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에 대한 증언들
예수에게 심판의 권세가 주어졌다는 확언은 필연적으로 그 정당성에 대한 근거를 요청한다. 요한복음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심판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에 대한 증언에 관심을 갖고 이를 보도한다. 이는 요한복음이 유대교와의 갈등 속에서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해 기록된 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공관복음이 예수 사역의 사건들에 관심을 갖고 예수를 따르는 삶의 의미에 대하여 주로 말하는 것과 달리 요한복음은 예수 안에 하나님의 유일한 영광이 존재한다고 선언하고 그 근거에 대한 증언들에 관심을 갖는다.
본문은 예수의 인자됨에 따른 심판의 권세(5:27)에 대한 증거 제시이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께 이러한 권한을 주셨는데, 이는 예수의 단독적 주장이 아니라 이미 많은 증거들이 증언해 주고 있는 사실이다(5:32).
본문에는 크게 세 가지 예수를 향한 증언들이 등장한다. 첫째, 세례 요한의 증언(5:33-35), 둘째,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들과 표적들(5:36),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증언하시는 성경이다(5:37-47). 이런 증언들 중 가장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물론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믿는 성경이 예수에 대한 증언이라는 주장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요한의 증언은 요한복음이 계속해서 강조하는 부분이다. 앞에서 이미 살펴봤듯이 요한복음은 요한에 대한 기사를 모두 요한이 예수를 증언한 내용으로 채우고 있다. 요한의 세례는 예수 사역의 시초였고 초기 기독교 역사 안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요한의 세례 운동은 독자적 영향력 안에서 많은 제자들을 만들었고 예수의 세례와 비슷한 맥락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기독교 안에서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요한이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예수를 증언할 때 의미를 갖는 존재라고 규정한다. 단지 요한은 진리에 대하여 증언한 존재일 뿐이다(5:32). 진리 없이 요한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께서 요한의 증언을 받고 있다는 것은 요한복음이 말하는 핵심이 아니다. 물론 예수는 요한을 능가하는 분이시고 요한의 증언을 받고 있지만 그것은 충분조건이 아니다(5:34). 요한의 증거는 단지 희미하게 깜빡이는 불빛에 불과할 뿐이다(5:35). 예수께는 더 큰 증거들이 존재한다.
예수의 메시아 되심의 또 다른, 그러나 더 결정적인 증거는 예수께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과 그 일에 따른 표적이다(5:36). 이는 요한복음이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적으로 말하고 있는 요한복음의 가장 핵심이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예수께서 이루어 가시고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적이 이를 증언한다. 그러니 그 표적을 보고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 요한복음 전체의 핵심 메시지이다.
본문 나타난 가장 핵심적 주장은 예수에 대한 세 번째 증언, 곧 하나님의 말씀인 모세의 율법이 예수를 증언하고 있다는 것이다(5:46-47). 모세와 예수를 지속적으로 비교하는 요한복음의 전체적 흐름 속에서(1:17, 3:14, 8:5, 9:29) 하나님의 궁극적 영광은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예수를 통해 나타난다고 요한복음은 주장한다. 결국 유대인과의 갈등 속에서 요한공동체는 유대교의 가장 핵심적인 믿음을 공격하는 셈이다.
유대인들의 율법추구 조차도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영광을 취하는 도구로 전락했다고 비난한다(5:44). 이런 비난의 목적은 유대인들의 하나님과 성경을 향한 왜곡된 마음이 예수를 향한 성경의 증언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있다. 결국 유대인들은 그들이 추구하던 율법에 의해서 고소당할 것이다(5:45). 율법이 그들의 왜곡된 욕망을 정죄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 의한 하나님의 직접적 증언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그의 모습을 직접 뵈었다는 말씀으로 시작된다(5:37). 이는 모세가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의 음성과 뒷모습을 뵈었던 사건(출19:19, 33:23)을 연상시킨다(요한복음은 핵심적 주제의 상당부분을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묘사하는 출애굽기에 기대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강조, 성전과 영광, 모세와 율법에 대한 언급들, 광야의 만나 사건, 배에서 솟아나는 생명수 등은 출애굽기의 사건과 주제들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베푼 인물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습을 직접 뵙고 그의 음성을 직접 들은 유일한 인물이다. 그런 이유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의 권위와 중요성은 절대적이었다.
요한복음은 이런 모세와 그가 기록한 율법조차도 예수를 향한 증언이라고 말한다. 구름 속에서 희미하게 하나님을 뵈었던 모세를 믿는다면 당연히 하나님을 직접 뵈었고 함께 계셨던 예수를 믿게 될 것이다. 문제는 유대인들이 모세의 글조차 믿지 않는다는 것이고(5:46) 세속적 영광을 구하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서로의 영광을 주고받는다’는 예수의 말씀은 요한복음 안에서 이중적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하나는 배타적 유대질서 안에서 성전과 율법이 차지한 영광의 자리에 대한 비판이다(물론 요한복음에서 성전의 중요성은 축소되고 율법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한 중요성은 강조하며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듯 했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았다.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들의 영광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7:17-18). 엄밀히 말하면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예수의 판단이다(7:19).
다른 하나의 의미는 로마 황제와 연관된 것이다.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에 대한 강조(5:44)는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서 ‘신’으로 숭배되던 로마 황제에 대한 반영으로 보인다. 특별히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온다’는 표현은 로마 황제를 받아들이고 숭배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왕이요 구세주를 자처했던 로마 황제에 대한 비판이 이 본문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의미일 것이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이중적 의미 사용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은 모세와 율법이라는 배타적 유대 질서나 힘과 권력을 통해 다르시는 로마 황제의 제왕적 통치를 통해서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나타난다고 선언한다. 우리가 우리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영광을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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