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소개

안녕하세요 박성장입니다.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하늘을 보며, 하늘의 뜻을 생각하며 오늘도 힘 내시기 바랍니다.

2010년 12월 31일 금요일

특별 새벽 기도회

연말이 되면, 혹은 한 해의 중요한 시점에 많은 교회들이 특별 새벽기도회를 한다. 평소의 새벽기도회를 잘 준비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서 기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진행하는 것일게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회 '특새(특별 새벽 기도회의 준말)'에서 선포되는 메시지는 늘 대동소이하다. 십일조 잘 하고, 교회 잘 나오고, 봉사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물론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의 교회들이 그렇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그리고 특새에 나오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아멘하며 반응한다.

그런데 이런 설교, 이런 기도회를 '특별' 이란 이름까지 붙여가며 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형식은 특별한데 내용은 조금도 특별하지 않다. 겉모습은 화려하게 꾸몄는데, 속은 여전히 곪아 있는 듯 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려움과 고난을 모르시는 것도 아닌데, 특별이란 이름까지 붙여서 복 받으라는 기도회를 해야하는가 생각이 든다.

물론, 우리 각 개인이 겪는 고난의 무게를 과소평가 하거나, 그런 문제로 기도하는 것이 유치하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고난의 문제는 중대한 것이고 하나님을 만나며 경험하는 가장 원초적인 재료가 된다.

그러나,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모여 하나같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혹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욕망을 실현 시키기 위해서 '복 달라'고 조르는 '특별 새벽 기도회'는 뭔가 아니다 싶다.

'한(恨)'을 가진 민족, 그 민족의 고난과 아픔을 달래며 하나님을 경험하게 해준 새벽 기도회, 그 아름다운 전통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 볼 일이다.

고난과 탄식은 없고, 神의 자리에 올라선 '돈'과 그 神의 아들인 '성공', 끊임 없이 우리를 부추기는 神의 영인 '욕망'이라는 세속적 삼위일체만이 '특별 새벽 기도회'를 이끌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아직, 기도를 많이 한다고 자랑하는 교회들에서, 용산 참사를 위한 기도회를 별로 보지 못했다. 연평도 포격으로 인한 실향민들을 위한 기도회도 잘 보이지 않는다. 맹렬한 추위에 가슴 졸이며 떨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을 위한 기도의 소리는 너무 작게 들린다.

고난과 탄식이 특별 새벽 기도회의 특별한 게스트여야 하지 않겠는가? 특별 게스트 없는 특별 새벽기도회는 공허할 뿐이다.

나의 탄식 뿐만 아니라 우리의 탄식이 특새에 초청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이웃에게서 탄식이 느껴질 때, 탄식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웃을 만날 때, 그 때가 특새를 열 때이다.

상상교회에도 특별 새벽기도회, 혹은 특별 기도회가 있겠지... 그러나 그 기도회는 때가 되면 찾아오는 연중 행사가 아니라, 진짜 기도해야 할 '우리'의 아픔이 있을 때, 바로 그 때 드려지기를...

2010년 12월 29일 수요일

존경하는 박동현 선생님의 사순절 기도문

장신대 구약학 교수로 재직중인 박동현 선생님의 기도문을 올려봅니다.

당신의 홈페이지에 공개한 자료이기에 은혜를 나누는 마음으로 올립니다.

너무 철저하고 엄격하신 분이라 마음 한 편엔 부담도 되지만

존경하고, 본 받을만 하고, 배우고 싶기도 합니다.

이 기도는 선생님의 기도임과 동시에 저의 기도이고, 저희 상상교회가 끊임없이 고백할 기도입니다.

[목회 기도문]

하나님, 2010년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는 절기에 접어들어 둘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또 오늘은 양력 새해 둘째 달 마지막 날입니다.

책소개- '하나님과 제국' (존 도미니크 크로산, 포이에마)

로버트 펑크와 함께 '예수 세미나'를 창설한 가톨릭 사제 출신의 성서학자, 크로산.

미국이 또 다른 로마제국으로 부상하며 제국주의적 힘을 과시하는 현 시점에서 크로산은 미국이라는 제국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신앙적 태도에 관해 말한다.

이 책의 가장 핵심 개념은

문명이라는 폭력의 정상성과 대안으로서의 하나님 정의의 급진성이 대립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과 승리를 통한 평화라는 문명의 정상성과 비폭력과 정의를 통한 평화라는 하나님의 급진성 안에 있는 갈등과 다툼이 성경의 핵심이고 기독교의 비전이라는 것.

그런 비전 안에서 예수의 평화적 초림과 바울의 급진적 기독교 비전, 그 안에 있는 평화를 옹호하고, 비바울서신에 나타난 바울의 보수적 회기와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묵시적 전쟁 신화를 배격한다.

제국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미국의 근본주의적 기독교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도발적이지만 깊이 새겨 들어야 하는 강력한 메시지가 들어 있다고 보인다.

그는 철저하게 예수를 지혜교사로 본다. 그런면에서 묵시가로서의 예수를 말하는 라이트와는 정 반대 노선에 있다.

그는 성경에 나타난 묵시가로서의 예수는 본래적 예수가 아니라고 여기고 철저하게 배격한다. 오직 지혜교사와 윤리적 가르침으로서의 예수만을 본래적 예수라 못 박고 모든 논의를 진행 하는 듯 하다.

 그가 이토록 철저하게 묵시적 예수를 배격하는데에는 묵시에 대한 편협한 이해가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글을 읽으며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는 철저하게 공감하게 되지만, 그가 말하는 예수, 바울은 시대적 요청에 반응한, 시대적 산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우리가 이해하는 예수는 모두 그럴 것이다. 시대적 산물로서의 예수이해를 완전히 벗어버리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글에선 지나친 감이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역사적 예수를 정당하게 다루지 못한 것이 아닐까?

그가 예수의 모습을 통해 미국 사회에, 우리의 신앙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충분히 공감이 가지만, 그가 역사적 예수를 정당하게 다루었는가 하는데에는 물음표가 달라 붙는다.

그러나, 제국적 권력을 드러내는 미국과 그 미국을 미친듯이 따라가는 한국 사회,

신자유주의라는 신기루와 막강한 군사력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열변을 토하는 예수 장사치들에게 지금 크로산의 메시지가 필요한 것 아닐까?


* 저자의 다른 책들

역사적 예수

예수: 사회적 혁명가의 전기

예수의 역사

2010년 12월 26일 일요일

큰 딸 발치

큰 아이 이빨이 하나씩 빠져 나갑니다.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데 벌써 5개를 뺐습니다.

윗쪽 앞니 두개가 흔들렸는데 그 중 하나가 많이 흔들려서 아프다길래

집에서 뺀치로 잡아 뺐습니다(아빠가 좀 무식합니다 ^^).

여기저기 숭숭 뚫린 치아 모습이 웃기네요.

그런데 빼낸 치아를 보다보니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치아의 모습과 다르다는 사실을 보게되었습니다.

'아!~~ 유치에는 뿌리가 없구나!'

영구치와 달리 유치에는 뿌리가 없습니다. 한 5년정도 잠시 버틸 정도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빠져야 하기 때문이겠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생명도 이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우리의 생명은 잠시 있다 없어질 것이지요. 뿌리가 없기 때문에 연약하고 쉽게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주실 생명은 뿌리가 깊어 절대 흔들리거나 빠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지요.

이 소망 안에서, 유치가 빠져 나가듯 우리의 생명도 죽어야 새로운 생명이 돋아납니다. 현재의 생명을 아까워 한다면 새로운 생명이 바르게 돋아나지 못해 덧니처럼 되고 맙니다.

부활의 참 소망 안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따라갑시다.. ^^ 할렐루야 ~~~ ^^

2010년 12월 25일 토요일

'아름다운 세상을 여는 예배' 동영상



낯이 참 두껍다는 생각이 듭니다.

휴대전화로 촬영해 봤는데,

이런 노래실력 가지고도 사람들에게 공개할 정도면

두꺼워도 보통 두꺼운게 아닐겁니다.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 마음에 올려봅니다. ^^

어린이 도서관

도심에 있는 저소득층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한 부모 가정이나 폭력 가정,

혹은 맞벌이로 방치되어 있는 아이들,

이런 아이들에게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하면, 지적 능력도 떨어지고 자신감도 없고 대인관계 능력도 떨어지다보니 마음 속에 분노와 공격적 성향이 짙어집니다.

이런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첫째, 책과 인문학, 둘째, 심각한 수준에 있는 아이들을 위한 치유센터(음악, 미술, 놀이 등등)라 여겨집니다.

위의 사진은 일산에 있는 한 교회에서 운영하는 어린이 도서관입니다.

예배당의 2/3를 도서관으로 사용합니다. 교인은 많지 않지만 참 아름다운 일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교회를 운영하게 되면 꼭 어린이 전용 도서관을 해야겠습니다.

함께 하실 분 없나요? 네? ^^

2010년 12월 24일 금요일

DREAM - MPJ 싱글앨범

이번에 동생이 싱글앨범을 냈습니다.

돈도 없고, 빽도 없이 혼자서 10년 가까운 시간을 묵묵히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성공을 위한 세상적 수완도 없는 녀석이라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조금 아립니다.

몇 차례 앨범을 냈는데, 성과가 없습니다. 결국,

현실적 생활고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마지막이라 생각하는 싱글 앨범을 냈네요.. ^^

힙합을 하기 때문에 이곳에 방문하는 분들의 정서와는 잘 맞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한번 들어보시고, 가사도 음미해 보시고, 평점도 부탁드려봅니다.   [싸이월드 평점 주러가기]

동생의 가수명은 'MPJ', 이번 곡명은 'DREAM'이네요 ^^





 가사 -------------------------------- 가 안 보이면 '더 보기' 누르세요 ^^

요한복음연구 15 - 예수의 두 번째 표적

요한복음 4장 43-54절 (본문 보기)


예수의 첫 번째 표적(2:1)으로 시작되는 요한복음의 1부가 예수의 두 번째 표적인 가이사의 신하의 아들을 고친 사건으로 마무리된다. 엄밀히 말하면 갈릴리에서의 두 번째 표적이다. 가나 혼인잔치 이후 예루살렘에서 예수는 많은 표적을 행했고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사람들이 이 표적을 보고 예수를 믿었다(4:45).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지속적인 예루살렘 방문이 나오는데(3번 정도의 예루살렘 상경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의 예루살렘 방문으로 요한복음의 큰 단락이 나누어진다(1부 2:1~4:54, 2부 5:1~7:9, 3부 7:10~11:57, 이어서 마지막 유월절 단락이 이어진다). 그리고 각각의 예루살렘 방문을 중심으로 예수의 표적이 두 번씩 등장한다(1부 혼인잔치 표적, 왕의 신하의 아들 고침, 2부 38년 된 병자 고침, 오천 명 급식, 3부 나면서 맹인 된 사람 치유, 나사로를 살림, 마지막 단락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2010년 12월 21일 화요일

성탄 발표회

 


두 딸 아이가 교회에서 하는 성탄절 발표회에 영광스럽게 뽑혀 주일 저녁 부채춤 공연을 잠깐 했습니다.

꽤나 높은 경쟁률을 뚫고 선 자리라 최선을 다해 열심히 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응원을 했습니다.

아이들 공연 기록으로 남겨줘야 하겠기에 카메라도 빌리고,

무대와 객석의 거리가 멀어 망원렌즈도 빌렸습니다.

아이들 사진을 찍으며 이 아이들이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 이 사진들을 보며 어릴적을 회상할 때, 그 때 이 아이들의 입가에 번질 미소에 내 마음도 행복했습니다.

아비란 그런건가 봅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도 그러시겠지요.

지금도 우리의 사진을 찍으시며 행복해 하시겠지요.. ^^

책소개- '로마서 산책' 권연경, 복있는 사람



안양대 교수로 재직중인 권연경교수가 로마서를 쉽게 풀어 쓴 책이다.

비교적 보수진영에서 개혁적 성향을 가지고 성경연구와 성경연구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는 귀한 분이다.

'바울 연구의 새관점'을 상당부분 수용하면서 전통적 칭의 사상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이 보인다.

주로 1장에서 11장에 이르는 내용들을 중심으로 다루었고 12장 이후의 내용은 간략하게 정리했다.

로마서를 읽으면서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들을 비교적 충실하게 다루었다.

'칭의'와 '구원'의 구분, 현재와 미래의 긴장, 창조세계의 회복, 율법의 외적 증거와 내적 순종, 부활에 대한 믿음과 성령의 역할, 이스라엘의 구원문제 등 핵심적인 논점들을 정확하게 풀어가고 있다.

나에게도 몇 가지 통찰들이 새롭게 다가왔고, 로마서의 정리되지 않는 개념들이 정리되는 소중한 만남이었다.
아쉬운 점은 율법의 역할과 복음 안에서의 위치가 여러가지 설명에도 불구하고 불확실하고

율법에 관한 가장 핵심적인 구절 중 하나인 8장의 '육체의 율법'과 '성령의 율법'이 너무 쉽게 간과되었다.

성령의 율법을 그냥 성령의 법칙으로 이해했는데 이에 대한 근거가 제시되지 않았다. 물론 평신도들을 겨냥하고 쓴 글이기에 그랬으리라 이해는 되지만, 아쉽다.

전반적으로 로마서의 끊임없이 등장하는 '율법(법)'이라는 개념에 대한 충분한 정의나 의미 파악이 조금 약한 듯 하다.

책의 후반부로 가면서 바울의 논지를 계속 따라가기는 하지만 로마서 전반에 걸친 논지에 대한 이해나 설명이 약해지는 느낌을 준다.

이런 몇몇의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로마서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그런 책이다.

2010년 12월 18일 토요일

의존

1960년대 미국 신학계를 풍미했던 신 죽음의 신학(死神신학, theology of death of God)이라는 신학 사조가 있었다. 신학이란 것이 기본적으로 신에 관한 학문인데 그 신이 죽었다니 여간 도발적인 신학이 아닐 수 없다. 스스로 죽은 신에 관한 학문을 한다고 말하는 셈이니 엄밀히 말하면 신학이라고 부르기도 쉽지 않다.

이 신학을 주도했던 미국의 젊은 개신교 신학자들의 세상을 향한 태도 또한 만만치 않았다. ‘신의 장례식’에 사람들을 초대하는 대대적인 신문광고를 내고 신의 죽음을 공개적으로 애도하며 일면 축하했다.

2010년 12월 16일 목요일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문학동네) - Book Review

파울로 코엘료를 세계에 드러내 준 작품.

신부가 되기 위해 라틴어, 스페인어, 신학을 공부한 산티아고는 어느날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양치기가 되어 길을 떠난다.

꿈 속에서 본 보물을 찾기 위해 이집트의 피라미드로 긴 여행을 시작하고...

집시여인, 늙은 왕, 도둑, 화학자, 낙타몰이꾼, 아름다운 연인 파티마, 절대적인 사막의 침묵과 죽음의 위협 그리고 마침내 연금술사를 만나 자신의 보물을 찾게 되는데.....

자아의 신화를 찾아 떠나는 자만이 발견할 수 있는 자신의 보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당신도 자아의 신화를 찾아 용기있는 한 발자국 걸음을 내 딪어 보시길...


** 저자의 다른 작품들





2010년 12월 14일 화요일

아름다운 세상을 여는 예배 OST

노래 만드는 참에 하나 더 만들었습니다.

앞으로 시작하게 될 '아름다운 세상을 여는 예배'를 위한 곡입니다.

그래서 노래 제목도 '아름다운 세상을 여는 예배'입니다.

     우리의 눈이 주님 지으신 아름다운 세상을 보네
     우리의 귀에 참 좋았더라던 주님의 음성이 들리네
     지금은 비록 가시와 엉겅퀴 수고와 눈물뿐이지만
     십자가 지고가신 주님의 눈물 이 세상이 빛을 보았네
     우리는 예배하리라 주님 이 땅 다스리도록
     아름다운 세상을 여는 참 예배자로 서리라

부끄럽기도 하고... 이런 여유를 부릴 수 있어 좋기도 합니다. ^^

2010년 12월 13일 월요일

'평화의 왕' 동영상 촬영



내 생애 최초의 자작곡 '평화의 왕'을 동영상으로 찍어봤습니다.

주안장로교회 서울경기교구 구역장님들께 한 약속도 있고 해서...

노래를 참 못 부르는구나... 하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

은혜가 되시길 바라고..

제대로 된 반주에 잘 부르는 노래는 며칠 후에 올리겠습니다. ^^

2010년 12월 12일 일요일

내 생애 최초의 자작곡

드디어 곡이 완성이 됐습니다.

썩 맘에 들진 않지만 첫번째 곡으론 그럭저럭 만족입니다.

제목은 "평화의 왕 (부제: 두리반을 위하여)" 로 정했습니다.

처음 만들었던 곳에서 뒤쪽 코러스 부분을 수정했습니다.

코드 작성은 아내의 도움을 받았구요(이 페이지를 빌어 고마움을 전합니다).

동생이 연주 파일을 만들어 주기로 했습니다(동생이 대중음악(힙합)을 합니다).

수요일까지 해주기로 했으니 목요일이나 금요일쯤에 음악 파일을 올릴 수 있겠군요..


아름다운 세상을 여는 예배

" 아름다운 세상을 여는 예배 "


은혜 받기 위한 예배가 아닙니다.

내 정서적, 영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예배가 아닙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열기 위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움직이시도록 나 자신을 '공개'하고

하나님을 뜻을 묻기 위해 '공부'하는 예배입니다.

내 만족을 위한 찬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과 다스림을 구하며 이 세상을 향한 중보의 찬양이 드려지고

설교 대신 성경을 연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는 시간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물신 숭배와 외모지상주의, 권력에 대한 탐욕으로 물든 이 세대를 향한 아픔이 있다면,

하나님이 계획하셨던 본래의 아름다움을 향한 갈증이 있다면

'아름다운 세상을 여는 예배'에 나아와

하나님의 뜻을 묻고 이 세상을 위해 중보자로 세워지시는, 그런 시간을 꿈꿉니다.

지금 당장 무엇을 시작할 수는 없지만,

누구나 참여해서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그런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나의 남아 있는 목회 인생을 드려, 이 예배를 꼭... 하나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2010년 12월 10일 금요일

두리반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라는 대강절 설교를 준비하다가 (설교 원고는 여기에 => 원고보기)
'두리반' 이라는 식당, 지금은 음식 대신 노래와 시와 부르짖음을 팔고 있는 식당을 생각하며
노래를 하나 만들어 봤습니다.

제목은 뭘로 할까 고민하다
일단 '두리반'으로 정했구요.

세세한 부분 조금 더 수정을 해야겠지만
일단 완성된 것이니 함 올려 봅니다

기성 찬양에 비해 많이 부족하고...
나도 모르게 다른 곡을 부분부분 따라한 곳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 그런 부분이 있다 하더라고 의도적 표절은 아니니 너그러이 용납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엔 직접 노래 부른 영상을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2010년 12월 7일 화요일

요한복음 연구 14 - 예수의 양식


요한복음 4장 27-42절 (본문 보기)
예수의 양식

‘누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가?’ 다른 표현을 쓰자면 ‘누가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인가?’ 라는 핵심적인 대화에 이어 본문에는 제자들과 예수께서 나눈 대화들이 기록되어 있다. 특별히 제자들과의 대화는 여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의 예수에 대한 고백인 ‘그리스도’, ‘세상의 구주’ 라는 표현 중간에 위치하며 메시아로서의 예수의 사명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대화는 크게 두 가지 내용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하나님의 일을 완성시키는 것이 메시아의 양식이라는 것. 둘째, 추수 때가 되었고 제자들은 추수 꾼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
태초(1:1)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계획이 메시아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요한복음은 주장한다. 예수께서는 그 일을 위해서 오셨고 그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으셨다(4:34). 예수께서는 심지어 이 사명을 먹고 산다고 표현하셨다.

대강절 설교 - 평화의 왕 예수

오는 주일 1부 대강절에 설교를 하게되었습니다.

설교 본문으로 이사야 9장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나누려고 하는데, '공평과 정의'라는 말씀이 눈에 밟힙니다.

한 아기가 평화의 왕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는 말씀에는 '분노'가 서려 있습니다.

억압과 착취, 어둠과 절망을 향한, 불의한 악인들을 향한 거룩한 분노가 깊이 배어 있음을 느낍니다.

설교를 준비하며 내 자신을 묵상해보니 내 안에 이런 분노가 사라져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가난하고 궁핍하던 시절엔

잘못된 제도, 악의 장벽들, 불의한 지도자들, 그리고 거기에 자꾸만 순응하려는 나 자신을 향한 분노가 있었는데

이젠 그런 분노가 사라져 갑니다.

교회의 녹을 먹으며 적당히 살만해졌고

좁아서 불편하지 않을만한 아파트에 살고

속으로야 어찌됐든 겉으로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미래가 불확실 하긴 하지만 그래도 기대할 것들이 있어서 그런가봅니다.

나에게 오는 피해에는 분노하지만

불의 앞에, 부당하게 불의를 경험하는 의에 주린 자들 앞에서 분노를 잃어버렸습니다.

대강절을 보내며,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다리며 다시 한 번 분노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고싶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와 절망 앞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 다음은 대강절 설교 원고입니다.



본문 : 사9:1-7
제목 : 평화의 왕 예수

1. 대강절 세 번째 주일

- 12월 25일은 성탄절이다. 성경에 나와 있지도 않은 이 날을 예수의 탄일로 지키게 된 유래에 대해서 아는가?

- 여러 가지 학설 중에 가장 유력한 것은 로마의 큰 명절이었던 동지절(12월 24일~이듬해 1월 6일)을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로 정했다는 것이다.

- 예수의 탄생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로마의 동지절을 성탄일로 정하고 기념하는 것에는 매우 깊은 상징적 의미가 있다.

- 예수님 당시 로마는 온 세계의 중심이었다. 모든 권력과 부와 명예가 로마에 집중되어 있었다. 로마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세계를 정복하고 로마의 황제가 스스로 신의 자리에까지 올라갔다.

-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로마는 세계의 중심이었다. 로마가 가진 무자비한 힘과 권력 앞에서 누구도 대항할 수 없었다. 폼페이우스 장군이 정복전쟁을 하면서 이스라엘의 신을 만나보겠다고 이스라엘의 성전에 들어와 군화발로 지성소를 짓밟고 들어갔다. 그 무례한 행동에 따른 예상과 달리 그는 멀쩡했고, 오히려 로마의 권세와 능력에 신성함이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 그 로마의 성대한 축제가 동지절이다. 세상의 모든 권력을 쥐고 흔드는 로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온갖 불법과 폭력을 휘두르던 로마의 성대한 축제 한 가운데 예수께서 오신 것이다.

- 돈만 있으면 다 되는 세상, 유전무죄 무전유죄, 권력 앞에서 초라해지고 작아질 수밖에 없는 세상, 예쁘고 잘 생기면 다 용서되고 못 생긴 것이 죄가 되는 세상(언뜻 보니 여기 죄인들이 많으시네요~^^), 외모가 권력이 되어 있는 세상(제 권력은 어느 정도나 돼 보이십니까?), 그 외모와 돈과 권력으로 흥청망청 세속적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세상의 한 복판에 작고 가난하고 연약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날이 12월 25일 성탄절의 의미이고, 그 오심을 기다리는 날이 대강절이다.(인사: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오셨습니다)


2. 평화의 왕

- 예수께서는 평화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본문 6절은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는데 그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이라고 말한다.

- 슥9:9-10 에서는, 보라 네 왕이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평화를 전할 것이라고 말한다.

- 예수님의 탄생시에도 허다한 천군천사가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라고 찬양한다. 예수께서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것이다.

- 그러나 예수님이 태어날 때 ‘평화의 왕’으로 불리던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바로 로마 황제이다. 사람들은 로마 황제를 가리켜 실제로 ‘평화의 왕’이라고 불렀다.

- 로마의 통치 이념 핵심에는 ‘Pax Romana’ 라는 말이 있었다. 로마의 평화라는 말인데 로마는 자국의 평화를 모든 통치 이념의 최우선으로 삼겠다는 말이다.

- 로마가 지향하는 평화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자국의 평화, 둘째, 군사력과 전쟁을 통한 평화이다. 로마의 통치와 권력에 순응하여 복종하는 나라에게는 평화가 약속되지만 로마의 통치를 거역하는 나라에게는 전쟁대략 학살, 잔인한 처형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도 로마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한 방편의 처형대였다.

- 모든 사람들이 로마의 평화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살기 위해선 침묵해야 했다. 섣불리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서도 안 됐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하듯이 로마가 강요하는 평화를 받아들이고 살아야 했다.

- 이스라엘 안에 그런 로마의 평화를 거부하는 무리들이 나타났지만 예외 없이 처참한 처형을 당해야 했다. 로마의 통치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반역자로 십자가에 처형당했다. 로마의 통치 시절 최소 수 백 명의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려 잔인하게 죽었다. 예수님 양 옆에 달려 죽은 사람들도 아마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 이렇게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은 평화의 시대, 칼과 창으로 유지되던 평화의 시대에 진정한 평화, 하늘에서 내려온 평화의 왕이 태어나신 것이다.

- 우리에게 오신 평화의 왕은 전쟁을 통해 평화를 지켜가는 분이 아니다. 권력과 힘을 통해 평화를 이루시는 분도 아니다. 자신의 평화를 위해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는 그런 분도 아니다.

- 로마의 평화 안에서 사람들은 두려움을 경험했다. 절망을 경험했고 하나님을 향하여 낙심을 경험했다. 원래 힘과 권력을 통한 평화는 그런 것이다. 통제하고 억압하고 압력을 넣어 이루어진 평화는 겉으로는 좋아 보이고 평온해 보이지만 거기에는 절망과 한숨과 두려움만이 존재한다.

- 예화. [우리 집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 아이들은 울어대고 아내는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와 있고, 집안은 정리 안 돼 있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나는 시험 준비를 해야 하는데 집 안에 평화가 없다. 결국 버럭 화를 냈다. 드디어 평화가 찾아왔다. 아이들은 울다가 잠이 들었고 아내는 입을 다물었고 집은 깨끗해졌다. 그런데 아무도 행복하지 않았다. 힘과 억압에 의한 평화는 그런 것이다.]

-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평화는 자유가 있고 해방이 있고 기쁨이 있다. 힘과 권력이 아니라 겸손과 낮아짐으로 이루어진 평화이기 때문이다. 그 평화 안에서 죄인들은 용납되어지고 회복되어진다. 하나님을 향하여 대적하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은 손을 내미시고 사랑하신다. 심지어 자신을 못 박아 죽이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용서하며 사랑하는 것이 예수 안에 있는 평화이다.

- 최근 한반도 정세가 매우 불안정하다. 연평도 포격사건 이후로 한반도의 평화가 깨어지고 긴장이 감돌고 있다. 나는 정치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잘 알지 못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 평화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 특별히 대강절을 보내며 더 기도하게 된다.

- 그런데, 일부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예수의 평화가 아니라 로마의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스가랴 말씀처럼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고 전쟁 기구들도 끊어버리시는 분이신데 기독교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전쟁을 운운하며 공격적인 태도를 보일 때 마음이 너무 아프다. 우리가 함께 로마의 평화가 아닌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께서 이 나라를 다스려 주시도록 기도해야 할 일이다.


3. 아기 예수

- 본문 6절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가리켜 한 아기가 우리에게 오셨다고 말한다. 제왕적 힘을 가진 강력한 왕이 아니라 연약하고 아무 힘도 없는 한 아기가 왔다고 말한다. 아기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 사실, 전쟁을 끝내려면,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전쟁의 달인이 와야 한다는 것이 세상의 상식이다. 돈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돈이고, 권력을 이길 수 있는 것은 권력이다. 일등을 이길 수 있는 길은 내가 일등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 논리이다.

-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논리에 젖어 산다. 아기 예수님은 사라졌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도 사라졌다. 오직 영광가운데 계신 예수님만 기억하고 살아간다. 그래서 더 높은 곳에 기어 올라가려고만 한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 세대의 앞잡이가 되어가고 있다.

-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초라한 말구유에 누워계신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초라함을 불쌍히 여기라는 말이 아니다. 눈물 몇 방울 흘리라는 말이 아니다. 평화를 이루어 가시는 예수님의 방식을 배우라는 말이다. 겸손과 낮아짐과 희생을 통해 예수님의 길을 따라 가라는 말이다.

- 예수님의 방식을 배우고 그의 길을 따르며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면 우리는 평화의 사자가 되는 것이다.


4. 하나님의 울분

-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평화를 위해 기도하게 하는가? 설교를 준비하며 본문을 묵상하던 중 본문의 말씀 중에 하나님의 울분이 있음을 보게 되었다.

-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 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추었다”, “그들의 무겁게 맨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셨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 묻은 복장이 불에 섶같이 살라지리라.” 어떤가? 아름다운가? 목가적인가? 부드러운 음성인가? 아니다. 압제와 고통과 절망의 땅을 향한 하나님의 울분이 느껴지지 않는가?

- 평화의 길을 가는 것, 평화를 위한 사자가 되는 것은 이런 하나님의 울분 없이는 불가능하다. 평화 없음에 대한 울분, 평화를 앗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거룩한 분노가 없다면 진정한 기도는 불가능하다.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 예수께서는 이 거룩한 분노를 가지고 살아가셨다. 연약하고 병들고 힘없는 자들을 향하여는 언제나 온유하고 자비하셨지만 불의한 권력자들과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과 같이 권력에 야합하여 백성들을 억압하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는 불같은 비판을 품어내셨다.

- ‘독사의 새끼들아’ 우리말로 하면 ‘개 자녀’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부드럽게 하셨겠는가? “너희 개 자녀들아 그러면 안 된단다~” 이렇게 하셨겠는가 말이다. 이 말 안에는 예수의 울분과 거룩한 분노가 스며있다.

- 예수께서는 울분 없는 자들, 자기희생도 없는 자들, 의를 향한 갈망도 없이 거짓된 평화를 원하는 자들에게 “내가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라고 말씀하셨다.

- ‘두리반’ 이라는 식당을 아는가? 얼마 전까지 한 집사님 내외가 운영하는, 서울에 있는 평범한 칼국수 집이었다. 10여 년 동안 옷 수선, 사우나 매점, 찜질방 식당 등을 하며 모은 돈에 대출을 받아, 1억 3천만 원의 시설투자비에 보증금 1500만원의 세를 주고 2005년 홍대 옆에 가게를 내었다. 2007년 도시공항철도 역사가 세워진다는 발표와 함께 땅값은 수직상승했고 건물은 민간 건설사에게 팔렸다. 건설사는 이사비용 300만원을 주며 나가라고 했고, 평생 모은 돈을 다 날리고 아직 갚지 못한 빚까지 떠안아야 하는 내외는 버텼다. 결국 2009년 12월 24일, 세상이 성탄절 이브를 즐기고 있을 때 두리반은 강제철거를 당하고 주인은 쫓겨났다. 아이러니하게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오신 밤에 한 서민 부부의 인생이 송두리째 철거를 당한 것이다. 26일 사장내외는 철사와 철판을 뜯어내고 두리반에 들어가 1년째 농성중이다. 시인들이 찾아와 시를 낭송하고, 음악회를 열고, 영화제도 열고, 예배를 드리며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더위와, 추위와 싸우며 농성을 하고 있다.

- 평화가 깨어진 이 모습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나는 힘과 권력과 돈으로 무장한 건설업체의 모습에서 자국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나라들을 처참히 짓밟았던 로마의 평화를 보게 된다. 그리고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울분을 가지고 분노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느낀다.

- 그런데 매스컴에서 처음 이 보도를 접했을 때, 나 자신이 많이 변했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다. 그저 안타까운 사연이 하나 늘었구나. 참 안 됐다 하고 너무나 쿨 한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 신학교 시절, 가난하고 참 궁핍했다. 한 달에 한두 번 야식으로 통닭을 시켜 먹는 것이 호사였다. 지도하던 청년들에게 밥 한 번 사주는 것, 큰 맘 먹어야 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었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 그 때는 울분이 있었다. 잘못 된 제도, 악의 장벽들, 고통 받는 사람들을 향한 울분이 있었다. 그리고 자꾸만 권력과 잘못된 제도에 순응하려는, 굴복하려는 나 자신을 향한 울분과 분노가 있었다. 그래서 잘 울었다.

- 그런데 목사가 되고나니 내 자신이 변하게 된다. 먹고 사는데 문제 되지 않을 만큼 사례를 받고, 넓진 않지만 좁지도 않은 아파트에 살고, 속으로야 알 수 없지만 겉으로는 많은 존경을 받고 살다보니 울분이 사라졌다.

- 그래서 이웃의 아픔을 봐도,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가 깨어진 모습을 봐도 내게 일어난 일이 아니면 마음의 동요가 없다.

- 지난여름 무더위에 운전을 하다가 길 한가운데 차를 세우고 서 있는 사람과 다툼이 났다. 너무 몰상식하게 차를 세워뒀다고 생각해서 창문을 열고 한 마디 거칠게 했는데, 아뿔싸! 깍두기 머리에 팔에는 문신이 우글거렸다. 맞을까봐 겁나서 제대로 말 한마디 못하고 그 사람에게 이리저리 휘둘렸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속의 분노가 가시지 않는다.

- 내가 당하는 별것도 아닌 일에는 분노할 줄 알면서, 평화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가 깨어진 상황에는 무덤덤한 내 모습이 참으로 가련하다.

- 예수께서는 자신을 향하여 채찍을 휘두르는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불의한 압제자들을 향하여는 분노하셨는데, 이 땅의 깨어진 평화를 향해서는 오래참고 개인적인 일에는 발끈하는 내 모습을 보며 언제쯤에나 예수님을 닮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속이 쓰리다.

- 성령의 열매가 아닌 엉뚱한 열매만 맺혀 간다. 나 자신을 향한 사랑, 자기만족을 향한 기쁨, 나의 유익을 위한 평화, 불의를 향한 오래 참음, 내 자식들만을 향한 자비,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에게만 베푸는 양선, 힘 있는 사람들을 향한 충성, 권력자들 앞에서의 온유, 거룩한 것들의 절제라는 아홉 가지 열매가 너무 주렁주렁 열린 것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다. 이 땅 구석구석에 평화가 임하도록 기도하자. 힘 있는 사람들의 횡포가 그치고, 돈 가진 사람들의 자랑이 멈추고, 사망의 그늘에 있던 자에게 빛이 비추는 평화, 4절 말씀과 같이 무겁게 맨 멍에와 어깨의 채찍이 멈추는 평화 압제자의 막대기가 꺾이는 평화를 구하자.

- 울분을 가지고 기도하자. 울분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그 울분이 우리를 진정한 기도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상투적인 기도가 아닌, 가슴에서 울려 나오는 기도, 이 나라를 위한, 내 이웃을 향한 기도는 울분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대강절을 지내며 평화의 사자로 하나님 앞에 서길 바란다.

2010년 12월 6일 월요일

동성애와 기독교

동성애 논란이 후끈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군대에서 '계간' 즉 쌍방의 합의에 의한 동성간의 성적 행위를 금지한 법률이 위헌이라는 헌재의 판결에서 시작해서

동성애자 차별 금지법을 저지하려는 일부 기독교계 인사들의 저항이 소란스럽습니다.

이쯤에서 저도 동성애에 대한 입장을, 기독교인으로서의 입장을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우선, 동성애자에게 차별이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차별 금지법을 반대하는 기독교 인사들의 우려는 충분히 이해하나 차별은 금지되어야 하는 것이지 지지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일을 앞장서서 반대하는 일부 보수적 기독교 인사들의 논리는 성경이 그것을 금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약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은 동성애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지 그런 사람들을 차별하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2010년 12월 4일 토요일

미래목회 포럼 '자정 선언 결의문'

비교적 보수 성향을 가지고 있는 미래목회 포럼에서 교회와 목회자들의 자정을 요청하는 선언 결의문을 발표했다.

발표 내용이 매우 긍정적이고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눈에 띄는 점은 목회자에 대한 비판이 가장 우선시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비판이 원론적 이야기에서 비교적 구체적 대안으로 옮겨갔다는 부분도 고무적이다.

이런 긍정적인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한국교회가 이미 자정능력을 상실한 것 아닐까 하는 우려가 깊다.

이 또한 일부 목회자들의 자기 반성으로 끝나버릴 공산이 크기 때문이리라.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교회의 본질을 훼손하고 있는, 그 결과 교회의 사회적 이미지에 결정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주고 있는 대형교회에 대한 비판이 빠졌다는 것이다.

결의문 전문을 여기에 옮겨 본다.


자정 선언 결의문

시흥교회 방수성목사 승리?

담임목사 재신임 투표 결과를 가지고 분쟁중이던 시흥교회에 법원이 담임목사 손을 들어줬단다.

재신임 투표 결과를 인정하지 못하던 장로측 사람들이 소송을 했는데 법원이 이를 기각한 상황이다. => 자세한 기사보기

끝까지 자리를 지켰던 담임목사와 교인들은 크게 기뻐하며 본당 입구에 자축의 현수막까지 걸었다.

장로들은 이 판결에 불복하고 항소할 예정이란다.

이런 사태를 지켜보며 참 마음이 아프다. 특별히 시흥교회가 한국교회 안에 교회개혁을 주도해 오던 교회여서 더욱 마음이 아프다.

특히나 교회 앞에 걸려 있는 현수막이 내 마음을 더욱 짖누른다.

교회 안에 여러가지 문제들을 해결해 보기 위해 정관을 만들었는데 그로 인해 법정 싸움까지 갔다.

누구는 이겨서 기뻐하고 누구는 져서 분통해 하겠지만 누가 승자고 누가 패자인가?

일그러진 한국교회의 자화상을 보는 것같아, 왜곡된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무척이나 속이 쓰린다.

결국, 진정한 개혁은 제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억하게 된다.

개혁을 외치는 그 사람이 개혁될 때, 진짜 개혁이,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겠지...

새가족 성경공부

처음 교회에 오신 새가족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천편일률적인 교리공부에 제동을 걸어보고 싶다.

기독교는 교리종교가 아니라 삶의 종교라고 가르치면서 여전히 새가족들에게는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급제동 해서 교통흐름 어려워지는 것도 별로 바람직하지 않고 어떻게 새가족들을 가르쳐야 할지 심각한 고민이다.

이번에 5주동안 4명의 새가족을 가르친다. 한 명을 빼고는 전부 완전 초짜다.

이번엔 주기도를 중심으로 기독교 신앙을 가르치고 있는데 자꾸 교리공부쪽으로 흘러가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새가족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잘 소개하면서 기독교 삶을 가르칠 수 있을까?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답을 가지고 있는가?

2010년 12월 3일 금요일

착한 믿음

[최근 책 읽는게 재미가 없어졌습니다. 다시 책 쓰는 일을 시작해야 할까 봅니다. 묵혀 두었던 원고뭉치를 꺼내들어 대대적인 수정작업을 하며 다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책 제목은 가칭 '착한믿음'입니다. 믿음을 주제로 한 책인데 초고를 조금씩 올려볼까 합니다. 잘 쓰는 글은 아니자만 함께 나눌 수 있음에 감사하고 혹시 읽어보신 분들은 뜨거운 비판을 부탁드립니다.^^]

1부 믿음의 뿌리

믿음에는 뿌리가 있다. 믿음의 모든 행위와 태도는 모두 이 뿌리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뿌리가 건강하면 건강한 믿음으로 자랄 가능성이 커지고 그렇지 않으면 말라 죽거나 기형적인 나무가 된다.

평화의 왕 예수

오늘 교구 구역장 모임에서 이사야 9장 6절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지금 섬기는 교회의 일년 절기는 총동원 두 번이 전부입니다.

다른 절기는 모두 유명무실하죠^^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대림절은 저에게, 우리 모두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 같습니다.

온 나라 국민들이 전쟁의 위협앞에 떨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는 사분오열의 조짐을 보이며 여러가지 시끄러운 잡음이 들립니다.

그래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더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평화의 왕 되신 예수님이

진실로 높여지시길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사람들조차 전쟁을 운운하고,

교회의 중직자라 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향한 비난과 험담이 흉흉한 이 때,

평화의 왕이신 주님을 다시 한 번 기억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