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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18일 토요일

의존

1960년대 미국 신학계를 풍미했던 신 죽음의 신학(死神신학, theology of death of God)이라는 신학 사조가 있었다. 신학이란 것이 기본적으로 신에 관한 학문인데 그 신이 죽었다니 여간 도발적인 신학이 아닐 수 없다. 스스로 죽은 신에 관한 학문을 한다고 말하는 셈이니 엄밀히 말하면 신학이라고 부르기도 쉽지 않다.

이 신학을 주도했던 미국의 젊은 개신교 신학자들의 세상을 향한 태도 또한 만만치 않았다. ‘신의 장례식’에 사람들을 초대하는 대대적인 신문광고를 내고 신의 죽음을 공개적으로 애도하며 일면 축하했다.

신학자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지 의아하겠지만 신이 죽었다는 선언이 근 10여 년 동안 미국 신학계를 자극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나름대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신(死神)신학이 죽었다고 선언한 신은 전통적 기독교가 끈질기게 붙들고 있던 ‘초월적 신’이다. 산업혁명 이후 서구세계를 지배하던 종교적 세계가 붕괴되고 인간의 신에 대한 독립성과 책임성이 강조되는 세속적 세계가 도래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적인 종교세계 안에서 활동하던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신은 의미와 영향력을 상실해 갔고 신 죽음의 신학은 이런 신을 거부했다.

19세기 철학자 L.포이어바흐, F.헤겔, F.니체 등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지만 사신신학의 직접적인 뿌리는 독일의 신학자요 목회자인 D.본회퍼의 신학이다. 히틀러 암살에 가담했다가 처형당하기 전까지 옥중에서 그의 친구 에버하르트 베트게에게 쓴 편지에서 신 죽음의 신학에까지 이어지는 사상의 단초가 나타났다. 성인된 세계, 인간의 책임성과 같은 개념들이 하비 콕스, 존 로빈슨과 같은 세속화 신학자를 낳았고 세속화 신학의 영향으로 신 죽음의 신학이 태동한 것이다.

신 죽음의 신학, 세속화 신학이 전통신학과 구별되는 핵심 중의 하나는 인간의 독립성과 책임성의 강조이다. 전통신학이 초월적 신에 대한 의존을 중심으로 위계적 계층구조를 이루고 있다면 신 죽음의 신학은 성육신한 예수를 따라가는 개인의 독립성과 책임이 강조된다. 전통신학 안에서 중요한 것은 초월적 권위에 대한 복종이지만 신 죽음의 신학 안에서는 개인의 결단과 헌신이 더 중요하다.

극단적 태도를 취했던 신 죽음의 신학에서 세속세계 안에서 인간의 신적 책임을 강조한 세속화 신학에 이르기까지 ‘세속화’가 신학계에 미친 영향은 거대한 파도와 같다. 정치신학이나 생태신학, 최근 활발하게 논의되는 종교 다원주의조차도 세속화 신학의 영향에서 자유롭다 할 수 없을 만큼 세속화 신학은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여러 가지 부정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세속화 신학이나 사신신학의 공헌은 무시될 수 없다. 초월적인 것들을 향한 의존으로 말미암은 기복적이고 추상적 믿음에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향한 인간의 책임의식을 일깨운 것 등은 세속화 신학이 끼친 핵심적인 영향력이고 지금도 그 영향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물론 세속화 신학이 의도한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가 있다고 해서 세속화 신학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문제 또한 가벼이 넘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창조세계를 향한 인간의 책임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고자 하는 인간적 결단이 강조되면서 자연스레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의존성이 약화되고 무시되는 결과가 나왔다.
기본적으로 믿음은 의존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무리 좋은 미사여구로 치장하여도 하나님을 향한 의존이 없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하나님께 더 많이 의존될수록 그 믿음은 좋은 믿음이 된다.

의존은 내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데서 시작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을 의지가 박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유치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의존이라는 상태가 어리석은 사람들이나 갖는 나약한 심리상태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나약한 행동이라고 여기는 것은 그 믿음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의존이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신앙인이 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하여 의존적 존재가 되라고 가르치신다. 세속화 신학의 그릇된 결과물들과는 달리 예수는 언제나 하나님께 의존적이었다. 예수의 삶에 하나님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행동한 일이 있는가? 아니다. 예수는 언제나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었고 의존적인 삶을 살아가셨다.

신 죽음의 신학, 세속화 신학이 요청하는 독립성이 예수의 믿음 안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더 의존적이 되기 위해 기도하셨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요청하셨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첫 번째 가르침인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선포는 의존이라는 개념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사실, 가난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의존이다.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상태가 바로 가난의 현주소이다.

물론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의 말씀은 매우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고 가난이 가진 의존이라는 핵심 개념을 피해갈 해석은 가능하지 않다. 모든 해석의 이면에는 가난이 지닌 의존성과 그 의존성으로 말미암은 복이 전제된다.

가난이 가진 의존성은 필연적으로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한다. 예수의 삶은 가난했고 그 의존성 안에서 예수는 하나님을 만났다. 그리고 동일하게 가난한 사람들을 향해 복 있다 선언하시면서 그들의 의존성에 무게를 싫어 주셨다. 의존성이 곧 믿음의 가장 핵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한 의존성 안에 있는 하나님 경험은 필연적으로 인간이 하나님뿐만 아니라 모든 부분에서 의존되어 있는 존재라는 인식을 일깨운다. 그래서 자신의 연약함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삶은 참으로 복된 삶이다. 참으로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인간은 하나님뿐만 아니라 살면서 만나는 거의 모든 것에 의존되어 있다. 특별히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인 자연에 의존되어 있다. 자연의 파괴는 결국 인간의 삶 또한 파멸시킬 것이다. 인간이 철저하게 자연에 종속되어 있고 의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서로에게 긴밀하게 의존되어 있다. 인간은 누구나 크고 작은 영역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죄의 결과들을 주고받는다. 누구도 이 상호작용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가난이란 내가 종속되어 있는 이 상호작용, 의존관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 안에 내가 있음을 깨닫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다. 내가 다른 사람을 향한 의존 없이 살아갈 수 없음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 가난한 사람, 복 있는 사람이다. 예수의 믿음은 이 가난, 의존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세상은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상태를 ‘감정’으로 이해한다. 나약한 마음의 안식처로서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의지하고픈 심리 상태를 의존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믿음을 나약함의 상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믿음 안에 있는 의존은 감정상태가 아니다. 믿음이 요청하는 의존은 삶의 상황에 대한 인식이고 행동을 요청하는 의지의 상태이다. 즉, 실존적 의존의 상태, 그것이 예수의 믿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을 향한 의존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세속화 신학에서 말하고자 한 것이 이것이었을 것이다. 지나친 감정적 의존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에 의존되는 것,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 언급 없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을 세속화 신학은 지향했다. 물론 거기에도 부작용은 나타났지만 말이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4장 34절에서 자신의 양식이 하나님의 뜻을 완성시키는 것이라고 선포하시며 자신의 삶과 행동이 하나님의 뜻에 종속되어 있음을 말씀하셨다. 이 말씀뿐만 아니라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모습은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에 의존되어 살아가는 모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독립성을 주장한 적은 어디에도 없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감정적으로만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 그래서 믿음 생활 하면서 더 나약해지고 무책임해지며 기복적인 신앙으로 전락해 간다. 세상 사람들이 비판하는 나약한 의존인의 표상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초월성이나 기적은 진리를 보증하는 최고의 가치로 추앙된다. 종교적 권위에 집착하게 되고 하나님을 향한 건강한 순종과 맹목적 교리추종의 구분이 사라진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책임과 독립성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의존 자체를 부정해 간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무리한 도전을 감행한다. 마치 하나님 없이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스스로 의식 있다고 생각하는 신앙인들, 기도를 우습게 아는 신앙인들, 종교적 권위를 하찮게 여기며 스스로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신앙인들에게 이런 모습이 두드러진다.

예수의 믿음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향한 의존에서 시작해서 하나님을 향한 의존에서 끝났다. 그러나 그 믿음은 감정적 의존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의존되어 있는 실존적 의존이다. 이 의존을 통하여 행동하고, 이 의존을 통하여 살아가는 것, 그것이 좋은 믿음이다.

물론 때로 하나님을 향한 감정적 의존의 때가 찾아온다. 인생의 어두운 밤을 만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반석으로 고백하며 철저하게 깊은 의존의 관계로 들어간다. 그러나 언제나 이런 감정적 의존에만 치우쳐 그 의존관계에서 경험되는 감정적 카타르시스만을 원한다면 그 의존은 거짓 열매만을 맺게 될 것이다.

믿음의 질은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질과 비례한다. 더 많이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는 사람이 더 좋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더 많이 의존된 삶을 살아라. 그러면 의존이 올무가 아니라 진정한 해방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때에만 예수 안에 있는 참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

댓글 2개:

  1. 무서운것은 믿음이 조금 생겼다고 생각할 그 즈음에 건강 물질 안전... 등등을 구하는 것은 아주 하찮다는 생각이 잦아들때인것같더라구요.. 그래서 언제부터인지 사사롭다여기는 일을 하나님께 올려드리지 않고... 마치 대의를 꿈꾸는 사람인냥.. 교만으로 똘똘 뭉쳐서...제 얘기 입니다. 어느것하나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을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어 회개했습니다. 하나님께 안기지못할 사사로운 것은 없는것같습니다. 자꾸 이런 말씀을 듣게 하시고 보게 하시는거보니.. 제가 많이 교만한 사람임을 깨닫게 하시는것같아요. 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 감사합니다.
    봄날씨처럼 따뜻하네요. 따뜻한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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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하나님을 향한 의존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것에서부터 시작하지요..
    하나님의 반응은 내 태도나 행위와 일대일 상관관계에 있지 않은 것 같아요.
    어찌하시든 그 주권에 나를 맡기는 것, 그것이 의존 아닐까요? 부족한 글을 통해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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