집고 재정의 하거나 무력화 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율법의 권위를 넘어서 말하고(마5:21) 성전을 무력화 시켰으며(막11:15-18, 막13:1-2) 땅의 소산으로 기뻐하는 부자를 비웃으셨다(눅12:13-21).
가족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에 대한 믿음과 배타적 지위를 무너트리고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는 새로운 가족체계를 선언하셨다(막3:31-35). 유대적 혈통체계에 대한 예수의 뒤집기, 이것이 예수께서 가족에 대하여 적대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공관복음의 이유이다.
AD 70년 성전의 멸망과 함께 제2성전기 유대교는 바리새파 유대교로 전환되며 그 중심을 율법이 차지하게 된다. 상대적으로 성전에 대한 관심이나 땅, 혈통체계에 대한 중요성은 줄어들게 되고 율법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특별히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더욱 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상황을 매우 잘 반영하고 있다. 공관복음이 예수의 핵심적인 행동이 성전과의 대립이었다고 보도하는 반면 요한복음은 성전과의 대립은 나타나지 않는다. 예수사역 초기에 나타난 성전 사건은 그 핵심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맞춰져 있을 뿐이다(요2:21). 공관복음이 땅과 그로 말미암은 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과 달리 요한복음은 부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에 대한 차이도 같은 맥락이다. 유대교 내에서 민족적 혈통에 대한 강조가 희미해지고 율법에 모든 초점이 맞춰지는 상황에서, 예수의 동생들이 기독교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하는 상황에서 요한복음은 예수의 가족에 대한 부정적 언급을 제거하고 유대교와의 모든 대립각을 율법에 집중시킨다(요1:17, 1:45, 5:39, 7:19-24, 8:4-11).
2010년 9월 10일 금요일
요한복음연구 3
요한복음 1장 35-51절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두 번에 걸쳐 제자들을 모으는 요한복음의 기사는 요한복음만의 독특한 강조점을 가지고 진행되며 2장부터 시작되는 예수의 본격적인 사역에 대한 준비를 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최초의 제자그룹은 요한의 제자들 중 이탈한 무리로 형성되었고 그 후에 다른 제자그룹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제자그룹 형성과정을 소개하며 요한복음은 복음서의 핵심적 주제인 ‘보고 믿는 것’의 기초를 놓는다. 35절에서 51절까지 ‘보다’는 단어를 10회 이상 사용하며 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요한복음의 기본적인 구성인 7가지 표적과 그 표적을 보고 믿음을 갖도록 요청하는 요한복음의 전체적 구성에 부합한다.
예수를 ‘보라’는 요청은 세례요한에게서 시작한다(1:29, 36). 그 ‘봄’은 세례요한의 제자였고 후에 예수의 첫 제자그룹이 된 베드로와 안드레를 거쳐 두 번째 제자그룹에서 절정을 이루며 ‘더 큰 일을 보리라’는 예수의 확신에 찬 언급으로 마무리된다(50절). 요한복음이 이어지는 기사에서(2:1-11) 예수의 첫 번째 표적을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보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서론에서 이미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듯이 창조되지 않은, 본래부터 있던 질서인 예수의 정체성을 보여주기 위해 보라고 요청하고 있다.
요한복음이 보여주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1:34) 메시아이며(1:41). 이스라엘의 왕이다(1:49). 하나님의 아들은 후기 삼위일체의 한 위격으로서의 개념이 아니라 유대적 개념으로 메시아를 의미한다. 예수의 처형에 대한 죄목이 유대인의 왕을 참칭한 것이었다는 보도와 유사하게 본문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묘사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아로 오셨다. 그 메시아는 자기 땅에 오셔서(1:11) 어둠을 밝히고 상함을 회복시키며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신다. 이 예수는 율법과 선지자들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단순한 예언의 성취가 아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의 절대적 기준인 율법과 선지자가 이제 예수로 대체됨을 의미한다. 모세로 말미암은 기존의 절대적 질서는 이스라엘의 참된 왕 예수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예수에 대한 또 다른 증언은 ‘어린양’이다. 이는 공관복음서에는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서 요한복음의 독특한 은유이다. 요한복음은 예수를 어린양으로 그리며 예수의 죽음과 연관시킨다. 공관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은 예수의 죽음이 유월절 전날, 곧 양 잡는 날에 이루어진 일로 보도하며(18:28) 예수의 어린양 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공관복음은 예수께서 유월절 당일 새벽에 잡혀 그날 처형된 것으로 보도한다).
이는 예수의 정체성을 그의 죽음과 부활에 직접적으로 연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유월절이 꿰고 있는 신학의 흐름은 출애굽에서 초기 기독교인들의 새창조까지 이어진다. 첫째 유월적은 직접적으로 출애굽을 기념했고 둘째 로마의 속박 아래 유월절은 하나님의 이스라엘 신원과 회복을 소망하게 했고 셋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회복을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연결시켰다. 예수를 유월절 양으로 표현하는 요한복음은 이러한 사상적 흐름 속에서 볼 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진정한 세계의 새 창조를 그리고 있다.
이것은 51절에 표현된 인자전승에 의해서도 분명해 진다. 다니엘 7장 13절에 나타난 인자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기는 하지만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앞으로 인도된다는 묵시적 그림은 이 세상의 어둠을 고치고 새롭게 하시며, 이스라엘을 신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나다나엘과의 대화에서 진정으로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이 부활을 통한 인자의 신원, 그리고 이스라엘의 진정한 회복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례요한의 증언에서 시작된 ‘보라’는 요청은 나다나엘과의 대화에서 ‘더 큰 일을 보리라’는 예수의 약속으로 마무리된다. 이어지는 요한복음의 본론(2:1~20:29)은 예수께서 보여주신 더 큰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7개의 표적과 의미들을 통해 예수의 본질을 보여주며 마지막 표적인 부활을 통해 인자가 하나님에 의해 신원되는 것을 그려낸다(1:51). 요한복음은 예수 안에 빛, 곧 생명이 있음을 믿고 진정한 왕이신 예수 안에서 자유를 누리도록 우리를 초청한다.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두 번에 걸쳐 제자들을 모으는 요한복음의 기사는 요한복음만의 독특한 강조점을 가지고 진행되며 2장부터 시작되는 예수의 본격적인 사역에 대한 준비를 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최초의 제자그룹은 요한의 제자들 중 이탈한 무리로 형성되었고 그 후에 다른 제자그룹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제자그룹 형성과정을 소개하며 요한복음은 복음서의 핵심적 주제인 ‘보고 믿는 것’의 기초를 놓는다. 35절에서 51절까지 ‘보다’는 단어를 10회 이상 사용하며 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요한복음의 기본적인 구성인 7가지 표적과 그 표적을 보고 믿음을 갖도록 요청하는 요한복음의 전체적 구성에 부합한다.
예수를 ‘보라’는 요청은 세례요한에게서 시작한다(1:29, 36). 그 ‘봄’은 세례요한의 제자였고 후에 예수의 첫 제자그룹이 된 베드로와 안드레를 거쳐 두 번째 제자그룹에서 절정을 이루며 ‘더 큰 일을 보리라’는 예수의 확신에 찬 언급으로 마무리된다(50절). 요한복음이 이어지는 기사에서(2:1-11) 예수의 첫 번째 표적을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보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서론에서 이미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듯이 창조되지 않은, 본래부터 있던 질서인 예수의 정체성을 보여주기 위해 보라고 요청하고 있다.
요한복음이 보여주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1:34) 메시아이며(1:41). 이스라엘의 왕이다(1:49). 하나님의 아들은 후기 삼위일체의 한 위격으로서의 개념이 아니라 유대적 개념으로 메시아를 의미한다. 예수의 처형에 대한 죄목이 유대인의 왕을 참칭한 것이었다는 보도와 유사하게 본문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묘사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아로 오셨다. 그 메시아는 자기 땅에 오셔서(1:11) 어둠을 밝히고 상함을 회복시키며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신다. 이 예수는 율법과 선지자들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단순한 예언의 성취가 아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의 절대적 기준인 율법과 선지자가 이제 예수로 대체됨을 의미한다. 모세로 말미암은 기존의 절대적 질서는 이스라엘의 참된 왕 예수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예수에 대한 또 다른 증언은 ‘어린양’이다. 이는 공관복음서에는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서 요한복음의 독특한 은유이다. 요한복음은 예수를 어린양으로 그리며 예수의 죽음과 연관시킨다. 공관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은 예수의 죽음이 유월절 전날, 곧 양 잡는 날에 이루어진 일로 보도하며(18:28) 예수의 어린양 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공관복음은 예수께서 유월절 당일 새벽에 잡혀 그날 처형된 것으로 보도한다).
이는 예수의 정체성을 그의 죽음과 부활에 직접적으로 연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유월절이 꿰고 있는 신학의 흐름은 출애굽에서 초기 기독교인들의 새창조까지 이어진다. 첫째 유월적은 직접적으로 출애굽을 기념했고 둘째 로마의 속박 아래 유월절은 하나님의 이스라엘 신원과 회복을 소망하게 했고 셋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회복을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연결시켰다. 예수를 유월절 양으로 표현하는 요한복음은 이러한 사상적 흐름 속에서 볼 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진정한 세계의 새 창조를 그리고 있다.
이것은 51절에 표현된 인자전승에 의해서도 분명해 진다. 다니엘 7장 13절에 나타난 인자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기는 하지만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앞으로 인도된다는 묵시적 그림은 이 세상의 어둠을 고치고 새롭게 하시며, 이스라엘을 신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나다나엘과의 대화에서 진정으로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이 부활을 통한 인자의 신원, 그리고 이스라엘의 진정한 회복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례요한의 증언에서 시작된 ‘보라’는 요청은 나다나엘과의 대화에서 ‘더 큰 일을 보리라’는 예수의 약속으로 마무리된다. 이어지는 요한복음의 본론(2:1~20:29)은 예수께서 보여주신 더 큰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7개의 표적과 의미들을 통해 예수의 본질을 보여주며 마지막 표적인 부활을 통해 인자가 하나님에 의해 신원되는 것을 그려낸다(1:51). 요한복음은 예수 안에 빛, 곧 생명이 있음을 믿고 진정한 왕이신 예수 안에서 자유를 누리도록 우리를 초청한다.
2010년 9월 9일 목요일
요한복음연구 2
요한복음 1장 19-42절
요한의 세례와 증언
1) 예수와 세례요한의 관계
세례요한은 거대한 산과 같은 존재다. 그가 베푼 세례는 예수 사역의 기초가 되었다. 사실, 예수가 세례요한의 제자였고 그의 사역과 같은 맥락에서 예수의 사역이 시작된 것은 매우 분명해 보인다.
공관복음은 예수의 선포가 세례요한의 선포에서 차용된 것임을 보여주고(마태복음)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의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증언, 그리고 요한이 잡힌 후 예수의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증언은 예수가 세례요한의 제자로서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마가복음). 또한 누가는 12번째 사도를 다시 선출하는 과정에서 ‘요한의 세례’로부터 함께 있던 자가 자격이 있음을 말하고 있고(행1:21) 예수의 복음이 요한의 세례 이후로 시작되었음을 말하며(행10:37) 요한과 예수의 밀접한 연관을 보여준다.
요한복음은 이에 대한 또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 첫 번째 그림은 요한이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강력하게 증언하는 그림이고(29절) 다른 하나는 요한의 제자 중 일부가 예수의 제자가 되어 예수 사역의 기초가 되는 그림이다(37절).
세례요한과 예수의 이러한 복음서의 증언들을 종합해 볼 때 전체적인 그림은 꽤 분명해 보인다. 요한의 전무했던 세례사역이 시작되고 예수는 그 운동의 추종자가 되었다. 세례 운동의 계승자로서 일단의 제자 무리가 독립해 나갔고 그 우두머리가 예수였다. 예수는 요한의 세례 운동의 연속적 맥락에서, 동시에 비연속적 맥락에서 세례 운동을 시작했고 이후 기독교는 세례요한을 예수의 선구자로 이해했다.
2) 요한복음이 그리는 세례요한
요한은 서론에 이미 두 번 등장하여 10장까지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지속적인 연관성은 ‘세례’이다. 요한도 세례 사역을 계속 했고 예수도 세례 사역을 진행했다(요3:22). 급기야 예수의 세례가 요한의 세례보다 더 많은 세력을 형성했다고 보도한다(요4:1).
공관복음서가 요한을 예수의 길을 예비하는 엘리야로 묘사하는 것과는 차별되게 요한복음은 철저하게 세례요한을 예수의 증거자로 부각시킨다. 요한에 대한 모든 언급이 예수의 증인으로서 일관성을 보인다. 1:7-8, 1:15, 1:19-36, 3:22-30, 5:33-36, 10:40-41 요한에 대한 기사 모두 예수를 증거 하는 요한의 모습으로 채워져 있다. 공관복음서가 예수의 사역 시점을 세례요한이 옥에 갇혀 사역이 중단된 이후로 보도하며(마4:12, 막1:14) 예수를 세례요한의 후계자로 말하는데 반해 요한복음이 요한과 예수의 동시 사역을 보여주는 것(3:26)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이는 요한복음의 주제와 완전한 통일성을 이룬다. 참 빛, 본래부터 있던 빛에 대한 증언으로서 요한복음은 그 복음의 기원인 세례요한을 그 빛에 대한 증언으로 배치시켜 빛에 대한 증거를 강화한다. 특별히 5:35절은 세례요한을 잠시 켜 있는 등불에 비유함으로서 영원한 빛이신 예수와 대조시킨다. 이는 일시적 질서인 율법이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는 5:39의 말씀과도 동일한 맥락에 서 있다.
일시적 질서인 율법은 예수께 귀속될 때 참 의미를 지니게 된다. 또한 일시적 빛인 세례요한도 예수께로 물꼬를 틀어야 온전한 의미를 지닌다(1:37, 3:28).
요한의 세례와 증언
1) 예수와 세례요한의 관계
세례요한은 거대한 산과 같은 존재다. 그가 베푼 세례는 예수 사역의 기초가 되었다. 사실, 예수가 세례요한의 제자였고 그의 사역과 같은 맥락에서 예수의 사역이 시작된 것은 매우 분명해 보인다.
공관복음은 예수의 선포가 세례요한의 선포에서 차용된 것임을 보여주고(마태복음)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의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증언, 그리고 요한이 잡힌 후 예수의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증언은 예수가 세례요한의 제자로서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마가복음). 또한 누가는 12번째 사도를 다시 선출하는 과정에서 ‘요한의 세례’로부터 함께 있던 자가 자격이 있음을 말하고 있고(행1:21) 예수의 복음이 요한의 세례 이후로 시작되었음을 말하며(행10:37) 요한과 예수의 밀접한 연관을 보여준다.
요한복음은 이에 대한 또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 첫 번째 그림은 요한이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강력하게 증언하는 그림이고(29절) 다른 하나는 요한의 제자 중 일부가 예수의 제자가 되어 예수 사역의 기초가 되는 그림이다(37절).
세례요한과 예수의 이러한 복음서의 증언들을 종합해 볼 때 전체적인 그림은 꽤 분명해 보인다. 요한의 전무했던 세례사역이 시작되고 예수는 그 운동의 추종자가 되었다. 세례 운동의 계승자로서 일단의 제자 무리가 독립해 나갔고 그 우두머리가 예수였다. 예수는 요한의 세례 운동의 연속적 맥락에서, 동시에 비연속적 맥락에서 세례 운동을 시작했고 이후 기독교는 세례요한을 예수의 선구자로 이해했다.
2) 요한복음이 그리는 세례요한
요한은 서론에 이미 두 번 등장하여 10장까지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지속적인 연관성은 ‘세례’이다. 요한도 세례 사역을 계속 했고 예수도 세례 사역을 진행했다(요3:22). 급기야 예수의 세례가 요한의 세례보다 더 많은 세력을 형성했다고 보도한다(요4:1).
공관복음서가 요한을 예수의 길을 예비하는 엘리야로 묘사하는 것과는 차별되게 요한복음은 철저하게 세례요한을 예수의 증거자로 부각시킨다. 요한에 대한 모든 언급이 예수의 증인으로서 일관성을 보인다. 1:7-8, 1:15, 1:19-36, 3:22-30, 5:33-36, 10:40-41 요한에 대한 기사 모두 예수를 증거 하는 요한의 모습으로 채워져 있다. 공관복음서가 예수의 사역 시점을 세례요한이 옥에 갇혀 사역이 중단된 이후로 보도하며(마4:12, 막1:14) 예수를 세례요한의 후계자로 말하는데 반해 요한복음이 요한과 예수의 동시 사역을 보여주는 것(3:26)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이는 요한복음의 주제와 완전한 통일성을 이룬다. 참 빛, 본래부터 있던 빛에 대한 증언으로서 요한복음은 그 복음의 기원인 세례요한을 그 빛에 대한 증언으로 배치시켜 빛에 대한 증거를 강화한다. 특별히 5:35절은 세례요한을 잠시 켜 있는 등불에 비유함으로서 영원한 빛이신 예수와 대조시킨다. 이는 일시적 질서인 율법이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는 5:39의 말씀과도 동일한 맥락에 서 있다.
일시적 질서인 율법은 예수께 귀속될 때 참 의미를 지니게 된다. 또한 일시적 빛인 세례요한도 예수께로 물꼬를 틀어야 온전한 의미를 지닌다(1:37, 3:28).
2010년 9월 8일 수요일
요한복음연구 1
요한복음 1장 1-18절
서론 : 세상의 참된 법칙으로서의 예수
요한복음은 철저하게 유대적인 책이다. 이 사실은 서론인 1~18을 보면 분명하게 나타난다. 서론은 요한복음 전체를 요약하는 역할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적 질서와 완전하게 대조하며 그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서론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율법의 대조이다. 예수는 태초부터 있었고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준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말씀으로 번역된 ‘로고스’라는 단어는 단순한 ‘말’의 개념을 넘어서는 헬라 철학적 개념을 포함한다. 즉, 궁극적 원리, 도, 법칙이라는 개념을 포괄하고 있는 단어이다. 이는 요한복음이 유대적 율법질서와 비교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곧 질서가 창조된 것이 아닌 본래적인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한 단어로 보인다. 율법이라는 인간적 법칙, 모세로 말미암은 세상의 체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창조적 질서, 법칙을 나타내기 위해 요한복음은 예수를 ‘말씀’으로 표현한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세상에 의해 창조된 법칙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법칙 이전에 존재하는 궁극적인 법칙이고 그 법이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요한복음은 창세기적 이미지로 시작해서 창세기적 새 창조로 끝을 맺는다(20:31). 1절의 ‘태초에’는 창세기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만물이 지어졌다는 3절의 표현은 요한복음이 의도적으로 창세기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을 증명해 준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며 빛을 만드셨는데 그 창조세계가 빛을 잃어버리고 어둠 속에 방치되어 있다. 깨어지고 망가진 창조세계, 이것이 요한복음의 시작이다. 새로운 질서가 왔지만 깨어진 창조세계 안에서 사람들은 참 빛을 알아보지 못했다. 요한이 와서 빛에 대하여 증거 하였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은 이제 유대 세계로 구체화 된다. 11절의 ‘자기 땅’은 분명하게 창조의 핵심 안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의미한다. 이는 1:49에 있는 ‘이스라엘의 임금’은 이 말씀의 반영이다.
그러나 본래부터 있던 빛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는 철저하게 유대적 창조 소망과 대치되는 것이다. 이제는 혈통이나 사람의 계보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 백성, 참 창조백성이 되지 못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를 통한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러한 요한복음의 핵심적 주제는 요한복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과 대치시키는 것에서 분명해진다(17절).
여기에서 율법과 은혜는 칭의론에서 말하는 개념을 넘어선다. 사실 칭의론은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왜곡시켜왔다. 율법의 부정적이 측면만을 강조해서 성경이 말하는 참 은혜, 또한 하나님과의 언약으로서의 율법을 오해했다. 여기에서의 율법은 창조세계 안에 있는 이스라엘의 독점적 위치, 그리고 배타성과 관련이 있다. 율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13절), 율법의 계약 백성(17절)이라는 이스라엘의 독자적 지위의 근원으로서의 율법은 한시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본래적인 법칙이나 원리가 아니다.
본래부터 있던 참 말씀, 참 법칙이 우리 가운데 계시되었는데(14절), 모든 사람은 그 법칙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하나님의 자녀라 함은 부활적 존재를 의미한다. 망가진 창조세계에 드리워 있는 어둠을 비추는 빛은 궁극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를 의미한다. 모든 어둠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셔서 참 생명의 빛을 비추시며 창조세계를 회복하시는 예수 안에서 새로워진 존재가 곧 예수를 영접한자,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새 창조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고 자녀를 삼으신다.
서론 : 세상의 참된 법칙으로서의 예수
요한복음은 철저하게 유대적인 책이다. 이 사실은 서론인 1~18을 보면 분명하게 나타난다. 서론은 요한복음 전체를 요약하는 역할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적 질서와 완전하게 대조하며 그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서론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율법의 대조이다. 예수는 태초부터 있었고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준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말씀으로 번역된 ‘로고스’라는 단어는 단순한 ‘말’의 개념을 넘어서는 헬라 철학적 개념을 포함한다. 즉, 궁극적 원리, 도, 법칙이라는 개념을 포괄하고 있는 단어이다. 이는 요한복음이 유대적 율법질서와 비교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곧 질서가 창조된 것이 아닌 본래적인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한 단어로 보인다. 율법이라는 인간적 법칙, 모세로 말미암은 세상의 체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창조적 질서, 법칙을 나타내기 위해 요한복음은 예수를 ‘말씀’으로 표현한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세상에 의해 창조된 법칙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법칙 이전에 존재하는 궁극적인 법칙이고 그 법이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요한복음은 창세기적 이미지로 시작해서 창세기적 새 창조로 끝을 맺는다(20:31). 1절의 ‘태초에’는 창세기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만물이 지어졌다는 3절의 표현은 요한복음이 의도적으로 창세기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을 증명해 준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며 빛을 만드셨는데 그 창조세계가 빛을 잃어버리고 어둠 속에 방치되어 있다. 깨어지고 망가진 창조세계, 이것이 요한복음의 시작이다. 새로운 질서가 왔지만 깨어진 창조세계 안에서 사람들은 참 빛을 알아보지 못했다. 요한이 와서 빛에 대하여 증거 하였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은 이제 유대 세계로 구체화 된다. 11절의 ‘자기 땅’은 분명하게 창조의 핵심 안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의미한다. 이는 1:49에 있는 ‘이스라엘의 임금’은 이 말씀의 반영이다.
그러나 본래부터 있던 빛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는 철저하게 유대적 창조 소망과 대치되는 것이다. 이제는 혈통이나 사람의 계보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 백성, 참 창조백성이 되지 못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를 통한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러한 요한복음의 핵심적 주제는 요한복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과 대치시키는 것에서 분명해진다(17절).
여기에서 율법과 은혜는 칭의론에서 말하는 개념을 넘어선다. 사실 칭의론은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왜곡시켜왔다. 율법의 부정적이 측면만을 강조해서 성경이 말하는 참 은혜, 또한 하나님과의 언약으로서의 율법을 오해했다. 여기에서의 율법은 창조세계 안에 있는 이스라엘의 독점적 위치, 그리고 배타성과 관련이 있다. 율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13절), 율법의 계약 백성(17절)이라는 이스라엘의 독자적 지위의 근원으로서의 율법은 한시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본래적인 법칙이나 원리가 아니다.
본래부터 있던 참 말씀, 참 법칙이 우리 가운데 계시되었는데(14절), 모든 사람은 그 법칙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하나님의 자녀라 함은 부활적 존재를 의미한다. 망가진 창조세계에 드리워 있는 어둠을 비추는 빛은 궁극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를 의미한다. 모든 어둠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셔서 참 생명의 빛을 비추시며 창조세계를 회복하시는 예수 안에서 새로워진 존재가 곧 예수를 영접한자,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새 창조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고 자녀를 삼으신다.
2010년 9월 3일 금요일
카페, 세상과의 소통
상상카페?
저는 교회 개척을 하면 꼭 카페를 하고 싶습니다.
교인들만 찾는 공간이 아닌 교회밖의 행인들이 와서 쉬며 안식할 수 있는 카페 말입니다.
커피를 만들며 함께 커피를 마시며 그렇게 말입니다.
이유를 묻는다면,
우선은 멋져 보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멋'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 때로는 치열하겠지만 그 속에서도 '멋'을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커피를 만들고 일 하는 시간들이 쉽지 않고 고단하겠지만 말입니다.
다음은 교회가 세상과 소통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에서 목사의 역할은 절대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가 세상과 소통하는만큼 교회는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갖게 됩니다.
저는 교회 사무실에 갖혀 있는 목사가 되고싶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루종일 분주하게 여기저기 오가는 목사가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사무실이나 서재에 갇혀 있는 목사는 가슴을 잃어버리기 쉽고 분주하게 일하는 목사는 머리를 잃어버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커피를 나누며 자유롭게 대화하고 서로의 삶을 진솔하게 나눌 수 있는 목사가 되어 진정한 영적 삶을 살고 싶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역동적 능력이 될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나'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내'가 만나는 곳이 제가 생각하는 카페입니다. 또한 만남의 통로뿐만 아니라 세상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도구로서의 카페를 꿈꿉니다.
문턱 한 번 넘기 버거운 종교적 울타리를 치우고 누구나 찾아와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지역사회의 오아시스와 같은, 그런 카페를 꼭 하고 싶습니다.
저는 교회 개척을 하면 꼭 카페를 하고 싶습니다.
교인들만 찾는 공간이 아닌 교회밖의 행인들이 와서 쉬며 안식할 수 있는 카페 말입니다.
커피를 만들며 함께 커피를 마시며 그렇게 말입니다.
이유를 묻는다면,
우선은 멋져 보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멋'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 때로는 치열하겠지만 그 속에서도 '멋'을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커피를 만들고 일 하는 시간들이 쉽지 않고 고단하겠지만 말입니다.
다음은 교회가 세상과 소통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에서 목사의 역할은 절대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가 세상과 소통하는만큼 교회는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갖게 됩니다.
저는 교회 사무실에 갖혀 있는 목사가 되고싶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루종일 분주하게 여기저기 오가는 목사가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사무실이나 서재에 갇혀 있는 목사는 가슴을 잃어버리기 쉽고 분주하게 일하는 목사는 머리를 잃어버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커피를 나누며 자유롭게 대화하고 서로의 삶을 진솔하게 나눌 수 있는 목사가 되어 진정한 영적 삶을 살고 싶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역동적 능력이 될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나'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내'가 만나는 곳이 제가 생각하는 카페입니다. 또한 만남의 통로뿐만 아니라 세상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도구로서의 카페를 꿈꿉니다.
문턱 한 번 넘기 버거운 종교적 울타리를 치우고 누구나 찾아와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지역사회의 오아시스와 같은, 그런 카페를 꼭 하고 싶습니다.
2010년 9월 2일 목요일
교회를 위한 교회?
보시기 참 좋았더라 하시며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파국으로 치달았다.
사람들은 '바벨'탑을 쌓으며 하나님께 대적하고 스스로 이름을 내려고 안달이다.
이 사건 직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시작인 아브라함을 부르셨다는 사실은 참으로 시사적이다.
무너지고 망가진 하나님의 세계를 구원하기 위하여, 새롭게 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부르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사명은 이사야 선지자가 분명하게 말하고 있듯이 '이방의 빛'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둡고 망가진 하나님의 창조세상을 회복시키고 살리는 것이다.
망가진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출되는 것이나 다른 세상으로 옮겨가는 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계획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세계를 회복시키고 살리는 사명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사실, 이스라엘은 그런면에서 볼 때 실패했다. 스스로를 이방의 빛이 아닌 특권자로 이해하면서 하나님을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 가두었다.
교회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하나님의 큰 그림 안에서 교회의 위치는 무엇인가?
죄 많고 더러운 세상에서 탈출하는 비상구인가? 더 많은 사람들을 모아서 지하 벙커로 이끌어가는 구조대원인가?
실패한 이스라엘처럼 교회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특권집단으로 이해하고 다른 세계로의 탈출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은 성경을 아무리 살펴도 너무나 낯선것이다.
망가진 세상을 고치기 위해 이스라엘을 부르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을 고치고 치유하기 위해 부활공동체인 교회를 부르셨다. 이것이 교회의 가장 핵심적인 정체성이다.
요한복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마리아의 입에 '예수를 동산지기로 알았다'는 말을 넣은 것은 참으로 놀랍다.
이 그림에서 에덴동산을 돌보는 아담과 부활하신 예수는 중첩된다. 즉, 부활하신 예수를 하나님의 창조 세계인 에덴을 가꾸는 동산지기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따르는 교회는 '동산지기' 즉,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새롭게 변화시켜가는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탈출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작금의 많은 교회들이 교회의 모든 방향과 프로그램을 '자신의 교회를 위한' 것에 두고 있음을 본다.
오직 교회성장과 교인들의 편의를 위해서 교회가 존재하는 것 같다. 교인은 교회성장이라는 목회자의 영적 탐욕을 만족시켜주고 목회자는 '은혜'라는 말로 빙자된 교인들의 사적 욕심을 채워주는 공생관계가 된 듯 하다.
교회는 다른 세계로의 탈출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창조세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다. 즉, 교회는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특별히 상상교회는 지역사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아래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헌신하는 교회이다.
그러므로 상상교회는 교인들에게 높은 수준의 헌신을 요구하며 분명한 사명감을 요구한다. 교회성장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별 의미가 없다.
사람들은 '바벨'탑을 쌓으며 하나님께 대적하고 스스로 이름을 내려고 안달이다.
이 사건 직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시작인 아브라함을 부르셨다는 사실은 참으로 시사적이다.
무너지고 망가진 하나님의 세계를 구원하기 위하여, 새롭게 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부르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사명은 이사야 선지자가 분명하게 말하고 있듯이 '이방의 빛'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둡고 망가진 하나님의 창조세상을 회복시키고 살리는 것이다.
망가진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출되는 것이나 다른 세상으로 옮겨가는 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계획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세계를 회복시키고 살리는 사명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사실, 이스라엘은 그런면에서 볼 때 실패했다. 스스로를 이방의 빛이 아닌 특권자로 이해하면서 하나님을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 가두었다.
교회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하나님의 큰 그림 안에서 교회의 위치는 무엇인가?
죄 많고 더러운 세상에서 탈출하는 비상구인가? 더 많은 사람들을 모아서 지하 벙커로 이끌어가는 구조대원인가?
실패한 이스라엘처럼 교회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특권집단으로 이해하고 다른 세계로의 탈출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은 성경을 아무리 살펴도 너무나 낯선것이다.
망가진 세상을 고치기 위해 이스라엘을 부르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을 고치고 치유하기 위해 부활공동체인 교회를 부르셨다. 이것이 교회의 가장 핵심적인 정체성이다.
요한복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마리아의 입에 '예수를 동산지기로 알았다'는 말을 넣은 것은 참으로 놀랍다.
이 그림에서 에덴동산을 돌보는 아담과 부활하신 예수는 중첩된다. 즉, 부활하신 예수를 하나님의 창조 세계인 에덴을 가꾸는 동산지기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따르는 교회는 '동산지기' 즉,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새롭게 변화시켜가는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탈출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작금의 많은 교회들이 교회의 모든 방향과 프로그램을 '자신의 교회를 위한' 것에 두고 있음을 본다.
오직 교회성장과 교인들의 편의를 위해서 교회가 존재하는 것 같다. 교인은 교회성장이라는 목회자의 영적 탐욕을 만족시켜주고 목회자는 '은혜'라는 말로 빙자된 교인들의 사적 욕심을 채워주는 공생관계가 된 듯 하다.
교회는 다른 세계로의 탈출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창조세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다. 즉, 교회는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특별히 상상교회는 지역사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아래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헌신하는 교회이다.
그러므로 상상교회는 교인들에게 높은 수준의 헌신을 요구하며 분명한 사명감을 요구한다. 교회성장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별 의미가 없다.
2010년 9월 1일 수요일
부활절 중심의 교회
한국교회 대부분 절기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관심을 가져도 예전 색깔 맞추는 정도다.
가장 화려하게 치뤄지는 절기는 성탄절이고 다음으로 강조되는 절기는 고난주간이다.
부활절은 사순절이나 고난주간의 부록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성경을 들여다 보면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부활절이 있음을 보게된다.
아무리 살펴봐도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의 부활이다.
성탄절은 사실 기독교 신앙에서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마가복음에는 예수의 탄생기사가 아예 나오지 않는다.
부활절은 고난주간의 부록이 아니라 고난주간이라는 전주곡 뒤에 이어지는 위대한 합주곡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부활주일 이후 성령강림주일 전까지 6주는 부활절로 교회의 가장 큰 축제가 되어야 하고 부활을 축하하며 그 안에서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는 주간이 되어야 한다.
특별히 부활주일 이후 한 주간은 가장 큰 축제의 기간이며, 이를 위하여 교회의 프로그램이 준비되어야 한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교회의 사명과 매우 밀접한,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교회의 사역을 지시하기 때문에 부활절 기간에 교회의 사명은 재천명 되어야 하고 새로워져야 한다.
상상교회의 모든 교회력과 절기는 부활절을 중심으로 형성되며 운영될 것이다.
가장 화려하게 치뤄지는 절기는 성탄절이고 다음으로 강조되는 절기는 고난주간이다.
부활절은 사순절이나 고난주간의 부록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성경을 들여다 보면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부활절이 있음을 보게된다.
아무리 살펴봐도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의 부활이다.
성탄절은 사실 기독교 신앙에서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마가복음에는 예수의 탄생기사가 아예 나오지 않는다.
부활절은 고난주간의 부록이 아니라 고난주간이라는 전주곡 뒤에 이어지는 위대한 합주곡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부활주일 이후 성령강림주일 전까지 6주는 부활절로 교회의 가장 큰 축제가 되어야 하고 부활을 축하하며 그 안에서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는 주간이 되어야 한다.
특별히 부활주일 이후 한 주간은 가장 큰 축제의 기간이며, 이를 위하여 교회의 프로그램이 준비되어야 한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교회의 사명과 매우 밀접한,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교회의 사역을 지시하기 때문에 부활절 기간에 교회의 사명은 재천명 되어야 하고 새로워져야 한다.
상상교회의 모든 교회력과 절기는 부활절을 중심으로 형성되며 운영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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