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삼지 목사가 교회 공금 횡령 혐의로 기소된 후 검찰 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2008년 8월부터 최근까지 총 32억 6천 6백만원을 계좌이체와 계좌 입금 방식으로 횡령했다 한다.
억 소리난다. 32억이라니... 돈이 뭐길래... 정목사, 그리고 함께 했던 몇몇 집사들 모두 처벌이 불가피해 보인다.그러나 정작 문제는 정삼지 목사의 개인적 처벌이나 교회의 재정 투명화 등과 같은 것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한국 교회 안에 있는 듯 하다.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교회가 너무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는 데 있고,
더 심각한 문제는 돈이 많아지는 것과 하나님의 축복을 동일시 하는 맘모니즘이 교회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현상의 핵심에 십일조를 향한 비성경적, 비상식적 집착이 있다
(정삼지 목사와 같은 경우엔, 개척목사로서 자긍심이 도를 넘어 교회를 부흥시킨 자신에게 교회와 교회 재산의 소유권이 있다는 인식이 또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한 듯 하다).
1. 교회에 돈이 너무 많다.
교회의 예산은 보통 출석 장년 교인 100명 당 1억원 정도가 된다(서울에 있는 일반적인 교회 기준이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장년교인 한 명당 평균 1년에 100만원 정도 헌금하는 셈이다.
서민들 평균 연봉을 3000~5000만원 정도로 봤을 때 한 가구에서 200-300만원 정도 헌금하는 것이 많다고 보기는 어렵다(물론 적은 것도 아니다).
출석교인이 100명 미만인 교회(주로 상가를 임대한 교회)는 1억원 조금 안 되는 돈으로 목회자 사례비, 교회 임대료 및 관리비 지출, 노회 상입금, 대외적 활동비 등을 지출하고 남는 돈은 보통 건축을 위해 모아둔다. 사실 100명 미만의 교회는 교회 살림이 빠듯하다.
출석교인이 500명쯤 되면 모든 것이 풍족해 진다. 5억여원의 돈으로 목회자 사례 및 교회 운영비 및 기본적인 지출을 하고도 여력이 생긴다(보통 500명 이상의 교회는 자기 건물을 가지고 있다. 물론 건축으로 말미암은 빚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다른 교회 지원을 하거나 선교사를 파송하거나 다른 복지 사업들을 벌이기도 한다. 크게 많은 돈이 남지도, 부족해서 불편하지도 않은 경우다.
교인이 500명을 넘어서기 시작하면 돈이 넘쳐나게 된다. 교인수에 비례해 교회 운영을 위한 사례비, 관리비는 줄어들고 헌금은 교인수에 비례해 일정하게 늘기 때문이다.
150명 출석하는 교회에 전임사역자 2명, 파트타임 사역자 2명이 필요하다면 500명 출석하는 교회엔 전임 사역자 6명, 파트타임 사역자 6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전임사역자 3명, 파트타임 사역자 3명이면 족하다. 관리비도 마찬가지이다.
교회가 부흥하여 교인이 늘면 당연히 교회 운영에 필요한 돈보다 많은 돈이 들어오니 교회는 돈과 관련된 문제가 언제나 발생할 수 있는 지뢰밭을 앞 마당에 옮겨놓은 모양이 된다.
당연히 남는 돈을 구제나 대사회적 지원을 위해 사용하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교회를 찾아보기는 가시덤불에서 바늘 찾기만큼 어렵다. 대부분의 남는 예산은 건물 짓기 위해 모아두는 것이 상례고, 대사회적 지원을 위해 사용하는 금액은 보통 생색내기 수준이다(교회가 인색하고 이기적인 집단이라는 사회의 일반적 평가가 크게 잘못되어 보이진 않는다).
2. 교회를 장악하고 있는 맘모니즘
교회가 재정적으로 풍족한 것이 나쁜 일은 아니다(물론 잘못 된 일들이 벌어질 가능성이 다분히 높아지긴 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하심을 물질적인 풍요에서 찾으려고 하는 맘모니즘, 물신숭배 사상이 교회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광야 생활과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 경험을 버리고, (교인수와 함께 재정이 늘면서) 농경생활에 정착해가며 풍요의 신인 '바알'을 섬겨가는 듯 하다.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주시며 그 날의 양식으로 살기를 원하시는 야훼 하나님이 아니라 더 많은 소산을 약속하고, 더 많은 소산이 신의 축복이라고 가르치는 바알 하나님에게 마음을 빼앗긴듯 하다. 광야의 야훼 하나님보다 가나안의 바알 하나님이 입맛에 더 잘 맞는가 보다.
바알 숭배의 가장 큰 문제는 교회와 교인들의 바른 교회를 향한 시선을 왜곡이다. 무엇이 바른 교회이고 바른 목회인지를 분별하는 눈이 흐려지는 것이다.
그래서 부흥이 교회의 가장 핵심적인 목적이 되고(순수한 의미의 전도는 사라지고 교회부흥이 목적이 된다. 사실 한국교회 대다수의 부흥교회들은 수평이동으로 이루어졌다) 부흥과 함께 따라오는 돈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게 된다.
목사들에게 교회 부흥은 거룩함으로 포장해 놓은 자신의 지배욕, 권력욕과 명예욕을 만족시키는 가장 핵심적인 수단이고
성도들에게 교회 부흥은 교회를 금전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공동체적 부담에서 벗어나면서도 마음이 불편해지지 않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고(어떤 교인들은 용감하게 작은 교회를 떠난다),
부흥하는 교회, 큰 교회를 다닌다는 헛된 자만심으로 자신을 치장하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시켜 주는 좋은 통로이다(오해하지 마시라.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물론 이런 마음이 아예 없는 사람도 없겠지만 말이다).
교회 부흥과 함께 따라오는 으리으리한 건물들과 각종 편의시설 등도 목사와 성도에게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으로 작용한다.
바알 종교가 판치는 곳에서 교회와 성도을은 교회의 본질을 망각한다. 더 이상 교회는 영적 여정을 위한 예수 따르미들의 공동체가 아니다.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과 헌신은 사라지고 더 편리하고 안락한 육체적 쉼이 교회를 바라보는 가장 핵심적 시각으로 작용한다. 모두 맘모니즘의 심각한 폐해다.
3. 십일조를 향한 집착
물신숭배가 팽배해지다 보니 당연히 십일조가 강조된다. 물론 이 강조는 성경이 십일조에 관하여 가르치는 맥락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강조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십일조에 집착하는 분들이 가장 사랑하는 말라기 3장의 말씀이다(십일조에 집착한다는 표현이 어떤 분들에겐 불편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집착이다).
물신숭배에 빠져 있는 사람에겐 당연히 이 말씀이 물질적 풍요를 약속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릴 것이고, 부자 되기 위한 제일의 비법으로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정작 성경이 말하는 바는 보지 못한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이후 12지파가 땅을 분배 받았다. 요즘 같이 직업이 세분화 된 사회가 아니었기에 땅은 곧 모든 소득의 근원을 의미한다(땅을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야훼로부터 임대한 것이라는 개념은 부동산 공화국이 된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런데, 땅을 분배받지 못한 지파가 있었다. 바로 레위지파이다. 땅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소득의 근원이 없다는 의미이고 이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그들의 몫을 함께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열한 지파가 자신들의 소득으로 한 지파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십분의 일을 거두는 십일조가 나왔다. 20 지파 중 하나였다면 아마도 이십일조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십일조의 호혜를 누리는 다른 사람들은 레위지파 외에 소득의 근원이 없다고 판단되는 외국인 체류자, 이런 저런 이유로 땅을 잃어버린 고아와 과부 등 빈곤층이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 공동체를 유지시켜 가기 위한 가장 적절한 방법이었다. 하나님 섬기는 일을 맡아 보는 레위인들을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이 책임 지고,
또한 어느 공동체에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가난한 자와 이방인들을 한 구성원으로 긴밀하게 엮어 주는 것이 십일조의 기능이자 역할이다.
만약 십일조를 내기 싫다면 자신의 땅을 나눠서 레위인과 땅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십일조 규정이 그렇게 잘 지켜지지 않았다는데 있다.
십일조가 제대로 모아지지 않으니 가난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레위인들이 성전 봉사의 일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결국, 많은 레위인들이 종으로 팔려가거나, 소작농이 되거나, 고향을 떠났다.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 공동체가 깨어진 것이다.
이런 현상들은 말라기가 기록된 포로기 이후에 더욱 심해졌고(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의 전반적 경제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말라기서의 배경이다.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이탈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은 심각한 위기를 맞이 했다.
제사 드리는 제물로 병들고 절룩 거리는 동물들을 사용한 극단적 예에서 우리는 이 당시 이스라엘 사회가 얼마나 병들었는지, 신앙 공동체가 얼마나 큰 위기에 처해 있었는지를 보게 된다.
결국 하나님은 온전치 못한 제물로 드리는 희생의 '똥'을 그들 얼굴에 쳐바르겠다는 극단적 책망과 함께 신앙 공동체의 근간을 세우는 십일조를 강력하게 요청하신다.
십일조를 하면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약속을 신앙 공동체를 세워가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지가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부자되기 위한 비법이 아니다. 십일조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이 우리와 거래하시는 창구가 아니다.
십일조는 신앙 공동체를 지켜 가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지이고 우리에게 공동체적 책임을 인식하고 살아가라는 요청이다.
십일조를 공동체의 신성한 의무가 아닌 복 받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고, 그 잔재에 극도로 집착하는 일부 목사들과 맹목적 성도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고 있는지 돌아봐야 할 일이다.
이를 위해
첫째, 교회는 작아야 한다. 그래야 건강할 수 있다. 출석 교인이 500명을 넘으면 교회 앞 마당에 지뢰를 풀어 놓은 것과 다름 없다. 언제 터질지 모른다.
둘째, 교회는 가난해야 한다. 성도들에게 지나친 헌금 강요는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파괴시킨다. 특별히 십일조의 가장 핵심적 목적인 공동체 유지 이상의 십일조 강조는 없어져야 한다. 한국 교회는 십일조를 말하기엔 너무 돈이 많다.
셋째, 교회는 나눠야 한다. 가난해질 때까지 나눠야 한다. 건물과 편의시설에 대한 투자를 줄이고 사람에게 투자해야 하고, 세상을 향해 나눠야 한다. 십일조의 본래 수혜자들인 가난한 사람들, 소득의 근원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교회가 가난하다 싶을 때가지 나눠야 한다.
넷째, 큰 교회들은 작은 교회들에게 나눠야 한다. 한국 교회는 큰 의미에서 볼 때 하나의 신앙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공동체를 세워가기 위해 큰 교회들은 교회의 십일조로 작은 교회들, 미자립 교회들을 섬겨야 한다. 사실, 어떤 목사는 연봉이 6억 이상이라는데 미자립 교회의 목사들은 2천만원도 안 된다.
"가난한 교회가 복이 있나니,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퍼갑니다.
답글삭제하나님께서
답글삭제하나님께서 의로운분들을 잘했다 칭찬하실날이 오고있슴을 믿고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고난당하시는 의로운 용기가 승리하실줄 믿고 기도로 응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눈동자같이 바라보고 계시니 매일 회개 할일
답글삭제뿐이네요 이 밤 목사님도 회개
했으면 좋겠네요
우리네 삶을 돌아볼 때, 늘 회개할일 뿐이지요.
답글삭제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요예배중 눈물이 많이 흘렀습니다 예수님 몸된 제자교회의 불의함때문에 주님께선 얼마나 울고 계실찌...요번 사순절엔 더욱 낮아짐으로 기도뿐 !!!!!!!!!
답글삭제좋은 글 감사합니다.
답글삭제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너무 쪼개고 분석합니다. 연구하는 것은 좋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동 외의 잣대를 대서 혹시나 하나님의 뜻을 오해할까 두렵기도 합니다.
십일조는 믿음의 고백인 것 같습니다. 교회가 성도들에게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문제이지만 성도들에게 올바르게 선포하는 것은 목사의 역할인 것 같습니다. 시대와 상황을 떠나 십의 일을 아버지의 것으로 구별하고자 하는 믿음으로 드리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러한 목적으로 드려지는 것을 강단에서 얘기하는 것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위에서 말씀하신 여러가지 거룩한 목적들을 위해서라면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만한 것들이라면 때론 강조할지라도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입니다.
부족한 글 올립니다.
샬롬
이스라엘의 경우 성전보수 작업 때문에 하느님께 제사때문에 헌금이
답글삭제하지만 그 때에도 정성의 헌금이
예수의 태어남의 감사표시는 비둘기?
예수의 칭찬은 부자의 헌금이 아니라 과부의 두렙돈의 정성이!
하늘의 성전에는 보석으로 가득하니 하느님께 필요한 것은 정성이지요 마음이지요
마음에 정한데로 사람에게 부담을 최소한만
아이 Jw
좋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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