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면, 혹은 한 해의 중요한 시점에 많은 교회들이 특별 새벽기도회를 한다. 평소의 새벽기도회를 잘 준비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서 기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진행하는 것일게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회 '특새(특별 새벽 기도회의 준말)'에서 선포되는 메시지는 늘 대동소이하다. 십일조 잘 하고, 교회 잘 나오고, 봉사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물론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의 교회들이 그렇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그리고 특새에 나오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아멘하며 반응한다.
그런데 이런 설교, 이런 기도회를 '특별' 이란 이름까지 붙여가며 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형식은 특별한데 내용은 조금도 특별하지 않다. 겉모습은 화려하게 꾸몄는데, 속은 여전히 곪아 있는 듯 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려움과 고난을 모르시는 것도 아닌데, 특별이란 이름까지 붙여서 복 받으라는 기도회를 해야하는가 생각이 든다.
물론, 우리 각 개인이 겪는 고난의 무게를 과소평가 하거나, 그런 문제로 기도하는 것이 유치하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고난의 문제는 중대한 것이고 하나님을 만나며 경험하는 가장 원초적인 재료가 된다.
그러나,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모여 하나같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혹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욕망을 실현 시키기 위해서 '복 달라'고 조르는 '특별 새벽 기도회'는 뭔가 아니다 싶다.
'한(恨)'을 가진 민족, 그 민족의 고난과 아픔을 달래며 하나님을 경험하게 해준 새벽 기도회, 그 아름다운 전통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 볼 일이다.
고난과 탄식은 없고, 神의 자리에 올라선 '돈'과 그 神의 아들인 '성공', 끊임 없이 우리를 부추기는 神의 영인 '욕망'이라는 세속적 삼위일체만이 '특별 새벽 기도회'를 이끌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아직, 기도를 많이 한다고 자랑하는 교회들에서, 용산 참사를 위한 기도회를 별로 보지 못했다. 연평도 포격으로 인한 실향민들을 위한 기도회도 잘 보이지 않는다. 맹렬한 추위에 가슴 졸이며 떨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을 위한 기도의 소리는 너무 작게 들린다.
고난과 탄식이 특별 새벽 기도회의 특별한 게스트여야 하지 않겠는가? 특별 게스트 없는 특별 새벽기도회는 공허할 뿐이다.
나의 탄식 뿐만 아니라 우리의 탄식이 특새에 초청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이웃에게서 탄식이 느껴질 때, 탄식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웃을 만날 때, 그 때가 특새를 열 때이다.
상상교회에도 특별 새벽기도회, 혹은 특별 기도회가 있겠지... 그러나 그 기도회는 때가 되면 찾아오는 연중 행사가 아니라, 진짜 기도해야 할 '우리'의 아픔이 있을 때, 바로 그 때 드려지기를...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해주시니 속이 다 후련해지네요.진정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몰라서일까요? 왜 아직도 이방인이 구하는 기도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까요? 우리주님은...나의 모든것 다아시는 주님은 잠도 안자고 새벽부터 떼쓰며 졸라대는 우리가 얼마나 답답하실까요?
답글삭제고난의 짐을 감당하는 아버지의 영광의 기쁨을 우리도 알
기 원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눈물을 닦는 기도를 감당할수 있기를 바람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