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소개

안녕하세요 박성장입니다.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하늘을 보며, 하늘의 뜻을 생각하며 오늘도 힘 내시기 바랍니다.

2012년 9월 13일 목요일

귀신들림과 정신병- 귀신들림의 진정한 의미에 관하여

예수께서 자의로 하신 일 중에 가장 중요하고 대표적인 것이 무엇이냐 물으면
저는 주저 없이
'귀신을 쫓아내신 일'이라고 대답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의 첫 번째 기적이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이었고(막1:21절 이하),
또 예수의 사역을 '복음을 전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다'고 요약할 만큼(막1:39)
귀신을 무력화 시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적인 사역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복음서에는 '귀신'에 관한 말씀이 무수히 많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 하나가 눅11:20에서 말하는 것처럼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임함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서 전반에 나타난 귀신에 관한 언급들을 볼 때,
귀신을 쫓아내는 행위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직접적,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에서 귀신이 그토록 중요하게 다뤄지는가 하는 점입니다.

2012년 9월 6일 목요일

마가복음 6장 번역(by Sung J. Park)


고향에 간 예언자

1. 예수께서는 그곳을 나와서 자신의 고향마을로 가셨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를 따라 갔습니다.
2. 마침 안식일이 되어 예수께서는 회당에 가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기 시작하셨는데, 듣는 사람마다 깜짝 놀라며 말했습니다. “아니, 도대체 이 사람은 어디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까? 누구한테 이런 지혜를 배웠을까? 어떻게 하나님의 손을 가진 것처럼 능력을 행할 수 있을까?
3.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로 목수 일을 하지 않았는가?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와 요세와 유다와 시몬이 아니냐? 그의 여동생들도 여기에서 우리와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 때문에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4.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언자가 자기 고향마을과 일가친척과 자기 집만 빼면 어디서나 존경을 받을 수 있습니다.”
5. 예수께서는 거기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고쳐주신 것 밖에는 더 이상 능력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6. 그리고 고향마을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에 적잖이 당혹스러워 하시며 그곳을 떠나 다른 마을들을 두루 다니며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2012년 8월 30일 목요일

젊은교회, 늙은 교회 - 1. 권위적 소통구조

교회에 젊은 사람들이 점점 줄어듭니다.
오른쪽 사진은 제가 전에 섬기던 교회 모습입니다. 노인은 넘쳐나는데 젊은 사람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40대도 너무 젊다고 교회 일을 안 맡깁니다.

현재 제가 섬기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이 점을 심각하게 생각하며 문제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참에 젊은 사람들이 교회를 멀리하게 되는 이유들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전문적 분석의 글은 아닙니다. 신학적 분석도 아닙니다.
그저, 제 자신이 아직 젊은 사람으로서, 교회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들을 중심으로 생각을 풀어볼까 합니다.

나는 불편하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젊은 사람들이 교회를 멀리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불편함'에 있습니다.

2012년 8월 24일 금요일

마가복음 5장 번역(by Sung J. Park)


로마군대의 영을 쫓아내시다

1. 그렇게 해서 그들은 바다 건너편 이방인의 땅, 거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갔습니다.
2. 그들이 배에서 내렸을 때 곧바로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 하나가 무덤 사이에서 나와서 예수를 만났습니다.
3. 그는 무덤 사이에서 살고 있었는데, 상황이 너무 악화되어 누구도, 심지어 사슬을 가지고도 그를 붙잡아 둘 수 없었습니다.
4. 여러 번 쇠고랑, 쇠사슬로 묶어 봤지만 번번히 쇠사슬을 끊고 쇠고랑도 부수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를 제어할 수가 없었습니다.
5. 그는 밤과 낮으로 항상 무덤 사이와 산을 돌아다니며 소리를 지르고 돌로 자기 몸에 상처를 내고 있었습니다.
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서, 그 앞에 엎드려
7. 크게 소리치며 말했습니다. “왜 나에게 이러십니까?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저같이 비천한 자와 무슨 상관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을 두고 부탁을 합니다. 제발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8.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께서는 언제든지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것을 보면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와라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9. 예수께서 그에게 물어보셨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오?” 그가 대답했습니다. “레기온[1]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막강한 로마 군대의 창칼이라는 영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10. 그리고 그는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역에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

2012년 8월 18일 토요일

새벽기도, 약인가 독인가?

새벽기도,

어떤 사람에게는 약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독입니다.
독을 약이라고 선전해서 마시게 하면 그것은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새벽기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독이 되어서 매우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새벽기도가 자기에게 약이 되는지, 독이 되는지 잘 살피고,
혹시 독이 된다면,
새벽기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모든 부담과 죄책감을 깨끗이 털어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2012년 8월 15일 수요일

마가복음 4장 번역(by Sung J. Park)


4

씨 뿌리는 사람에 관한 비유

1. 다시 예수께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를 시작하시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배에 올라 뭍에서 떨어져 앉으시고 사람들은 호수를 바라보며 땅에 서 있었습니다.
2. 예수께서는 비유를 가지고 많은 것을 가르치셨는데, 그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3. “잘 들어보십시오. , 씨를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갔습니다.
4. 씨를 뿌리는데, 어떤 씨앗들은 길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습니다.
5. 그리고 어떤 씨앗은 흙이 별로 없는 돌 부스러기 위에 떨어졌습니다. 흙이 많지 않아도 싹이 곧 나오기는 했지만
6. 해가 떠오르자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말라버렸습니다.
7. 또 어떤 씨앗은 가시덤불 사이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무성하게 자라나 씨앗이 자라는 것을 막아버려 역시 열매를 맺지는 못했습니다.
8. 그리고 어떤 씨앗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나고 잘 자라서 열매를 맺었습니다. 30, 60, 심지어 100알이 맺힌 것도 있습니다.
9. 당신들에게 알아들을 귀가 있다면 이 비유의 의미를 알아들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012년 8월 7일 화요일

마가복음 3장 번역(by Sung J. Park)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다

1.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의 회당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한 손이 말라서 사용할 수 없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2. 거기에는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는데, 예수께서 안식일인데도 그를 고치시는가 엿보고 있다가 종교재판에 고발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3. 예수께서는 손 마른 사람에게 일어나서 가운데로 서십시오하고 말씀하시고 나서
4. 다시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법을 지키는 것입니까?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까, 악한 일을 하는 것입니까? 목숨을 살리는 것입니까, 죽이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5. 예수께서 그들에게는 병든 사람을 보면서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는 것에 속이 상하셔서 무척 화가 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손 마른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손을 앞으로 내밀어 보십시오.” 그가 손을 내밀자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6. 공공연히 안식일을 어기며 불법을 행하여 민족적 억압의 해방에 걸림이 되는 예수를[1] 보고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은 곧장 나가서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해 줄 수 있는 헤롯 당원들과 함께 어떻게 하면 예수를 제거할 수 있을지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2012년 8월 1일 수요일

마가복음 2장 번역 (by Sung Jang Park)



죄를 용서하시다
1. 며칠이 지났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셨는데 이 소문이 금새 퍼져나갔습니다.
2.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집 문 앞까지 빈 자리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3. 그 때 네 사람이 중풍병자 하나를 들것에 들고 왔습니다.
4. 그런데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서 예수께로 데려갈 수 없자 그들은 예수께서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를 들것과 함께 아래로 달아 내렸습니다.
5. 예수께서는 그들의 신분이나 처지가 아니라 믿음을 주목하셨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여! 당신의 죄는 기꺼이 용서되기에 당신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6. 마침 거기 몇몇 율법학자들이 앉아 있었는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습니다.
7. “이 자가 어찌 감히 이런 말로 하나님을 모욕하는가?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는 죄인을 누가 감히 하나님을 대신해 용서할 수 있겠는가?”
8. 예수께서는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1] 알아차리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들은 왜 마음 속으로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겁니까?”
9. “어느 쪽이 더 쉬운지 한 번 말해 보십시오. 이 중풍병자에게 당신의 죄는 용서되었습니다[2] 하는 것과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들것을 집어 들고 걸어가십시오하는 것 중 어느 쪽이겠습니까?”
10. “하지만 내가 이렇게 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는 사람의 아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1. “당신에게 말합니다. 일어나서 당신의 들것을 집어 들고 당신의 집을 향해 출발하십시오.”
12. 그러자 일어나서 곧바로 들것을 들고 사람들 앞을 지나 걸어 나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했습니다. “이런 일은 정말 처음 보는 일이다.”

2012년 7월 31일 화요일

마가복음 1장 번역(by Sung J. Park)


복음의 프롤로그


1. 저는 지금부터 메시아[1]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승리의 전갈[2]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밝히려고 합니다.
2. 예언자 이사야가 봐라, 내가 내 일꾼을 너보다 앞서서 보낼 것인데, 그가 네 길을 잘 닦아 놓을 것이다.
3. 광야에서 이렇게 외치는 소리가 있다. 주의 길을 준비해라. 그가 오는 길을 닦아라라고 말한 것처럼
4.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난 것이 복음의 시작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속죄제를 대신하는[3] 돌이킴의 세례에 관해 설교했습니다.
5. 그러자 온 유대지방과 예루살렘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로 가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6. 이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둘렀고 메뚜기와 야생 꿀을 먹고 살았습니다.
7. 요한이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내 뒤에 한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그는 나보다 훨씬 뛰어난 분이시다. 그분에 비하면 나는 너무 보잘것없어서 그의 비서 역할도 감당할 수가 없다.
8. 내가 하는 일은 겨우 물로 세례를 주어 하나님의 죄 사함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예식이지만 그는 거룩한 하나님의 영으로 세례를 주어 죄사함을 통한 참 이스라엘의 회복[4]을 실현시킬 것이다.”

2012년 7월 24일 화요일

천국과 지옥, 예수의 뒤통수를 치다 - 9. 복음의 이땅성과 그리스도인

저는 지금까지 여덟차례의 글을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천국과 지옥 개념이 어떻게 잘못 되었는지,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과 지옥은 무엇인지,
그리고 왜 천상이주 교리는 복음이 될 수 없는지, 어떻게 예수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이 참된 복음인지를 제 나름대로의 관점에서 설명했습니다.

본래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고
오랜시간 심혈을 기울여 쓴 글이 아닌 즉흥적으로, 생각나는대로 쓴 글이라 글이 썩 좋지는 않지만 제가 이 주제를 통하여 하려고 했던 이야기는 대략적으로나마 대부분 언급한 것 같습니다.

앞 글에서 말 했듯이 이제 마지막으로 부활복음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의미들을 간략히 다루려고 합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의미들이 있겠지만 이 글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한 두가지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모든 글에서 지속적으로 말하려 했던 것, 그리고 제목에서 이미 말하고 있는것, 즉 왜 천상이주가 아니라 부활이어야 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부활복음이 지향하는 것은 이땅성, 즉 성육신(incarnation)입니다. 부활복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땅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며 모든 잘못된 것들이 바로 잡히는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천상이주교리는 우리가 디디고 살아가는 이 세상을 부정합니다. 즉, 탈육신(excarnation)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을 포기해버립니다. 무가치하게 생각합니다.

2012년 7월 20일 금요일

천국과 지옥, 예수의 뒤통수를 치다 - 8. 악의 뿌리를 뽑다.

저는 지난 글에서(7. 부활이 복음이다) 부활의 핵심은 '되돌아 오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그래서 부활신앙은 되돌아 옴을 소망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모든 잘못된 것들을 되돌리실 것임을 바라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이 복음인 이유는 부활만이 악의 문제를 정당하게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만 악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천국지옥 교리는 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관심조차 두지 않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악해도 이곳을 탈출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악은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기보다는 악을 피해 좋은 곳으로 도망가면 끝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천상이주 교리는 다분히 이기적입니다. 남이야 어떻든 나만 좋은 곳으로 가면 된다는 심리가 매우 깊숙히 박혀 있습니다.
물론 천상이주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천상이주 교리는 인간안에 있는 이기심을 적절히 자극하며 가장 밑바닥에 '나만 아니면 돼' 라는 생각을 심어줍니다.

2012년 7월 11일 수요일

천국과 지옥, 예수의 뒤통수를 치다 - 7. 부활이 복음이다.

지난 글에서는 천국교리가 복음이 아닌 이유에 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부활에 관해서 나누려고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활의 의미와 그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이유에 관한 제 생각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천국교리가 아니라 부활이 기독교 복음인 핵심적인 이유는 그것이 죽음의 문제, 즉 지옥권세의 문제를 정당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짜피 죽음 이후의 것인데, 그것을 구별하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단히 중요합니다. 둘 중 어떤 것을 믿느냐 하는 것이 현재의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2012년 6월 2일 토요일

천국과 지옥, 예수의 뒤통수를 치다 - 6. 천국은 복음이 아니다

이번 글의 제목은 "천국은 복음이 아니다"로 정했습니다.
마태복음이 예수께서 '천국복음' 전하셨음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분이라면 이 제목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래서 용어 정리를 다시 한 번 하겠습니다.

앞의 글에서 밝힌바와 같이 성경에 나타난 '천국'은 하나님 나라의 상징적 표현입니다.
죽어서 가는 천상 도시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여기에서 사용하는 '천국'은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관용적으로 사용되는 '죽어서 가는 천상도시'를 가리킵니다.
앞으로 저는 천상도시를 가리키는 전통적 의미의 천국을 '천국'으로 사용하고
하나님 나라의 상징으로서 천국은 본래 의미인 '하나님 나라', 혹은 우리 말로 풀어서 '하늘 나라'라고 사용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번 말합니다.
천국은 복음이 아닙니다.
기독교 복음은 천국이 아니라 '몸의 부활'입니다.

천국교리가 복음이 아닌 이유는 간단히 말해
천국교리가 죽음의 문제를 온당하게 다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본질적으로 구원의 문제와 관련이 있고 구원은 매우 진지하게 죽음의 문제를 기반으로 서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교리는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앞의 글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천상도시 입주 교리는 예수의 죽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 교리에서 예수의 죽음이 갖는 유일한 의미는,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치자' 입니다.

천국교리가 죽음을 대하는 방식은 '무시'입니다.
죽었지만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죽음은 허상이고 우리는 죽음과 동시에 천상도시로 입주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죽음 이후가 두렵기는 하지만 그것은 죽음 이후에 내가 천상도시에 입주할 수 있는가 없는가 때문이지, 죽음 자체가 얼마나 지독하고 악날한 권세를 가졌는지 인식하지 못합니다.

2012년 6월 1일 금요일

천국과 지옥, 예수의 뒤통수를 치다 - 5. 구원의 의미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익숙하다. 많이 들어본 말이다. 그런데 정확이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반적으로 이 말은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당신은, 당신이 죽은 후에 천국이라고 불리는 휘황찬란, 삐까뻔쩍한 천상 도시로 이주할 것을 믿습니까?"
그래서 이 말을 철썩같이 믿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별 의미가 없다. 그저 내가 사는 곳이 옮겨질 뿐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죽음이 별 의미가 없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도 별로 의미가 없다.
오직 의미가 있는 것은 내가 죽고 난 이후에 어디론가 이주하는 것과 그와 관련된 일련의 체계들 뿐이다.

그런데 과연, 성경도 구원을 죽음 이후의 천상도시 입주라고 말하고 있을까?
신약성서에서 구원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맥락 안에 놓여 있는데(말이 조금씩 어려워지네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사후 천상도시 입주'와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가?
사실, 구원이 사후 천상도시 입주라면 예수는 헛 죽었다. 하나님이 그냥 자기 잘 믿는 사람들 골라서 천상도시로 데려가면 그만이다.
괜히 자기 아들 죽여놓고 그거 알아주지 않는다고 심술 부리는 하나님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

내 생각에 구원을 '사후 천상도시 입주'로 생각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앞 글에서 이미 말한 것처럼, 성경에는 천상도시라는 것 자체가 성경적이지 않기 때문이고
구원이 사후 천상도시 입주가 되버리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치자' 정도밖에는 아무것도 아닌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도 '구원' 이라는 단어를 성경 검색창에 넣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개역 개정판을 기준으로 '구원자'를 포함하여 '구원'이라는 단어가 쓰인 구절이 구약에만 387절이다.
엄청나다. 구원은 구약에서도 매우 핵심적인 개념임을 알 수 있다.
특별히, 신약성서에 영향을 많이 미친 시편과 예언서에 집중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신약도 마찬가지이다. 구원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절수가 154개이다. 마찬가지로 신약에서도 매우 중요한 개념이 '구원'임을 알 수 있다.

먼저, 구약성서가 말하는 구원의 의미들을 찾아보자.

첫째, 구원의 일차적이고 핵심적 의미는 '임박한 죽음의 모면'이다.
성경에서 구원은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죽음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다.
하지만 또한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죽을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있고,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구원'을 언급한다.
그래서 구원이 직접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임박한 죽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창세기에서 '구원'은 6번 사용되었다. 그 중 다섯 번이 '목숨'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나머지 한 번도 같은 의미이다.
모든 구절들을 일일이 언급할 필요도 없이 구약에 나와있는 '구원'이라는 구절들을 읽어보면
그 의미가 '임박한 죽음의 모면'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2012년 5월 29일 화요일

천국과 지옥, 예수의 뒤통수를 치다 - 4. 지옥이란 무엇인가?

지난 글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이번 글에서는 '지옥' 문제를 다뤄보겠습니다.
사실, 지옥 문제는 교계에서 워낙 민감한 문제라 좀 걱적이 됩니다.
'천국'이 여러분이 생각하던 그런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보다
'지옥'이 여러분의 생각과는 다른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위험합니다.
지옥에 대해 병적으로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현상이 잘 이해도 되지 않고, 매우 병적인 증상이라고 생각이 들지만 어쩌겠습니까,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상당히 오랜 동안 지옥이라는 공포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마음 깊은 곳엔 언제나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런 생각을 넣어준 사람들 다 용서했지만 참 나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지옥에 대한 공포를 먼저, 강하게 심어줬으니 말입니다.

저는 다음 세 가지 질문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써 보려고 합니다.
첫째, 지옥은 실재로 존재하는가?
둘째, 실재로 존재한다면 그곳은 어떤 곳일까?
셋째, 지옥이 실재하는 장소를 의미하지 않는다면, 성경에서 지옥에 관해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미리 말씀드리자면, 제 글은 세 번째 질문을 중점적으로 다루게 될겁니다.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이리 저리 둘러가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지옥' 이라는 말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지옥' 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성경은 지옥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사람들이 상상하는대로 지옥은 그렇게 무시무시한 곳일까요?

지옥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불입니다.
성경에서도 지옥은 많은 경우 불과 함께 등장을 합니다. '지옥불'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지옥은 불이 있는 곳일까요? 다른 많은 고통이 있을텐데, 왜 하필이면 불일까요?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그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신약성서에서 우리말로 '지옥' 이라고 번역된 헬라말은 '게헨나' 라고 읽습니다.

2012년 5월 28일 월요일

천국과 지옥, 예수의 뒤통수를 치다 - 3. 내세, 혹은 죽음 이후

지난 글에서는 천국이라는 용어가 사실은 실제 의미하는 바에서 벗어나 허상을 가리키는 언어가 되었음을 살폈습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들이 가는 천국 이라는 곳은 존재하지 않으며,
성경이 지속적으로 말하는 바는,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세상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 되는 것, 하나님의 왕권이 이 세상에 충만하게 되는 것이라는 점도 살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죽음 이후에 관해서는 뭐라고 말할까요?
우선, 지난 글이 좀 길어지는 관계로 생략했던
'내세' 라는 용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신약성서에서 '내세'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개역개정판 번역을 기준으로 세 번입니다.
(이것도 헬라어 성경을 자세히 찾아보지 않아 헬라어로는 몇번 나오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비슷한 빈도일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30절과 누가복음 18장 30절, 그리고 히브리서 6장 5절입니다.
그 중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병행본문으로서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으니,
엄밀히 말하면 내세 라는 말이 나오는 곳은 두 곳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본문을 표준새번역 성경으로 찾아보면, '내세'라는 단어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표준새번역에 '내세'라는 단어로 검색을 해 보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왜 표준새번역은 '내세'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일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개역성경에서 '내세'라고 번역된 헬라말은
'저 세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오는 세상'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은 '내세'라고 번역했던 세 곳 모두에서 '오는 세상' 혹은 '올 세상'이라고 번역을 고쳤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오는 세대'입니다.

내세에 관해서는 일단 이렇게 요약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내세'는 단 두 차례밖에 나오지 않는 매우 부수적인 개념이다.
또한, '내세'로 번역된 단어의 원래 의미는 '저 세상'이 아니라 '오는 세상(정확히는 '오는 세대')'이다."

2012년 5월 26일 토요일

천국과 지옥, 예수의 뒤통수를 치다 - 2. 하늘 나라의 허상

나는 지난 글에서 성경의 자기표현 언어로서의 상징에 관해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천국, 지옥 등은 이런 상징적 언어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이 어떻게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지, 특별히 이 글에서는 천국에 관한 문제에 집중해 보려고 한다.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당신이 예수를 믿고 죽으면 가는 그 어떤 곳인가?
확실한가?
성경은 천국에 관해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사실, 천국에 관한 문제는 이미 여러 책들과 학자들을 통해 보편적으로 알려진 부분이어서 특별히 새롭게 다루어야 할 내용이 없다.
그래도 한 번 더 설명해 보자.
하지만, 내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그 이후이다.

천국, 영어로 헤븐, 헬라어로 우라노이스 투 데우.
우리 말로 하면 '하늘 나라'이다.
도대체 정체가 뭐냐?

먼저, '천국' 이라는 단어를 성경 검색창에 넣어보라.
특이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될 것인데 이 단어가 포함된 성경 구절 37개 중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마태복음에 모여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디모데후서이다.

2012년 5월 25일 금요일

천국과 지옥, 예수의 뒤통수를 치다 - 1. 성경의 상징에 대하여

"예수 믿고 천국 가세요",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가요"
우리가 흔히 듣는 말이다.
정말 그런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지금 철학적 논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정말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내 생각엔 이런 전통적 천국과 지옥에 관한 개념들은 성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 않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개념이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퇴색시킨다는 점이다.
이것이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이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을
잘 이해는 되지 않지만 하나님의 드라마틱한 사랑의 도구쯤으로만 여긴다.
그리고 부활에는 어떤 의미를 두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죽으면 예수님의 은혜로 이미 천국에 갈건데
굳이 부활의 의미를 찾을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는 것이다.

복음의 핵심인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천국과 지옥에 관한 개념부터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서 앞으로 여러 편으로 나눠서 쓰게 될 짧은 그들을 통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무가치하게 만들어 버리는 전통적 천국과 지옥 개념의 문제들을 다루어 보고
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되는지를 살펴 보려고 한다.

2012년 5월 9일 수요일

불의한 청지기 비유(누가복음 16장) 해설

예수님의 비유 중에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 중 하나는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한 번 풀어볼까 합니다.

이 비유는 온통 난해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앞 뒤의 말들이 연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더욱이 이 비유에 이어지는 바리새인들에 관한 이야기는 더욱 앞뒤가 안 맞아 보입니다.

한 번 볼까요?

예수님은 비유를 마치고, 9절에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합니다. 왜 불의한 재물일까요? 주인의 것을 자기 마음대로 했기 때문에 불의하다고 하셨을까요?

그런데 11절에서는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않으면 누가 참된 것을 너희에게 맡기겠는냐' 하고 물으십니다.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비유에 나오는 청지기는 충성하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 13절은 정말 뜬금 없어 보입니다.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라 해 놓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선언으로 끝이 납니다.

이어지는 바리새인과의 대화는 더욱 가관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은 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었을까요?(14절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왜 사람에게 높임을 받는 문제를 거론하시고, 아무 연관이 없어보이는 율법과 선지자의 유효기한에 대해 말씀하셨을까요?(15-17절)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느닷없이 간음에 대한 이야기를 왜 꺼내셨을까요?(18절입니다)

비유 내용 자체로는 어렵지 않지만, 비유에 대한 해석과 사람들의 반응, 그리고 이어지는 예수님의 반응은 일관성을 찾기 어렵고 난해하기만 합니다.

이제, 풀이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2012년 3월 15일 목요일

도서관 1000개 만들기

저의 작은 소망
카페를 하면서 도서관을 운영하는 것
그래서 동네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책을 읽고, 바른 가치관을 형성해 가는 것
그런 소망이 현실이 될 가능성이 점점 커지는 것 같아서
....
고맙습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_facebook.asp?article_num=60120314123347

2012년 2월 23일 목요일

이어령 교수의 회심과 영적 감수성

전 문화부장관이었던 이어령교수가 기독교인이 되고 세례를 받은지 5년이 되어간다.

젊은시절 반기독교적 글들을 많이 썼던 사람이기에 그가 기독교인이 된 것이 세간의 화제가 되었었다.

그 이후 이어령교수는 기독교 관련 책들을 꾸준히 내고 있다.

기독교인이 된 후 처음 낸 책이 아마도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인듯 하다.

솔직하고 담백하게 자신의 이야기, 특별히 기독교인이 된 이야기를 담았다. 역시 문학평론가다운 글솜씨가 인상적이다.

얼마 전에 또 한 권의 책이 나왔다.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웬만한 목사, 신학자들보다 성경을 실감나고 재미있게 풀어냈다. 역시 인문학의 대가다운 위엄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느껴진 것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지속적으로 자신이 기독교인이 아니었을 때와 기독교인이 된 이후의 모습을 비교하며 성경이 얼마나 큰 진리를 담지하고 있는지를 강조한다.

철저하게 무신론적 삶을 살았던 그가 나이 70이 넘어서 세례를 받고(세례받을 때 나이가 75세였다) 이제 80이 다 되어 영적인 삶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있음을 본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기에서 한국의 소위 '유명한 목사님들'과의 결정적인 차이가 느껴진다는 점이다.


2012년 2월 17일 금요일

교회 성장과 말단 비대증

"살아있는 것은 성장해야 합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병들거나 죽은 것입니다."

교회 성장이 목회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목사님들이 자주 하시는 말씀입니다.

제가 교회에 몸 담은 이후 수 십번, 아니 수 백번도 들은 말 인것 같습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자라야 할 아이가 자라지 않거나 커야 할 나무가 크지 않으면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논리로 하자면 계속해서 자라는 것 또한 심각한 문제입니다.

최홍만 선수를 아십니까? 씨름 선수로 데뷔했다가 지금은 종합 격투기 선수로 활동중입니다.

테크노 골리앗이란 별명을 가진 이 선수는 키가 무려 216cm나 됩니다. 몸무게도 160kg이나 나가구요.

그런데 이 선수가 이렇게 큰 체구를 갖게 된 것은 정상적인 성장과정을 통해서 아닙니다.

거인증, 혹은 말단비대증이라 불리는 병을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성장이 이루어지고 나면 뇌에서 성장 호르몬 분비를 멈춥니다. 더 이상 자라지 않는 것이지요.

2012년 2월 8일 수요일

강산에의 '라구요'와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폭력성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 노래만은 너무 잘 아는 건 내 아버지 레퍼토리 그 중에서도 십팔번이기 때문에
고향 생각나실 때마다 소주가 필요하다 하시고 눈물로 지새우시던..."

강산에가 불렀고 최근 자우림이 '나가수'에서 불렀던 '라구요' 라는 노래의 가사말입니다.

고향을 두고 떠나온 실향민의 외로움과 고독을 잘 담고 있는,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죽기 전에 다시 가 볼 소망이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칠때면 딱 소주가 필요합니다. 쓰디 쓴 술 잔과 함께 마음속 깊이 자리한 외로움이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겠지요.

목사가 무슨 술 타령이냐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소위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2012년 1월 30일 월요일

예수의 반쪽 2

예수의 반쪽은 눈물이다.
연민의 눈물이다.
이 눈물은 예수의 다른 반쪽인 분노와 연리지 나무가 되어 피를 나눈다.
분노와 눈물, 여기에 예수가 있다.

왜 우는가?
사랑 때문이다. 연민 때문이다.
착취하며 착취인줄 모르는 권력자들과, 부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분노한 것처럼
착취 당하며 착취인줄 모르는 군중들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신다.
세상이 원래 그렇다는 그들의 푸념 때문에 예수는 운다.
예수의 눈물은
하나님의 세상이 원래 그렇지 않다는 호소이다.
예수의 연민은
푸념일랑 거둬 치우고 정의로운 새 역사를 함께 그리자는 거룩한 초청이다.

예수는 누구를 사랑하는가?
예수에게는 보편적 사랑이 없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누구에게나 동일한 사랑을 베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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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신사적인 예수는 시궁창에나 던져버려라.
예수의 사랑은 편파적이다.
당파적이다.
예수는 신사가 아니라 혁명가에 가깝다.
예수가 누구나 똑같이 사랑하는 신사라는 말에 속지 말라.
새빨간 거짓말이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을 더 사랑했다. 예수는 병든 사람을 더 사랑했다. 예수는죄인들을 더 사랑했다. 예수는 세리들을 더 사랑했고 윤락여성들을 더 사랑했다.

성경을 보라.
예수는 부자들에게 분노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스스로 의롭다 하는 자들에게 분노했다. 사람의 아들은 의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권력자들과 타락한 지도자들에게 분노했다. 그들은 지옥자식들이다. 뱀 새끼들이다. 그 뱀 새끼들이 자라 구렁이가 되면 온 예루살렘을 삼켜 버릴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보며 울었다(19:41).
예수는 그들을 미워했다. 더 미워했다.
입에서 칼을 뽑아 한치의 흔들림 없이 그들을 베었다.

분노를 거세당한 예수는 더 이상 예수가 아니다.
예수에게서 분노를 제거하는 순간 예수의 눈물도, 예수의 사랑도, 예수의 연민도, 예수의 열정도 숨통이 끊어진다.
분노가 없는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분노 없는 사랑이 남겨 놓는 것은 더 깊은 배신감과 더 철저한 유린뿐이다.

예수는 사랑에 미쳤다. 미쳐도 제대로 미쳤다. 자기 목숨을 내 놓았으니 제대로 미친 것이다.
분노하는 자만이 사랑에 미칠 수 있다.
예수와의 멜로 드라마를 원하는가?
이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삽질이다.
예수와의 사랑은 눈물을 배우는 것이고
예수를 사랑하는 것은 분노를 익히는 것이다.

예수 앞에 끌려 온 한 여자.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혔다는 여자.
수치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여자.
한 번의 잘못으로 삶의 희망을 모조리 빼앗긴 여자.
손에 돌맹이를 들고 한껏 고조된 사람들.
도대체그 남자는 어디 갔는가?
사람들의 성난 목소리를 압도하는 예수의 분노에 찬 속삭임
죄 없는 놈이 돌맹이를 던져라
그리고
여인을 향하여아무도 너를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예수는 사랑에 미쳤다. 사랑은 미친 짓이다.

눈물을 잃어버린 자.
안구건조증의 영원한 치료제는 예수의 분노이다.
가난과 질병과 억압과 못된 권력과 부와 이기적 종교지도자들과 모든 소외, 전쟁, 환경파괴, 인종주의, 분열, 차별, 편협, 독선을 향하여 분노하라.
가련한 여인의 두려움과 수치심과 절망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군중들을 향하여 분노하라.
사랑은 거기에서 시작된다.

예수의 반쪽

예수의 반쪽은 분노다.
천천히 걸어 다니며 근엄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말하는 예수는 집어 치워라.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시는 분이시다(시7,11).
예수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를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왜 분노하는가?

예수는 왜 분노하는가?‘의로운 재판관’이기 때문이다.
불의한 자는 분노하지 않는다. 분노 대신 타협한다.
분노는 의로운 자만의 전유물이다.
구약성경은 의로움을 ‘공평과 정의’ 라고 부른다.우리 입에 붙은 일상적 표현 ‘공의’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표현하는 매우 강력하고 도발적인 용어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무엇을 생각나게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방적 기준을 생각한다.
하나님이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에 따라 사람들을 평가한다. 
그리고 기준에 맞는 사람은- 그 기준이 어떤 것이든지- 영원한 안식을 주고 
기준에 미달된 사람은 영원한 벌을 받게 된다. 


정말 그런가?
하나님은 우리를 작품으로 만드셨다. 상품이 아니다.
상품은 획일화이다. 틀에 맞춰 찍어낸다.
작품은 독특하다. 기준이 없다. 틀에 맞춰 재단이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작품을 가지고 다시 상품으로 바꾸시는가?


공평과 정의, 미슈팟과 체데크.공평과 정의는 하나님의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이다.
누구를 향한 분노인가?
구약성경을 찾아보라. 이 표현은 상품을 찍어내듯 획일화된 분노가 아니다.
공평과 정의는 맞춤형 분노이다.
약자를 착취하는 잘못된 권력에 대한 분노이다. 가난한 자를 억압하는 부자들에 대한 분노이다. 
백성을 어두운 길로 인도하는 부패한 지도자들에 대한 분노이다.
기준에 미달한 사람들을 지옥불에 던져 넣는 분노가 아니라 잘못 된 기준을 만들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희롱하는 ‘기준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이다.
다윗이 밧세바를 빼앗았다. 간음이 문제인가?
아니다.
당시 왕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 여러 명의 아내도 문제가 아니다.
나단 선지자가 와서 무엇을 책망했는가?
많은 양을 가진 부자가 딸처럼 여기는 한 마리의 양 가진 사람에게서 
그것을 빼앗아 친구를 대접했다고 책망한다.
분노한다. 하나님의 분노이다.
가진 자가 없는 자를 착취할 때, 분노의 하나님은 공평과 정의를 외친다.
심판을 말씀하신다.
한국 사회의 도가니 사태를 보라.
가진 자들이 착취하고 또 착취한다. 거기에 심판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분노이다.
목사가 입양한 어린 딸을 수년간 성폭행했다.
하나님의 분노가 공평과 정의를 이룰 것이다.

한 과부가 자신의 전 재산 두 렙돈을 성전에 바쳤다.
칭찬인가?
아니다. 예수의 분노이다.
서기관들은 과부의 전 재산을 삼키는 자들이다(막12,40).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에 따라 전 재산을 바치도록 종용한다.
때로는 은혜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순종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힘 없고 순진한 과부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따라 전 재산을 기꺼이 성전에 바쳤다.
그 돈은 서기관들의 피하지방이 되었다.
서기관들을 향하여, 성전을 향하여 분노하는 예수가 보이는가?


분노를 잃어버리는 순간 예수도 잃는다.분노를 잃어버리고 얻게 되는 것은 고작 타협이다.
예수의 반쪽은 분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