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표적 - 오천 명을 먹이시다
예수를 모세와 비교하며 모세의 글이 예수를 증언한다는 요한복음의 주장(5:46-47)은 이어지는 오천 명 급식 사건을 통해 구체화 된다. 오천 명을 먹이신 표적이 전체적으로 모세를 연상시키고 있고, 이 표적을 통해 예수께서 모세를 초월하는 ‘그 선지자’이고(6:14), 더 나아가 참 생명을 주는 메시아임을 보여준다.
본문의 시간적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탈출하여 경험한 자유와 해방, 그리고 그 길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유월절이고(6:4), 공간적 배경은 바다를 건너온 뒤(6:1) 산에 올라와서이다(6:3).
요한복음에는 유월절이 세 번 등장하고 그 유월절에 있었던 사건을 세 가지 기록한다. 첫 번째는 성전에 들어가 성전을 뒤집어 놓으신 사건과 그 표적으로 성전이 삼일 만에 다시 세워지리라 말씀하신 사건이고(2:13-22) 두 번째는 본문에 나타난 5천명을 먹이신 사건이다. 마지막 유월절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잡히시고 처형당한 이야기가 유월절 엿새 전부터 유월절과 관련하여 끊임없이 나타난다(11:55, 12:1, 13:1, 19:1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위대한 절기에 있었다고 기록된 이 세 이야기의 공통점은 그 이야기들이 모두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초점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성전 사건의 결말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는 성전의 재건으로 귀결되고(2:19:22), 두 번째 이야기도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눠 주시는 예수, 즉 죽음을 통하여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이다(6:53-57). 세 번째 유월절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배경으로 진행된다. 특별히 요한복음은 예수를 유월절 양으로 묘사한다(1:36).
요한복음은 치밀하게 유월절 사건을 세 번에 걸쳐 보도하면서(반면 공관복음에는 예수의 공생애 기간 동안 단 한 번의 유월절만 등장한다) 예수 안에서 유월절이 완성되는 모습을 그려낸다((3이란 숫자는 유대인들에게 완전, 완성을 의미하는 숫자이다). 이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의 해방 역사를 완성시키는 것임을 아주 잘 보여주는 문학적 장치이다. 더 나아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구원을 받고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되는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가 세 번에 걸친 유월절 사건들을 통해 펼쳐진다.
두 번째 유월절 사건으로 등장하는 본문에는 특별히 예수를 모세와 비교하며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먹이셨던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 안에서 구체화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본문의 공간적 배경에서 이 이야기의 밑그림이 그려진다. 요한복음은 이 사건이 산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6:3, 반면 공관복음은 이 사건에 대한 기록에서 예외 없이 ‘빈 들’을 배경으로 두고 있다). 모세의 율법에 대한 5장의 논쟁 이후에 이 사건이 기록되었음을 생각할 때 이 산은 모세가 율법을 받은 시내산에 대한 반영으로 보인다. 또한 이 사건이 예수께서 바다를 건너신 후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보도(6:1)는 분명 홍해를 건넌 출애굽 사건에 대한 암시이다. 이집트의 모든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수여받은 모세의 권위가 이 사건의 배경으로 흘러가고 있다. 여기에서 예수는 분명히 모세와 비교된다.
공관복음이 이 사건에서 강조하는 것은 예수께서 많은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먹을 것을 주셨다는 점이다(마14:14, 막6:34).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이러한 감정적 변화는 나타나지 않는다. 예수의 행위는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표적과 관련하여 나타날 뿐이고(6:2, 6:14) 오히려 예수께서는 이 사건을 제자들의 예수에 대한 인식을 시험하는 기회로 삼으신다(6:6). 이를 통하여 요한복음은 이 사건의 목적이 단순한 기적이나 빵을 통한 배부름이 아니라고 말한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계셨고(6:6, 그 일은 모세가 만나를 주었던 것처럼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일이다) 그 표적을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계심을 우리에게 보여준다(6:6).
표적으로서 이 사건을 통해 요한복음이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분명해 보인다. 무리에게 먹을 것을 나눠준 예수의 행위는 모세가 광야에서 백성들에게 만나를 먹여준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어지는 논쟁에서 광야의 만나 사건이 화두로 등장하는 것은 이를 분명히 해준다(6:49). 광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나를 먹고 하나님을 경험했듯이 지금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눠주며 하나님의 현존이 예수 안에 있음을 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이 표적은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 모세를 대체하는, 오히려 능가하는 하나님의 보증 안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 표적을 보고 예수를 향하여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고백하는 말(6:14)은 이를 분명하게 암시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18:15)
사람들이 예수를 향하여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말한 것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올 것이라는 약속에 근거한 고백이다. 즉, 요한복음은 이 말을 통하여 예수께서 모세를 대신하여 이 땅에 오신 참 선지자이고(6:14, 참조 1:21) 모세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6:15).
무리가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 했다는 말(6:15)을 통해 요한복음은 또 다시 청중들에게 이중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듯하다. 예수의 왕 되심이 첫째, 율법의 권한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전적인 해방 사건이라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시고 광야에서 먹이신 하나님의 능력이 모세와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에 의해서 실현되고 있다.
남은 조각을 버리지 않고 모은 것이 열 두 바구니에 찼다는 것은(6:12-13) 하나님께서 열두 지파 이스라엘을 예수의 표적을 통하여 회복시키시고 계시며 어느 누구도 버려지지 않고 거두어들이시기 원하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가 표현된 행위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누구든지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3:16).
예수의 왕 되심은 둘째,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로마황제의 통치를 거부하라는 강력한 도전의 의미를 갖는다. 로마황제는 ‘빵과 오락’을 주는 자로 로마제국에 군림했다. 로마는 자국의 국민들을 통치하며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달래기 위해 빵과 오락거리를 제공했음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로마황제의 왕권과 빵은 불가분의 관계로서 로마황제의 왕 됨은 그가 베푼 빵을 통해 공고해졌다. 요한복음은 이 표적을 통해 진정으로 빵을 주는 자는 로마황제가 아니라 예수이심을 말한다. 로마황제는 육신의 빵을 주지만 예수께서는 생명의 빵인 자신의 몸을 떼어 주신다. 요한복음은 예수만이 이 세상의 진정한 왕이라고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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