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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12일 수요일

요한복음연구 17

5:9b-18   (본문보기)

안식일과 노동 금지

베데스다와 같은 세상을 고치고 새롭게 하시는 예수의 표적에 이어 요한복음은 그것이 안식일에 이루어졌고, 그 결과 안식일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고 말한다. 안식일에 관한 논쟁은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 모두에 등장하지만 강조점은 조금 다르다. 공관복음에 나타난 안식일 논쟁의 핵심은 노동의 금지가 ‘무엇(누구)을 위한 것인가’ 하는데 있다면 요한복음의 안식일 논쟁은 ‘노동의 금지’ 자체를 부정해 버린다.

요한복음이 안식일을 향하여 관심을 갖는 주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행위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 완성을 의미하며 그 완성을 기억하는 날이다(출20:11). 노동의 금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창조를 완성하신 하나님의 쉼이며 요한복음은 그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 안식일의 참된 의미라고 말한다(5:17).

전체 이야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새 창조로 그리고 있는 요한복음은 안식일 논쟁도 창조와 쉼이라는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로 연결시킨다.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표적으로서의 베데스다 연못 병자 치유와 함께 안식일 논쟁이 공개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공관복음에서 안식일에 관한 가장 핵심적인 구절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막2:27)’ 라는 것이다. 이는 안식일 안에 있는 노동 금지가 약자를 보호하는 그 본래적 목적(신5:14-15)을 상실하고 오히려 약자를 억압하는 도구로 전락한 현실에 대한 탄식이고 책망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왜곡된 현실을 뒤집으며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다’ 라고 선언하셨다(막2:28).

그러나 요한복음은 안식일 안에 있는 ‘노동 금지’는 안식일의 핵심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시고(5:17) 안식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창조의 완성에서만 의미를 찾을 수 있고, 망가진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아직 진행형이고, 그런 의미에서 안식일 규정은 이미 그 정당성을 상실한 것이다.

고침 받은 병자를 향하여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의 새 창조와 회복이라는 맥락 안에 놓여 있다. 죄를 지으면 병에 걸리는가 하는 등의 개인적인 문제와는 상관이 없다.

약속의 땅을 잃어버린 포로민들의 관심이 분명하게 드러난 창세기는 땅이 저주를 받은 모든 원인을 인간의 ‘죄’라고 못 박는다(창3:17). 죄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망가트린 장본인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땅을 상실한 근본적 원인이다(렘33:4-11). 당연히 하나님의 회복은 죄의 해결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었고(사40:1-2), 새 창조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청되는 것은 죄에서 떠나 하나님만 섬기는 삶의 방식을 배우는 것이다(렘31:34).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 안에서 죄가 인간에게 개입하는 방식은 개인적이기 이전에 우주적이고 경륜적이다. 죄의 가장 심각한 폐단인 죽음(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창2:17). 바울은 롬6:23에서 죄의 열매가 죽음이라고 말한다)과 그 안에 담겨 있는 세상의 악을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 해결책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다. 죄는 개인의 도덕적 선택 이전에 우주적 세력이고 마귀적 권력이다(8:44).

요한복음의 안식일 논쟁이 공관복음과 다른 강조점을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차원은 그 중요성이 약화되고 예수의 정체성 문제로 흡수된다는 점이다. 요한복음은 유대인들이 예수의 말꼬리를 잡아 흐름을 비틀어서 논쟁의 핵심을 흐려 놓는 것처럼 보도한다. 그러나 사실은 여기에 요한복음의 진짜 관심이 드러나 있다.

논쟁은 안식일에서 예수의 정체성으로 옮겨졌다(5:18).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죽음에 영향을 미친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안식일 위반이나 성전 사건이 아니고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것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과 동등한 자라고 주장한데 있었다(공관복음에서 예수 처형의 가장 핵심 요인은 성전 사건과 안식일 위반이다).

여기에는 일반적 유대사상에서 볼 때 낯선 개념이 등장하는데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는 것이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자신을 놓는다는 것이다. 유대사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왕, 메시아를 의미한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표현들은 이 개념을 조금 넘어서 하나님과 그 아들로서의 관계를 동등한 관계로 묘사한다. 이는 소아시아지역에 팽배해 있던 로마황제 숭배 사상의 영향으로 보인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자신의 죽은 아버지 율리우스 시저를 신의 자리에 올려놓은 뒤 로마 황제들은 신의 아들, 더 나아가 신으로 추앙되었다. 요한공동체도 이러한 황제 숭배라는 제국적 위협 앞에 놓여 있었음이 분명해 보이고 로마제국의 ‘신(神)’ 개념이 보편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개념을 바탕으로 신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곧 자신을 신의 자리에 올려놓는 것이라는 유대인들의 발언이 이해된다.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은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하나님은 예수라는 정체성 안에서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 신, 혹은 신의 아들이라 불리는 로마 황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그 일에 부르고 계신다.

안식일의 참된 의미는 노동의 금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 그리고 노동의 금지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증해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예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체성의 보증은 무엇인가? 일요일의 노동 금지인가? 금주나 금연인가?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예수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다. 세상을 새롭게 창조해 가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인은 참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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