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요한복음은 화음이 잘 들어간 노래와 같다. 서로 다른 파트의 음들이 함께 울리며 하나의 노래를 만들어 내듯이 요한복음은 하나의 단어나 사건을 여러 파트의 음색으로 표현해 내고 그것으로 하나의 노래를 만든다.
인자가 들려야 한다는 노래는 예수의 십자가라는 멜로디에 인자의 신원과 영광이라는 화음이 오버랩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또 다른 화음이 함께 노래되고 있는데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장대에 달아야 했던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또 다른 화음이 함께 노래되고 있는데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장대에 달아야 했던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이 그것이다.
요한복음이 전제하고 있는 세계는 분명하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라는 1장 5절의 표현처럼 이 세상은 ‘어두움’이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비방해서 결국은 광야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사람들처럼 요한복음은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심판 아래 처해 있다고 단언한다(3:18).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분명한 이유이다(3:16). 세상은 구원 받아야 할 곳이지 심판 받아야 할 곳이 아니다. 이 말은 세상이 중립의 상태로 존재하지 않고 이미 심판의 상태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생사를 확인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더욱이 불뱀이 나타난 사람들을 물어 죽이는 상황은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그 선택에 따라 판단되어질 중립의 상황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죽음과 심판의 상황 아래 놓여 있었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전제하고 있는 세상의 모습이다.
참된 빛을 잃어버린 세계는 이미 정죄되어 있다(3:1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행하시려는 일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심판 아래 놓여 있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고 세상을 회복시키시려는 것이다.
어둠 가운데 있는 세상을 비추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참여하는 길은 빛으로 나오는 것이다(3:21). 빛으로 나오지 않는 것 자체가 심판 아래 있음에 대한 증거이다. 빛으로 나온다는 것은 예수를 믿은 것(3:16, 18)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누구인가를 알아가는 인식,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이스라엘의 왕이요 메시아 되심을 인식하는 것을 통해 진정한 빛으로, 진리로 나갈 수 있다.
적용
세상은 인간의 상태를 중립으로 본다. 선한 일을 하면 상을 받고, 악한 일을 하면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세상이 이미 심판아래 처해있는, 중립의 상태가 아니라고 선언한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는 중립의 상태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고 빛을 볼 수 있는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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