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장 43-54절 (본문 보기)
예수의 첫 번째 표적(2:1)으로 시작되는 요한복음의 1부가 예수의 두 번째 표적인 가이사의 신하의 아들을 고친 사건으로 마무리된다. 엄밀히 말하면 갈릴리에서의 두 번째 표적이다. 가나 혼인잔치 이후 예루살렘에서 예수는 많은 표적을 행했고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사람들이 이 표적을 보고 예수를 믿었다(4:45).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지속적인 예루살렘 방문이 나오는데(3번 정도의 예루살렘 상경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의 예루살렘 방문으로 요한복음의 큰 단락이 나누어진다(1부 2:1~4:54, 2부 5:1~7:9, 3부 7:10~11:57, 이어서 마지막 유월절 단락이 이어진다). 그리고 각각의 예루살렘 방문을 중심으로 예수의 표적이 두 번씩 등장한다(1부 혼인잔치 표적, 왕의 신하의 아들 고침, 2부 38년 된 병자 고침, 오천 명 급식, 3부 나면서 맹인 된 사람 치유, 나사로를 살림, 마지막 단락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첫 번째 방문은 2장에서 4장까지의 단락으로 갈릴리 가나에서 첫 표적을 행한 후 예루살렘을 방문 한 후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다시 갈릴리로 돌아와 두 번째 표적을 행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고 있다.
요한복음의 표적 사건들에 변함없이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표적-봄-믿음’이라는 도식이 이곳에서도 여전히 등장한다(4:45, 48, 50, 53). 한 가지 독특한 사항은 보지 못하면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탄식이 등장한다는 것이다(4:48). 이는 요한복음이 궁극적으로 요청하는 믿음이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더 복되다(20:29)’는 맥락 안에 놓여 있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더 복되다고 하여 표적과 표적을 보고 믿는 것의 중요성이 감소되지는 않는다. 요한복음은 지속적으로 예수의 표적을 증거하고 있고 그 표적으로 말미암게 된 믿음의 증언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요한복음은 우리의 믿음이란 것이 본질적으로 표적을 보고 믿는 수준을 넘어서야 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요한복음이 계속해서 표적을 말하는 것이나 믿음을 요청하는 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걸려 있다. 믿음의 터미널이 부활이라는 말이다. 모든 표적이 예수의 부활에 맞춰져 있는 것처럼 표적을 보고 믿는 믿음 또한 예수의 부활과 그 부활 안에서 우리가 맞이하게 될 부활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우리의 믿음은 부활을 믿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더 복되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예수를 지속적으로 증거 하시기 때문에(15:26) 그 표적 안에서 우리가 믿음을 갖지만 우리의 부활에 대한 소망은 궁극적으로 미래적인 사건이고 표적에 대한 의존을 넘어 보지 않고 믿어야 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더 복되다’는 예수의 말씀이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도마에게 주어진 말씀임을 기억할 때 표적만을 요구하는 무리들에 대한 예수의 탄식이 바른 맥락을 찾게 된다.
가나에서의 첫 번째 표적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연결되어 있던 것처럼 갈릴리에서의 두 번째 표적 또한 ‘죽음’이라는 모티브를 통해 기술된다(4:49). 죽음의 위협 앞에 처해있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으로 예수의 표적이 하나님의 치유, 궁극적으로는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가리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요한복음의 이 본문에는 공관복음에 나타난 기사와 비교해서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본문에 나타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신 사건은 마태복음 8장과 누가복음 7장에 기록된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것과 동일한 사건으로 전승의 과정에서 요한복음이 의도적으로 이를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요한복음은 백부장을 '왕의 신하'로 옮겨 적었는데 여기에 요한복음의 의도가 보인다.
일차적으로 왕은 가이사를 의미하는 표현이다. 성경은 지속적으로 가이사가 아니라 예수가 왕이라고 증언하는데, 요한복음에 예수를 왕으로 표현하는 구절이 압도적으로 많다(마태복음 7회, 마가복음 6회, 누가복음 6회, 요한복음 11회).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주제로 하고 있는 마태복음보다도 요한복음이 예수의 왕 되심을 더 많이 증언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에는 왕이신 예수와 가이사와의 대립 구도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는 요한복음이 로마와의 정치적 대립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로마 황제가 왕이 아니라 예수가 세상의 왕이심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예수께서 표적을 행하시는 것이 로마인들의 공격 빌미를 제공한다는 공회원들의 말이나(11:47-48) 예수의 왕 되심이 가이사에 대한 반역이라는 직접적인 언급(19:12, 15)이 이런 대립 구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런 맥락 안에서 '왕' 이란 표현이 처음 등장하는 본문은 '왕의 신하'가 예수께 찾아와 도움을 구한 것을 강조한다. 이것이 예수의 왕 되심에 대한 분명한 표적이다.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으로 처형당하며 진정한 왕이 되신 예수 앞에 거짓 왕 가이사의 신하가 찾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진짜 표적에 관한 이야기이다.
모든 군사력, 경제력, 제도를 통제하는 정치력, 그리고 언론을 장악한 이데올로기적 힘이 로마 황제에게 집중되어 있는 상황에서 요한복음은 예수가 진짜 왕이라고 도발적으로 선언한다. 로마 황제가 진짜 왕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그의 신하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조차도 죽음에서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의 왕 되심은 인간이 처한 가장 궁극적 문제인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어지는 실제적 사건이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듯이, 죽음 안에 놓여 있는 인간의 현 주소가 예수의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 죽음의 위협 앞에 놓여 있던 신하의 아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 이것이 요한복음의 표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실상이다.
보여주지 않아 믿지 않는 그들.. 또 구약을 통해 보면 끊임 없이 보여주지만 여전히 배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답글삭제한때 홍해의 기적같은 기적 한번만 보여달라고 하나님께 떼쓴적이 있어요.. 참 아기 같았죠.. 왜냐면 그 때는 정말 답답해서 뭔가 보고 싶었거든요.. 표적. 봄 . 믿음 의 공식안에 있고 싶었었나 봅니다.
되돌아보니..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이 모습 이대로 안아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고 내가 노력했다기보다 여전히 나를 위해 끊임없이 일하신 그분의 열심이 있었기에.. 믿음 역시 하나님의 큰 은혜가 아닌가 다시금 감사드리게 됩니다. 너무 쌩뚱맞은 생각이.. 편하게 적어봅니다.. 저 요한복음 팬입니다.. ^^
늘 귀한 간증 감사합니다. 팬이 되어주시니... 하하하. 감사 ^^
답글삭제읽기 좋게 쓴 글이 아닌, 생각나는대로 써 놓은 글이라 읽기가 쉽지 않으실텐데...
아무튼 좋은 간증과 말씀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