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장 23-25절
사람을 아시는 예수
유월절에 있었던 예수의 표적은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하는 효과를 낳았다(2:23). 이것이 요한복음이 노리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지속적으로 예수의 표적을 보여주고 그 표적은 유일한 목적, 즉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메시아이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 하려는데 봉사한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었지만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믿지 않았다(2:24). 또 예수께서는 사람을 알기 위하여 사람의 증언을 받을 필요가 없다(2:25).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직접 아시기 때문이다. 이 말들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또한 심령술사로서의 예수, 사람을 직접 알 수 있는 예수는 어떤 의미인가? 기적을 행하는 예수에 대한 초보적 이해와 같이 단순히 그의 능력에 대한 진술인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려 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이 본문이 요한복음의 전체적인 주제인 ‘증언’과 잘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율법은 사람의 행위와 말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증인을 세우고 증언에 의존할 것을 말하고 있다(신19:15). 요한복음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언급하며(8:17) 증거에 관한 주제를 강화한다(5:31-39, 8:13-18). 특별히 사람에 대한 증언의 문제는 철저하게 율법이 요청하는 것이고 율법의 기본 정신이다.
예수가 심령술사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요한복음의 보도는 단지 그의 초능력이 아니라 율법의 범주와 권한을 뛰어넘는 권위가 예수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제는 율법에 의해 정죄를 받고 죽음에 처해질 간음한 여인 기사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8:1-11) 예수는 율법의 지지를 받지 않고 사람들을 알 수 있고 진위를 파악할 수 있다.
이는 1장에 나타난 니고데모와의 대화의 반영을 담고 있다. 예수는 니고데모에 대한 직관을 가지고 계셨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계셨다. 특별히 이 사건은 빌립이 ‘모세의 증언’에 의한 메시아를 나다나엘에게 소개하고 나다나엘이 율법에 의해 ‘나사렛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암시적 표현 뒤에 있었던 일이다.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요한복음은 분명하게 율법과 예수를 대비시키고 있고 2장 25절에서는 그 반영으로 율법에 의한 증언을 넘어서는 예수의 권위를 강조한다.
나다나엘과의 대화에서 더 큰 일을 볼 것이라는 약속을 한 요한복음은 예수의 첫 표적과 성전 사건을 보여주며 예수의 정체성을 증명한다. 이어서 유월절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표적을 보고 믿었다는 본문의 진술(2:23)은 예수의 첫 번째 표적(들)에 대한 소결론의 역할을 한다. 니고데모와의 대화에 대한 반영이 본문에 나타나는 것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예수께서 사람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믿지 않았다는 말은 아직 난제로 남아있다. 많은 성경 번역들이 이 거북스러운 말을 수용하고자 다양한 번역을 시도했다. 몸을 의탁하지 않았다(개역성경), 의지하지 않았다(표준새번역), 마음을 주지 않았다(공동번역) 등 우리말 번역에서도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이 표현은 분명하게 사람들이 예수를 ‘믿은 것’에 대한 대조로 예수께서 사람들을 ‘믿지 않은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믿음은 감정적 대응이나 처신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고 그렇게 읽을 때 의미가 분명해진다.
요한복음에서의 믿음은 감정적 의존의 문제가 아니다. 루터의 이신칭의에 입각한 행위의 반대말은 더더욱 아니다. 요한복음은 철저하게 예수가 누구신가라는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깨달음과 관련하여 믿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즉, 예수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서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믿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인간에게서 어떤 표적이나 증언이 필요하지 않다. 이런 것들을 통한 믿음이나 지식이 필요치 않다. 왜냐하면 이미 마음으로부터 사람들을 아시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진정한 앎이 있기 때문에 사람을 알기 위해 어떤 증언이나 표적이 필요치 않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율법을 능가할 뿐만 아니라 율법을 대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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