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5장 19-29절 (본문보기)
아들의 권세
요한복음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매우 친밀한 관계가 드러난다. 예수께서 아버지 안에,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 계시다는 주장(14:10)을 넘어 예수와 아버지가 하나라는 선언(10:30)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와 아들의 밀접한 관계가 끊임없이 나타난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이 동등한 관계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아들 예수는 철저하게 아버지에게 종속되어 있다. 아들은 아버지의 권한 아래 있으며(8:28, 15:10) 아들은 궁극적으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버지의 일을 이루는 존재이다(17:4).
본문에도 이러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잘 나타나 있다. 아버지 안에 있는 생명을 아들에게도 주셨고(5:26) 아들을 공경하는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이다(5:23). 아버지는 자신의 모든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주셨고(5:20) 아들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해 주셨다(5:22). 그러나 또한 분명한 사실은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떠나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5:19). 아들은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에 종속되어 있고 그것이 요한복음에 나타난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 있어서 핵심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일을 이루는 자이다. 이를 위해 아버지는 모든 권한을 아들에게 위임하셨다(5:22).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통해 38년 된 병자를 일으키는 것보다 큰일을 이루실 것인데(5:20) 그것은 다름 아닌 부활이다(5:21).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말하면서 요한복음의 가장 핵심적 주제를 드디어 풀어 놓는다. 표적을 통해 암시적으로만 보여주었던 것들을 이제 명확하게 진술하는데, 그 핵심은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 즉 부활이다(5:21, 5:24, 5:25, 5:29). 특별히 이 부활에 관한 증언들이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관계에 대한 증언 안에 위치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이는 이 부활이라는 것이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본래적 계획이고 가장 핵심적 사역임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 당시 사두개인을 제외한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부활을 믿고 있었다(눅20:27).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모든 악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세상을 정의롭게 회복하실 것에 대한 기대가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보편화 되어 있었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단12:2)
부활에 관한 다니엘서의 말씀은 이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방 압제자들의 불의한 통치 속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망가졌고 정의는 실종되었다. 특별히 끝까지 믿음을 지킨 하나님의 백성들이 겪게 된 죽음의 문제 앞에서 하나님의 개입과 회복을 바라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궁극적이고 종말적 회복 사건에서 불의한 죽음을 경험한 하나님 백성들의 부활을 소망했다. 이것이 다니엘 12장 2절에 나타난 영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기대와 소망 안에서 부활은 단순한 소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세계와 택하신 백성들을 신원하시고 모든 악을 처결하시며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결정적 사건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결정적인 때에 죽은 자들이 살아날 것이라고 말한다(5:25). 이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역사가 완성될 것이라는 요한복음의 증언이다.
하나님의 종말론적 완성에는 모든 악과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과(5;22, 5:29)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시는 새로운 생명(5:24-25)을 모두 포함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선물은 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고(3:16) 죽은 자들을 일으켜 영생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이 지닌 종말론적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의 계획에는 악과 악을 행한 자들에 대한 심판이 필수적으로 포함된다. 특별히 그 악에 대한 처벌은 세상의 불의한 통치자들과 그들의 권력에 대한 징계로 이어진다.
본문은 아들에게 심판의 권세를 주신 것이 그의 인자 됨, 즉 사람의 아들 됨을 통하여 주어졌다고 말한다(5:27). 이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과 인자의 역할, 그리고 부활에 대한 통일성을 보여주는 다니엘서의 신학적 흐름에 기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7:13-14)
다니엘 7장에 나타난 인자가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는 데는 많은 논란이 있지만 ‘짐승’으로 표현 된 이방의 통치자들(단7:3-8)과 대조되는 ‘사람’의 아들로서 그 모습이 제시되는 것은 분명하다. 이 인자는 짐승들의 불의한 통치를 끝장내고 성도들을 위하여 신원하실 분으로 묘사된다(단7:22).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고 이방 권세는 멸망할 것이다(단7:26). 이러한 하나님의 종말론적 계획의 중심에 ‘인자’가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다는 말은 이 세상을 통치하는 어둠의 세상 주관자, 곧 세상 임금 마귀의 통치를 끝내고(물론 여기에는 마귀의 통치에 상응하는 로마의 통치를 포함한다) 그 권력에 둥지를 틀고 악의 세력을 심판하신다는 의미를 가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심판은 군사적, 정치적 물리력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로 말미암은 부활과 심판의 종말적 사건은 이미 시작되었다. 말씀(로고스)을 듣고 그 말씀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다고 말한다(5:24). 소위 말하는 실현된 종말론이 이곳에 나타난다. 그러나 또한 주의해야 할 것은 요한복음이 실현된 종말론만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직 부활은 궁극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5:29). 이는 마치 표적을 통해 예수의 부활에 대한 인식을 얻을 수 있지만 아직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지 못한 요한복음 5장의 시점과 같이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이미 생명을 얻었지만 아직 궁극적 부활을 경험하진 않았다. 물론 이미 예수로 말미암아 얻게 된 생명은 마지막 순간에 부활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이룰 것이다.
부활과 생명에 관한 모든 논의의 중심에 예수의 말씀(로고스)이 있다. 말씀이신 예수 안에 거하는 자가 생명을 얻게 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말씀 안에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참 진리와 법칙이 되시는 예수라는 말씀 안에 거할 때,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은 루터식 이신칭의와는 상관이 없다. 특별히 요한복음에서 믿음의 문제는 내가 어느 질서에 소속되어 있는가 하는 정체성의 문제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부활은 선과 악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종말적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와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믿는 문제는 곧 선과 악을 행하는 문제와 동일시된다(5:29). 내가 이 세상을 통치하는 악의 질서와 타협하지 않고 선을 행할 때에 악을 처결하시는 하나님의 신원 안에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라는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다. 세상의 왕을 자처하는 로마 황제나 세상의 이치가 아니라 예수 안에 진정한 생명이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리고 그 믿음 안에 있는 자에게 생명의 부활이 약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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