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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12일 일요일

요한복음연구 4

요한복음 2장 1-12절

물을 포도주로


요한복음이 첫 번째 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혼인잔치 기사는 공관복음의 이적들과 비교할 때 매우 독특하다.

첫째는 요한복음이 표현하는 ‘표적’이라는 용어에서 공관복음과 구별된다. 공관복음이 예수의 기적을 하나님의 기이한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과 달리 요한복음은 예수의 모든 기적을 ‘표적’으로 지칭한다.

궁극적 진리인 예수에 대한 증언으로서 요한복음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에서 볼 때(20:30) 요한의 ‘표적’ 사용은 그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 또한 ‘봄’을 통한 예수 증언이 요한복음이 지속적으로 끌고 가는 중심 주제임을 생각할 때에도 표적은 요한복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기사가 공관복음과 구별되는 두 번째는 기적의 특성에 있다. 공관복음의 기적은 예외 없이 사람과 관련이 있다. 사람을 고치고, 사람을 먹이고,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부르고,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한다. 그러나 본문의 혼인잔치 기적은 그런 것과 상관이 없어 보인다. 특별히 이 기적을 예수의 첫 번째 표적으로 강조하는 면(2:11)에서 매우 특별하다.

기적의 핵심은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이다. 어머니의 역할이나 하인의 믿음, 또는 잔치의 흥겨움이나 포도주의 맛 등은 기적의 중심이 아니다. 모든 중심에는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이 있고 그 과정에 율법에 의한 정결예식을 위한 항아리가 있었다.

물이라는 상징물 안에 정결법, 즉 율법이 존재하고 있다면 포도주 안에는 예수로 말미암은 부활의 능력이 있다. 물이 하나님을 향한 유대적 체계와 소망을 상징한다면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한다. 특별히 항아리가 여섯 있었는데(2:6) 여섯은 유대 세계 안에서 불완전한 숫자를 의미한다. 이는 불완전한 유대적 소망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 표적은 3일 되던 날에 이루어졌다(2:1). 이는 분명히 예수의 부활에 대한 암시이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일곱 번째 표적으로 분명하게 그의 부활을 보여주고 있고 첫 번째 표적에 그 부활을 암시하고 있다. 썩어질 육체가 썩지 아니할 새로운 육체로 변화 되었듯이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이다.

부활의 상징으로서의 포도주 변화 사건은 또한 예수의 전체 선교사역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예수의 부활은 망가진 자기의 땅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예수의 부활을 통하여 세상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된다. 요한복음이 그리는 예수의 모든 사역은 부활에 집중되어 있고 그 안에서 모든 피조물은 진정한 포도주로 변화하게 된다. 좁게는 정결법 안에 사는 유대인이고 넓게는 창조세계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다.

또한 본문에는 공관복음과의 분명한 차이점 하나가 더 등장한다. 바로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에 대한 언급이다. 공관복음에는 예수가 어머니나 형제들과 공생애 기간에 함께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 오히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가족을 배척하거나(막3:21) 예수를 만나러 온 어머니와 동생들의 청을 거절한 기사만 등장할 뿐이다(막3:31-35).

공관복음 전승에 비교하여 요한복음에는 큰 변화가 있다. 어머니의 지속적인 등장(2:1, 2:12, 19,27)과 형제들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2:12)는 공관복음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공관복음에는 예수께서 자신의 가족뿐만 아니라 가족 자체에 적대적인 모습이 많이 나타난다(마10:35-37, 막10:29-30).

이러한 이유는 요한복음이 처해있던 공동체적 상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공관복음서보다 비교적 후기에 기록되었고 기록된 장소가 에베소 근처일 것이라는 추정, 즉 본토 유대인들이 아니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기록된 복음서라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앙의 표지로 작용했던 대표적 상징들은 율법과 성전, 언약의 땅과 혈통을 이어주는 가족 등이었다. 공관복음은 예수께서 이러한 표지들을 뒤집고 재정의 하거나 무력화 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율법의 권위를 넘어서 말하고(마5:21) 성전을 무력화 시켰으며(막11:15-18, 막13:1-2) 땅의 소산으로 기뻐하는 부자를 비웃으셨다(눅12:13-21).

가족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에 대한 믿음과 배타적 지위를 무너트리고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는 새로운 가족체계를 선언하셨다(막3:31-35). 유대적 혈통체계에 대한 예수의 뒤집기, 이것이 예수께서 가족에 대하여 적대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공관복음의 이유이다.

AD 70년 성전의 멸망과 함께 제2성전기 유대교는 바리새파 유대교로 전환되며 그 중심을 율법이 차지하게 된다. 상대적으로 성전에 대한 관심이나 땅, 혈통체계에 대한 중요성은 줄어들게 되고 율법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특별히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더욱 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상황을 매우 잘 반영하고 있다. 공관복음이 예수의 핵심적인 행동이 성전과의 대립이었다고 보도하는 반면 요한복음은 성전과의 대립은 나타나지 않는다. 예수사역 초기에 나타난 성전 사건은 그 핵심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맞춰져 있을 뿐이다(요2:21). 공관복음이 땅과 그로 말미암은 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과 달리 요한복음은 부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에 대한 차이도 같은 맥락이다. 유대교 내에서 민족적 혈통에 대한 강조가 희미해지고 율법에 모든 초점이 맞춰지는 상황에서, 예수의 동생들이 기독교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하는 상황에서 요한복음은 예수의 가족에 대한 부정적 언급을 제거하고 유대교와의 모든 대립각을 율법에 집중시킨다(요1:17, 1:45, 5:39, 7:19-24, 8: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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