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소개

안녕하세요 박성장입니다.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하늘을 보며, 하늘의 뜻을 생각하며 오늘도 힘 내시기 바랍니다.

2010년 12월 31일 금요일

특별 새벽 기도회

연말이 되면, 혹은 한 해의 중요한 시점에 많은 교회들이 특별 새벽기도회를 한다. 평소의 새벽기도회를 잘 준비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서 기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진행하는 것일게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회 '특새(특별 새벽 기도회의 준말)'에서 선포되는 메시지는 늘 대동소이하다. 십일조 잘 하고, 교회 잘 나오고, 봉사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물론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의 교회들이 그렇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그리고 특새에 나오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아멘하며 반응한다.

그런데 이런 설교, 이런 기도회를 '특별' 이란 이름까지 붙여가며 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형식은 특별한데 내용은 조금도 특별하지 않다. 겉모습은 화려하게 꾸몄는데, 속은 여전히 곪아 있는 듯 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려움과 고난을 모르시는 것도 아닌데, 특별이란 이름까지 붙여서 복 받으라는 기도회를 해야하는가 생각이 든다.

물론, 우리 각 개인이 겪는 고난의 무게를 과소평가 하거나, 그런 문제로 기도하는 것이 유치하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고난의 문제는 중대한 것이고 하나님을 만나며 경험하는 가장 원초적인 재료가 된다.

그러나,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모여 하나같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혹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욕망을 실현 시키기 위해서 '복 달라'고 조르는 '특별 새벽 기도회'는 뭔가 아니다 싶다.

'한(恨)'을 가진 민족, 그 민족의 고난과 아픔을 달래며 하나님을 경험하게 해준 새벽 기도회, 그 아름다운 전통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 볼 일이다.

고난과 탄식은 없고, 神의 자리에 올라선 '돈'과 그 神의 아들인 '성공', 끊임 없이 우리를 부추기는 神의 영인 '욕망'이라는 세속적 삼위일체만이 '특별 새벽 기도회'를 이끌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아직, 기도를 많이 한다고 자랑하는 교회들에서, 용산 참사를 위한 기도회를 별로 보지 못했다. 연평도 포격으로 인한 실향민들을 위한 기도회도 잘 보이지 않는다. 맹렬한 추위에 가슴 졸이며 떨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을 위한 기도의 소리는 너무 작게 들린다.

고난과 탄식이 특별 새벽 기도회의 특별한 게스트여야 하지 않겠는가? 특별 게스트 없는 특별 새벽기도회는 공허할 뿐이다.

나의 탄식 뿐만 아니라 우리의 탄식이 특새에 초청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이웃에게서 탄식이 느껴질 때, 탄식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웃을 만날 때, 그 때가 특새를 열 때이다.

상상교회에도 특별 새벽기도회, 혹은 특별 기도회가 있겠지... 그러나 그 기도회는 때가 되면 찾아오는 연중 행사가 아니라, 진짜 기도해야 할 '우리'의 아픔이 있을 때, 바로 그 때 드려지기를...

2010년 12월 29일 수요일

존경하는 박동현 선생님의 사순절 기도문

장신대 구약학 교수로 재직중인 박동현 선생님의 기도문을 올려봅니다.

당신의 홈페이지에 공개한 자료이기에 은혜를 나누는 마음으로 올립니다.

너무 철저하고 엄격하신 분이라 마음 한 편엔 부담도 되지만

존경하고, 본 받을만 하고, 배우고 싶기도 합니다.

이 기도는 선생님의 기도임과 동시에 저의 기도이고, 저희 상상교회가 끊임없이 고백할 기도입니다.

[목회 기도문]

하나님, 2010년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는 절기에 접어들어 둘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또 오늘은 양력 새해 둘째 달 마지막 날입니다.

책소개- '하나님과 제국' (존 도미니크 크로산, 포이에마)

로버트 펑크와 함께 '예수 세미나'를 창설한 가톨릭 사제 출신의 성서학자, 크로산.

미국이 또 다른 로마제국으로 부상하며 제국주의적 힘을 과시하는 현 시점에서 크로산은 미국이라는 제국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신앙적 태도에 관해 말한다.

이 책의 가장 핵심 개념은

문명이라는 폭력의 정상성과 대안으로서의 하나님 정의의 급진성이 대립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과 승리를 통한 평화라는 문명의 정상성과 비폭력과 정의를 통한 평화라는 하나님의 급진성 안에 있는 갈등과 다툼이 성경의 핵심이고 기독교의 비전이라는 것.

그런 비전 안에서 예수의 평화적 초림과 바울의 급진적 기독교 비전, 그 안에 있는 평화를 옹호하고, 비바울서신에 나타난 바울의 보수적 회기와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묵시적 전쟁 신화를 배격한다.

제국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미국의 근본주의적 기독교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도발적이지만 깊이 새겨 들어야 하는 강력한 메시지가 들어 있다고 보인다.

그는 철저하게 예수를 지혜교사로 본다. 그런면에서 묵시가로서의 예수를 말하는 라이트와는 정 반대 노선에 있다.

그는 성경에 나타난 묵시가로서의 예수는 본래적 예수가 아니라고 여기고 철저하게 배격한다. 오직 지혜교사와 윤리적 가르침으로서의 예수만을 본래적 예수라 못 박고 모든 논의를 진행 하는 듯 하다.

 그가 이토록 철저하게 묵시적 예수를 배격하는데에는 묵시에 대한 편협한 이해가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글을 읽으며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는 철저하게 공감하게 되지만, 그가 말하는 예수, 바울은 시대적 요청에 반응한, 시대적 산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우리가 이해하는 예수는 모두 그럴 것이다. 시대적 산물로서의 예수이해를 완전히 벗어버리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글에선 지나친 감이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역사적 예수를 정당하게 다루지 못한 것이 아닐까?

그가 예수의 모습을 통해 미국 사회에, 우리의 신앙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충분히 공감이 가지만, 그가 역사적 예수를 정당하게 다루었는가 하는데에는 물음표가 달라 붙는다.

그러나, 제국적 권력을 드러내는 미국과 그 미국을 미친듯이 따라가는 한국 사회,

신자유주의라는 신기루와 막강한 군사력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열변을 토하는 예수 장사치들에게 지금 크로산의 메시지가 필요한 것 아닐까?


* 저자의 다른 책들

역사적 예수

예수: 사회적 혁명가의 전기

예수의 역사

2010년 12월 26일 일요일

큰 딸 발치

큰 아이 이빨이 하나씩 빠져 나갑니다.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데 벌써 5개를 뺐습니다.

윗쪽 앞니 두개가 흔들렸는데 그 중 하나가 많이 흔들려서 아프다길래

집에서 뺀치로 잡아 뺐습니다(아빠가 좀 무식합니다 ^^).

여기저기 숭숭 뚫린 치아 모습이 웃기네요.

그런데 빼낸 치아를 보다보니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치아의 모습과 다르다는 사실을 보게되었습니다.

'아!~~ 유치에는 뿌리가 없구나!'

영구치와 달리 유치에는 뿌리가 없습니다. 한 5년정도 잠시 버틸 정도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빠져야 하기 때문이겠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생명도 이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우리의 생명은 잠시 있다 없어질 것이지요. 뿌리가 없기 때문에 연약하고 쉽게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주실 생명은 뿌리가 깊어 절대 흔들리거나 빠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지요.

이 소망 안에서, 유치가 빠져 나가듯 우리의 생명도 죽어야 새로운 생명이 돋아납니다. 현재의 생명을 아까워 한다면 새로운 생명이 바르게 돋아나지 못해 덧니처럼 되고 맙니다.

부활의 참 소망 안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따라갑시다.. ^^ 할렐루야 ~~~ ^^

2010년 12월 25일 토요일

'아름다운 세상을 여는 예배' 동영상



낯이 참 두껍다는 생각이 듭니다.

휴대전화로 촬영해 봤는데,

이런 노래실력 가지고도 사람들에게 공개할 정도면

두꺼워도 보통 두꺼운게 아닐겁니다.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 마음에 올려봅니다. ^^

어린이 도서관

도심에 있는 저소득층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한 부모 가정이나 폭력 가정,

혹은 맞벌이로 방치되어 있는 아이들,

이런 아이들에게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하면, 지적 능력도 떨어지고 자신감도 없고 대인관계 능력도 떨어지다보니 마음 속에 분노와 공격적 성향이 짙어집니다.

이런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첫째, 책과 인문학, 둘째, 심각한 수준에 있는 아이들을 위한 치유센터(음악, 미술, 놀이 등등)라 여겨집니다.

위의 사진은 일산에 있는 한 교회에서 운영하는 어린이 도서관입니다.

예배당의 2/3를 도서관으로 사용합니다. 교인은 많지 않지만 참 아름다운 일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교회를 운영하게 되면 꼭 어린이 전용 도서관을 해야겠습니다.

함께 하실 분 없나요? 네? ^^

2010년 12월 24일 금요일

DREAM - MPJ 싱글앨범

이번에 동생이 싱글앨범을 냈습니다.

돈도 없고, 빽도 없이 혼자서 10년 가까운 시간을 묵묵히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성공을 위한 세상적 수완도 없는 녀석이라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조금 아립니다.

몇 차례 앨범을 냈는데, 성과가 없습니다. 결국,

현실적 생활고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마지막이라 생각하는 싱글 앨범을 냈네요.. ^^

힙합을 하기 때문에 이곳에 방문하는 분들의 정서와는 잘 맞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한번 들어보시고, 가사도 음미해 보시고, 평점도 부탁드려봅니다.   [싸이월드 평점 주러가기]

동생의 가수명은 'MPJ', 이번 곡명은 'DREAM'이네요 ^^





 가사 -------------------------------- 가 안 보이면 '더 보기' 누르세요 ^^

요한복음연구 15 - 예수의 두 번째 표적

요한복음 4장 43-54절 (본문 보기)


예수의 첫 번째 표적(2:1)으로 시작되는 요한복음의 1부가 예수의 두 번째 표적인 가이사의 신하의 아들을 고친 사건으로 마무리된다. 엄밀히 말하면 갈릴리에서의 두 번째 표적이다. 가나 혼인잔치 이후 예루살렘에서 예수는 많은 표적을 행했고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사람들이 이 표적을 보고 예수를 믿었다(4:45).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지속적인 예루살렘 방문이 나오는데(3번 정도의 예루살렘 상경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의 예루살렘 방문으로 요한복음의 큰 단락이 나누어진다(1부 2:1~4:54, 2부 5:1~7:9, 3부 7:10~11:57, 이어서 마지막 유월절 단락이 이어진다). 그리고 각각의 예루살렘 방문을 중심으로 예수의 표적이 두 번씩 등장한다(1부 혼인잔치 표적, 왕의 신하의 아들 고침, 2부 38년 된 병자 고침, 오천 명 급식, 3부 나면서 맹인 된 사람 치유, 나사로를 살림, 마지막 단락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2010년 12월 21일 화요일

성탄 발표회

 


두 딸 아이가 교회에서 하는 성탄절 발표회에 영광스럽게 뽑혀 주일 저녁 부채춤 공연을 잠깐 했습니다.

꽤나 높은 경쟁률을 뚫고 선 자리라 최선을 다해 열심히 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응원을 했습니다.

아이들 공연 기록으로 남겨줘야 하겠기에 카메라도 빌리고,

무대와 객석의 거리가 멀어 망원렌즈도 빌렸습니다.

아이들 사진을 찍으며 이 아이들이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 이 사진들을 보며 어릴적을 회상할 때, 그 때 이 아이들의 입가에 번질 미소에 내 마음도 행복했습니다.

아비란 그런건가 봅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도 그러시겠지요.

지금도 우리의 사진을 찍으시며 행복해 하시겠지요.. ^^

책소개- '로마서 산책' 권연경, 복있는 사람



안양대 교수로 재직중인 권연경교수가 로마서를 쉽게 풀어 쓴 책이다.

비교적 보수진영에서 개혁적 성향을 가지고 성경연구와 성경연구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는 귀한 분이다.

'바울 연구의 새관점'을 상당부분 수용하면서 전통적 칭의 사상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이 보인다.

주로 1장에서 11장에 이르는 내용들을 중심으로 다루었고 12장 이후의 내용은 간략하게 정리했다.

로마서를 읽으면서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들을 비교적 충실하게 다루었다.

'칭의'와 '구원'의 구분, 현재와 미래의 긴장, 창조세계의 회복, 율법의 외적 증거와 내적 순종, 부활에 대한 믿음과 성령의 역할, 이스라엘의 구원문제 등 핵심적인 논점들을 정확하게 풀어가고 있다.

나에게도 몇 가지 통찰들이 새롭게 다가왔고, 로마서의 정리되지 않는 개념들이 정리되는 소중한 만남이었다.
아쉬운 점은 율법의 역할과 복음 안에서의 위치가 여러가지 설명에도 불구하고 불확실하고

율법에 관한 가장 핵심적인 구절 중 하나인 8장의 '육체의 율법'과 '성령의 율법'이 너무 쉽게 간과되었다.

성령의 율법을 그냥 성령의 법칙으로 이해했는데 이에 대한 근거가 제시되지 않았다. 물론 평신도들을 겨냥하고 쓴 글이기에 그랬으리라 이해는 되지만, 아쉽다.

전반적으로 로마서의 끊임없이 등장하는 '율법(법)'이라는 개념에 대한 충분한 정의나 의미 파악이 조금 약한 듯 하다.

책의 후반부로 가면서 바울의 논지를 계속 따라가기는 하지만 로마서 전반에 걸친 논지에 대한 이해나 설명이 약해지는 느낌을 준다.

이런 몇몇의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로마서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그런 책이다.

2010년 12월 18일 토요일

의존

1960년대 미국 신학계를 풍미했던 신 죽음의 신학(死神신학, theology of death of God)이라는 신학 사조가 있었다. 신학이란 것이 기본적으로 신에 관한 학문인데 그 신이 죽었다니 여간 도발적인 신학이 아닐 수 없다. 스스로 죽은 신에 관한 학문을 한다고 말하는 셈이니 엄밀히 말하면 신학이라고 부르기도 쉽지 않다.

이 신학을 주도했던 미국의 젊은 개신교 신학자들의 세상을 향한 태도 또한 만만치 않았다. ‘신의 장례식’에 사람들을 초대하는 대대적인 신문광고를 내고 신의 죽음을 공개적으로 애도하며 일면 축하했다.

2010년 12월 16일 목요일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문학동네) - Book Review

파울로 코엘료를 세계에 드러내 준 작품.

신부가 되기 위해 라틴어, 스페인어, 신학을 공부한 산티아고는 어느날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양치기가 되어 길을 떠난다.

꿈 속에서 본 보물을 찾기 위해 이집트의 피라미드로 긴 여행을 시작하고...

집시여인, 늙은 왕, 도둑, 화학자, 낙타몰이꾼, 아름다운 연인 파티마, 절대적인 사막의 침묵과 죽음의 위협 그리고 마침내 연금술사를 만나 자신의 보물을 찾게 되는데.....

자아의 신화를 찾아 떠나는 자만이 발견할 수 있는 자신의 보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당신도 자아의 신화를 찾아 용기있는 한 발자국 걸음을 내 딪어 보시길...


** 저자의 다른 작품들





2010년 12월 14일 화요일

아름다운 세상을 여는 예배 OST

노래 만드는 참에 하나 더 만들었습니다.

앞으로 시작하게 될 '아름다운 세상을 여는 예배'를 위한 곡입니다.

그래서 노래 제목도 '아름다운 세상을 여는 예배'입니다.

     우리의 눈이 주님 지으신 아름다운 세상을 보네
     우리의 귀에 참 좋았더라던 주님의 음성이 들리네
     지금은 비록 가시와 엉겅퀴 수고와 눈물뿐이지만
     십자가 지고가신 주님의 눈물 이 세상이 빛을 보았네
     우리는 예배하리라 주님 이 땅 다스리도록
     아름다운 세상을 여는 참 예배자로 서리라

부끄럽기도 하고... 이런 여유를 부릴 수 있어 좋기도 합니다. ^^

2010년 12월 13일 월요일

'평화의 왕' 동영상 촬영



내 생애 최초의 자작곡 '평화의 왕'을 동영상으로 찍어봤습니다.

주안장로교회 서울경기교구 구역장님들께 한 약속도 있고 해서...

노래를 참 못 부르는구나... 하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

은혜가 되시길 바라고..

제대로 된 반주에 잘 부르는 노래는 며칠 후에 올리겠습니다. ^^

2010년 12월 12일 일요일

내 생애 최초의 자작곡

드디어 곡이 완성이 됐습니다.

썩 맘에 들진 않지만 첫번째 곡으론 그럭저럭 만족입니다.

제목은 "평화의 왕 (부제: 두리반을 위하여)" 로 정했습니다.

처음 만들었던 곳에서 뒤쪽 코러스 부분을 수정했습니다.

코드 작성은 아내의 도움을 받았구요(이 페이지를 빌어 고마움을 전합니다).

동생이 연주 파일을 만들어 주기로 했습니다(동생이 대중음악(힙합)을 합니다).

수요일까지 해주기로 했으니 목요일이나 금요일쯤에 음악 파일을 올릴 수 있겠군요..


아름다운 세상을 여는 예배

" 아름다운 세상을 여는 예배 "


은혜 받기 위한 예배가 아닙니다.

내 정서적, 영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예배가 아닙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열기 위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움직이시도록 나 자신을 '공개'하고

하나님을 뜻을 묻기 위해 '공부'하는 예배입니다.

내 만족을 위한 찬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과 다스림을 구하며 이 세상을 향한 중보의 찬양이 드려지고

설교 대신 성경을 연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는 시간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물신 숭배와 외모지상주의, 권력에 대한 탐욕으로 물든 이 세대를 향한 아픔이 있다면,

하나님이 계획하셨던 본래의 아름다움을 향한 갈증이 있다면

'아름다운 세상을 여는 예배'에 나아와

하나님의 뜻을 묻고 이 세상을 위해 중보자로 세워지시는, 그런 시간을 꿈꿉니다.

지금 당장 무엇을 시작할 수는 없지만,

누구나 참여해서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그런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나의 남아 있는 목회 인생을 드려, 이 예배를 꼭... 하나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2010년 12월 10일 금요일

두리반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라는 대강절 설교를 준비하다가 (설교 원고는 여기에 => 원고보기)
'두리반' 이라는 식당, 지금은 음식 대신 노래와 시와 부르짖음을 팔고 있는 식당을 생각하며
노래를 하나 만들어 봤습니다.

제목은 뭘로 할까 고민하다
일단 '두리반'으로 정했구요.

세세한 부분 조금 더 수정을 해야겠지만
일단 완성된 것이니 함 올려 봅니다

기성 찬양에 비해 많이 부족하고...
나도 모르게 다른 곡을 부분부분 따라한 곳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 그런 부분이 있다 하더라고 의도적 표절은 아니니 너그러이 용납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엔 직접 노래 부른 영상을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2010년 12월 7일 화요일

요한복음 연구 14 - 예수의 양식


요한복음 4장 27-42절 (본문 보기)
예수의 양식

‘누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가?’ 다른 표현을 쓰자면 ‘누가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인가?’ 라는 핵심적인 대화에 이어 본문에는 제자들과 예수께서 나눈 대화들이 기록되어 있다. 특별히 제자들과의 대화는 여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의 예수에 대한 고백인 ‘그리스도’, ‘세상의 구주’ 라는 표현 중간에 위치하며 메시아로서의 예수의 사명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대화는 크게 두 가지 내용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하나님의 일을 완성시키는 것이 메시아의 양식이라는 것. 둘째, 추수 때가 되었고 제자들은 추수 꾼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
태초(1:1)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계획이 메시아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요한복음은 주장한다. 예수께서는 그 일을 위해서 오셨고 그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으셨다(4:34). 예수께서는 심지어 이 사명을 먹고 산다고 표현하셨다.

대강절 설교 - 평화의 왕 예수

오는 주일 1부 대강절에 설교를 하게되었습니다.

설교 본문으로 이사야 9장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나누려고 하는데, '공평과 정의'라는 말씀이 눈에 밟힙니다.

한 아기가 평화의 왕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는 말씀에는 '분노'가 서려 있습니다.

억압과 착취, 어둠과 절망을 향한, 불의한 악인들을 향한 거룩한 분노가 깊이 배어 있음을 느낍니다.

설교를 준비하며 내 자신을 묵상해보니 내 안에 이런 분노가 사라져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가난하고 궁핍하던 시절엔

잘못된 제도, 악의 장벽들, 불의한 지도자들, 그리고 거기에 자꾸만 순응하려는 나 자신을 향한 분노가 있었는데

이젠 그런 분노가 사라져 갑니다.

교회의 녹을 먹으며 적당히 살만해졌고

좁아서 불편하지 않을만한 아파트에 살고

속으로야 어찌됐든 겉으로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미래가 불확실 하긴 하지만 그래도 기대할 것들이 있어서 그런가봅니다.

나에게 오는 피해에는 분노하지만

불의 앞에, 부당하게 불의를 경험하는 의에 주린 자들 앞에서 분노를 잃어버렸습니다.

대강절을 보내며,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다리며 다시 한 번 분노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고싶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와 절망 앞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 다음은 대강절 설교 원고입니다.



본문 : 사9:1-7
제목 : 평화의 왕 예수

1. 대강절 세 번째 주일

- 12월 25일은 성탄절이다. 성경에 나와 있지도 않은 이 날을 예수의 탄일로 지키게 된 유래에 대해서 아는가?

- 여러 가지 학설 중에 가장 유력한 것은 로마의 큰 명절이었던 동지절(12월 24일~이듬해 1월 6일)을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로 정했다는 것이다.

- 예수의 탄생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로마의 동지절을 성탄일로 정하고 기념하는 것에는 매우 깊은 상징적 의미가 있다.

- 예수님 당시 로마는 온 세계의 중심이었다. 모든 권력과 부와 명예가 로마에 집중되어 있었다. 로마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세계를 정복하고 로마의 황제가 스스로 신의 자리에까지 올라갔다.

-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로마는 세계의 중심이었다. 로마가 가진 무자비한 힘과 권력 앞에서 누구도 대항할 수 없었다. 폼페이우스 장군이 정복전쟁을 하면서 이스라엘의 신을 만나보겠다고 이스라엘의 성전에 들어와 군화발로 지성소를 짓밟고 들어갔다. 그 무례한 행동에 따른 예상과 달리 그는 멀쩡했고, 오히려 로마의 권세와 능력에 신성함이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 그 로마의 성대한 축제가 동지절이다. 세상의 모든 권력을 쥐고 흔드는 로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온갖 불법과 폭력을 휘두르던 로마의 성대한 축제 한 가운데 예수께서 오신 것이다.

- 돈만 있으면 다 되는 세상, 유전무죄 무전유죄, 권력 앞에서 초라해지고 작아질 수밖에 없는 세상, 예쁘고 잘 생기면 다 용서되고 못 생긴 것이 죄가 되는 세상(언뜻 보니 여기 죄인들이 많으시네요~^^), 외모가 권력이 되어 있는 세상(제 권력은 어느 정도나 돼 보이십니까?), 그 외모와 돈과 권력으로 흥청망청 세속적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세상의 한 복판에 작고 가난하고 연약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날이 12월 25일 성탄절의 의미이고, 그 오심을 기다리는 날이 대강절이다.(인사: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오셨습니다)


2. 평화의 왕

- 예수께서는 평화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본문 6절은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는데 그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이라고 말한다.

- 슥9:9-10 에서는, 보라 네 왕이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평화를 전할 것이라고 말한다.

- 예수님의 탄생시에도 허다한 천군천사가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라고 찬양한다. 예수께서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것이다.

- 그러나 예수님이 태어날 때 ‘평화의 왕’으로 불리던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바로 로마 황제이다. 사람들은 로마 황제를 가리켜 실제로 ‘평화의 왕’이라고 불렀다.

- 로마의 통치 이념 핵심에는 ‘Pax Romana’ 라는 말이 있었다. 로마의 평화라는 말인데 로마는 자국의 평화를 모든 통치 이념의 최우선으로 삼겠다는 말이다.

- 로마가 지향하는 평화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자국의 평화, 둘째, 군사력과 전쟁을 통한 평화이다. 로마의 통치와 권력에 순응하여 복종하는 나라에게는 평화가 약속되지만 로마의 통치를 거역하는 나라에게는 전쟁대략 학살, 잔인한 처형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도 로마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한 방편의 처형대였다.

- 모든 사람들이 로마의 평화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살기 위해선 침묵해야 했다. 섣불리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서도 안 됐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하듯이 로마가 강요하는 평화를 받아들이고 살아야 했다.

- 이스라엘 안에 그런 로마의 평화를 거부하는 무리들이 나타났지만 예외 없이 처참한 처형을 당해야 했다. 로마의 통치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반역자로 십자가에 처형당했다. 로마의 통치 시절 최소 수 백 명의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려 잔인하게 죽었다. 예수님 양 옆에 달려 죽은 사람들도 아마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 이렇게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은 평화의 시대, 칼과 창으로 유지되던 평화의 시대에 진정한 평화, 하늘에서 내려온 평화의 왕이 태어나신 것이다.

- 우리에게 오신 평화의 왕은 전쟁을 통해 평화를 지켜가는 분이 아니다. 권력과 힘을 통해 평화를 이루시는 분도 아니다. 자신의 평화를 위해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는 그런 분도 아니다.

- 로마의 평화 안에서 사람들은 두려움을 경험했다. 절망을 경험했고 하나님을 향하여 낙심을 경험했다. 원래 힘과 권력을 통한 평화는 그런 것이다. 통제하고 억압하고 압력을 넣어 이루어진 평화는 겉으로는 좋아 보이고 평온해 보이지만 거기에는 절망과 한숨과 두려움만이 존재한다.

- 예화. [우리 집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 아이들은 울어대고 아내는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와 있고, 집안은 정리 안 돼 있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나는 시험 준비를 해야 하는데 집 안에 평화가 없다. 결국 버럭 화를 냈다. 드디어 평화가 찾아왔다. 아이들은 울다가 잠이 들었고 아내는 입을 다물었고 집은 깨끗해졌다. 그런데 아무도 행복하지 않았다. 힘과 억압에 의한 평화는 그런 것이다.]

-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평화는 자유가 있고 해방이 있고 기쁨이 있다. 힘과 권력이 아니라 겸손과 낮아짐으로 이루어진 평화이기 때문이다. 그 평화 안에서 죄인들은 용납되어지고 회복되어진다. 하나님을 향하여 대적하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은 손을 내미시고 사랑하신다. 심지어 자신을 못 박아 죽이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용서하며 사랑하는 것이 예수 안에 있는 평화이다.

- 최근 한반도 정세가 매우 불안정하다. 연평도 포격사건 이후로 한반도의 평화가 깨어지고 긴장이 감돌고 있다. 나는 정치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잘 알지 못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 평화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 특별히 대강절을 보내며 더 기도하게 된다.

- 그런데, 일부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예수의 평화가 아니라 로마의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스가랴 말씀처럼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고 전쟁 기구들도 끊어버리시는 분이신데 기독교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전쟁을 운운하며 공격적인 태도를 보일 때 마음이 너무 아프다. 우리가 함께 로마의 평화가 아닌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께서 이 나라를 다스려 주시도록 기도해야 할 일이다.


3. 아기 예수

- 본문 6절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가리켜 한 아기가 우리에게 오셨다고 말한다. 제왕적 힘을 가진 강력한 왕이 아니라 연약하고 아무 힘도 없는 한 아기가 왔다고 말한다. 아기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 사실, 전쟁을 끝내려면,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전쟁의 달인이 와야 한다는 것이 세상의 상식이다. 돈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돈이고, 권력을 이길 수 있는 것은 권력이다. 일등을 이길 수 있는 길은 내가 일등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 논리이다.

-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논리에 젖어 산다. 아기 예수님은 사라졌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도 사라졌다. 오직 영광가운데 계신 예수님만 기억하고 살아간다. 그래서 더 높은 곳에 기어 올라가려고만 한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 세대의 앞잡이가 되어가고 있다.

-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초라한 말구유에 누워계신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초라함을 불쌍히 여기라는 말이 아니다. 눈물 몇 방울 흘리라는 말이 아니다. 평화를 이루어 가시는 예수님의 방식을 배우라는 말이다. 겸손과 낮아짐과 희생을 통해 예수님의 길을 따라 가라는 말이다.

- 예수님의 방식을 배우고 그의 길을 따르며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면 우리는 평화의 사자가 되는 것이다.


4. 하나님의 울분

-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평화를 위해 기도하게 하는가? 설교를 준비하며 본문을 묵상하던 중 본문의 말씀 중에 하나님의 울분이 있음을 보게 되었다.

-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 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추었다”, “그들의 무겁게 맨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셨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 묻은 복장이 불에 섶같이 살라지리라.” 어떤가? 아름다운가? 목가적인가? 부드러운 음성인가? 아니다. 압제와 고통과 절망의 땅을 향한 하나님의 울분이 느껴지지 않는가?

- 평화의 길을 가는 것, 평화를 위한 사자가 되는 것은 이런 하나님의 울분 없이는 불가능하다. 평화 없음에 대한 울분, 평화를 앗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거룩한 분노가 없다면 진정한 기도는 불가능하다.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 예수께서는 이 거룩한 분노를 가지고 살아가셨다. 연약하고 병들고 힘없는 자들을 향하여는 언제나 온유하고 자비하셨지만 불의한 권력자들과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과 같이 권력에 야합하여 백성들을 억압하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는 불같은 비판을 품어내셨다.

- ‘독사의 새끼들아’ 우리말로 하면 ‘개 자녀’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부드럽게 하셨겠는가? “너희 개 자녀들아 그러면 안 된단다~” 이렇게 하셨겠는가 말이다. 이 말 안에는 예수의 울분과 거룩한 분노가 스며있다.

- 예수께서는 울분 없는 자들, 자기희생도 없는 자들, 의를 향한 갈망도 없이 거짓된 평화를 원하는 자들에게 “내가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라고 말씀하셨다.

- ‘두리반’ 이라는 식당을 아는가? 얼마 전까지 한 집사님 내외가 운영하는, 서울에 있는 평범한 칼국수 집이었다. 10여 년 동안 옷 수선, 사우나 매점, 찜질방 식당 등을 하며 모은 돈에 대출을 받아, 1억 3천만 원의 시설투자비에 보증금 1500만원의 세를 주고 2005년 홍대 옆에 가게를 내었다. 2007년 도시공항철도 역사가 세워진다는 발표와 함께 땅값은 수직상승했고 건물은 민간 건설사에게 팔렸다. 건설사는 이사비용 300만원을 주며 나가라고 했고, 평생 모은 돈을 다 날리고 아직 갚지 못한 빚까지 떠안아야 하는 내외는 버텼다. 결국 2009년 12월 24일, 세상이 성탄절 이브를 즐기고 있을 때 두리반은 강제철거를 당하고 주인은 쫓겨났다. 아이러니하게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오신 밤에 한 서민 부부의 인생이 송두리째 철거를 당한 것이다. 26일 사장내외는 철사와 철판을 뜯어내고 두리반에 들어가 1년째 농성중이다. 시인들이 찾아와 시를 낭송하고, 음악회를 열고, 영화제도 열고, 예배를 드리며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더위와, 추위와 싸우며 농성을 하고 있다.

- 평화가 깨어진 이 모습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나는 힘과 권력과 돈으로 무장한 건설업체의 모습에서 자국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나라들을 처참히 짓밟았던 로마의 평화를 보게 된다. 그리고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울분을 가지고 분노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느낀다.

- 그런데 매스컴에서 처음 이 보도를 접했을 때, 나 자신이 많이 변했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다. 그저 안타까운 사연이 하나 늘었구나. 참 안 됐다 하고 너무나 쿨 한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 신학교 시절, 가난하고 참 궁핍했다. 한 달에 한두 번 야식으로 통닭을 시켜 먹는 것이 호사였다. 지도하던 청년들에게 밥 한 번 사주는 것, 큰 맘 먹어야 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었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 그 때는 울분이 있었다. 잘못 된 제도, 악의 장벽들, 고통 받는 사람들을 향한 울분이 있었다. 그리고 자꾸만 권력과 잘못된 제도에 순응하려는, 굴복하려는 나 자신을 향한 울분과 분노가 있었다. 그래서 잘 울었다.

- 그런데 목사가 되고나니 내 자신이 변하게 된다. 먹고 사는데 문제 되지 않을 만큼 사례를 받고, 넓진 않지만 좁지도 않은 아파트에 살고, 속으로야 알 수 없지만 겉으로는 많은 존경을 받고 살다보니 울분이 사라졌다.

- 그래서 이웃의 아픔을 봐도,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가 깨어진 모습을 봐도 내게 일어난 일이 아니면 마음의 동요가 없다.

- 지난여름 무더위에 운전을 하다가 길 한가운데 차를 세우고 서 있는 사람과 다툼이 났다. 너무 몰상식하게 차를 세워뒀다고 생각해서 창문을 열고 한 마디 거칠게 했는데, 아뿔싸! 깍두기 머리에 팔에는 문신이 우글거렸다. 맞을까봐 겁나서 제대로 말 한마디 못하고 그 사람에게 이리저리 휘둘렸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속의 분노가 가시지 않는다.

- 내가 당하는 별것도 아닌 일에는 분노할 줄 알면서, 평화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가 깨어진 상황에는 무덤덤한 내 모습이 참으로 가련하다.

- 예수께서는 자신을 향하여 채찍을 휘두르는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불의한 압제자들을 향하여는 분노하셨는데, 이 땅의 깨어진 평화를 향해서는 오래참고 개인적인 일에는 발끈하는 내 모습을 보며 언제쯤에나 예수님을 닮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속이 쓰리다.

- 성령의 열매가 아닌 엉뚱한 열매만 맺혀 간다. 나 자신을 향한 사랑, 자기만족을 향한 기쁨, 나의 유익을 위한 평화, 불의를 향한 오래 참음, 내 자식들만을 향한 자비,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에게만 베푸는 양선, 힘 있는 사람들을 향한 충성, 권력자들 앞에서의 온유, 거룩한 것들의 절제라는 아홉 가지 열매가 너무 주렁주렁 열린 것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다. 이 땅 구석구석에 평화가 임하도록 기도하자. 힘 있는 사람들의 횡포가 그치고, 돈 가진 사람들의 자랑이 멈추고, 사망의 그늘에 있던 자에게 빛이 비추는 평화, 4절 말씀과 같이 무겁게 맨 멍에와 어깨의 채찍이 멈추는 평화 압제자의 막대기가 꺾이는 평화를 구하자.

- 울분을 가지고 기도하자. 울분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그 울분이 우리를 진정한 기도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상투적인 기도가 아닌, 가슴에서 울려 나오는 기도, 이 나라를 위한, 내 이웃을 향한 기도는 울분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대강절을 지내며 평화의 사자로 하나님 앞에 서길 바란다.

2010년 12월 6일 월요일

동성애와 기독교

동성애 논란이 후끈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군대에서 '계간' 즉 쌍방의 합의에 의한 동성간의 성적 행위를 금지한 법률이 위헌이라는 헌재의 판결에서 시작해서

동성애자 차별 금지법을 저지하려는 일부 기독교계 인사들의 저항이 소란스럽습니다.

이쯤에서 저도 동성애에 대한 입장을, 기독교인으로서의 입장을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우선, 동성애자에게 차별이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차별 금지법을 반대하는 기독교 인사들의 우려는 충분히 이해하나 차별은 금지되어야 하는 것이지 지지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일을 앞장서서 반대하는 일부 보수적 기독교 인사들의 논리는 성경이 그것을 금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약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은 동성애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지 그런 사람들을 차별하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2010년 12월 4일 토요일

미래목회 포럼 '자정 선언 결의문'

비교적 보수 성향을 가지고 있는 미래목회 포럼에서 교회와 목회자들의 자정을 요청하는 선언 결의문을 발표했다.

발표 내용이 매우 긍정적이고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눈에 띄는 점은 목회자에 대한 비판이 가장 우선시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비판이 원론적 이야기에서 비교적 구체적 대안으로 옮겨갔다는 부분도 고무적이다.

이런 긍정적인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한국교회가 이미 자정능력을 상실한 것 아닐까 하는 우려가 깊다.

이 또한 일부 목회자들의 자기 반성으로 끝나버릴 공산이 크기 때문이리라.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교회의 본질을 훼손하고 있는, 그 결과 교회의 사회적 이미지에 결정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주고 있는 대형교회에 대한 비판이 빠졌다는 것이다.

결의문 전문을 여기에 옮겨 본다.


자정 선언 결의문

시흥교회 방수성목사 승리?

담임목사 재신임 투표 결과를 가지고 분쟁중이던 시흥교회에 법원이 담임목사 손을 들어줬단다.

재신임 투표 결과를 인정하지 못하던 장로측 사람들이 소송을 했는데 법원이 이를 기각한 상황이다. => 자세한 기사보기

끝까지 자리를 지켰던 담임목사와 교인들은 크게 기뻐하며 본당 입구에 자축의 현수막까지 걸었다.

장로들은 이 판결에 불복하고 항소할 예정이란다.

이런 사태를 지켜보며 참 마음이 아프다. 특별히 시흥교회가 한국교회 안에 교회개혁을 주도해 오던 교회여서 더욱 마음이 아프다.

특히나 교회 앞에 걸려 있는 현수막이 내 마음을 더욱 짖누른다.

교회 안에 여러가지 문제들을 해결해 보기 위해 정관을 만들었는데 그로 인해 법정 싸움까지 갔다.

누구는 이겨서 기뻐하고 누구는 져서 분통해 하겠지만 누가 승자고 누가 패자인가?

일그러진 한국교회의 자화상을 보는 것같아, 왜곡된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무척이나 속이 쓰린다.

결국, 진정한 개혁은 제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억하게 된다.

개혁을 외치는 그 사람이 개혁될 때, 진짜 개혁이,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겠지...

새가족 성경공부

처음 교회에 오신 새가족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천편일률적인 교리공부에 제동을 걸어보고 싶다.

기독교는 교리종교가 아니라 삶의 종교라고 가르치면서 여전히 새가족들에게는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급제동 해서 교통흐름 어려워지는 것도 별로 바람직하지 않고 어떻게 새가족들을 가르쳐야 할지 심각한 고민이다.

이번에 5주동안 4명의 새가족을 가르친다. 한 명을 빼고는 전부 완전 초짜다.

이번엔 주기도를 중심으로 기독교 신앙을 가르치고 있는데 자꾸 교리공부쪽으로 흘러가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새가족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잘 소개하면서 기독교 삶을 가르칠 수 있을까?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답을 가지고 있는가?

2010년 12월 3일 금요일

착한 믿음

[최근 책 읽는게 재미가 없어졌습니다. 다시 책 쓰는 일을 시작해야 할까 봅니다. 묵혀 두었던 원고뭉치를 꺼내들어 대대적인 수정작업을 하며 다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책 제목은 가칭 '착한믿음'입니다. 믿음을 주제로 한 책인데 초고를 조금씩 올려볼까 합니다. 잘 쓰는 글은 아니자만 함께 나눌 수 있음에 감사하고 혹시 읽어보신 분들은 뜨거운 비판을 부탁드립니다.^^]

1부 믿음의 뿌리

믿음에는 뿌리가 있다. 믿음의 모든 행위와 태도는 모두 이 뿌리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뿌리가 건강하면 건강한 믿음으로 자랄 가능성이 커지고 그렇지 않으면 말라 죽거나 기형적인 나무가 된다.

평화의 왕 예수

오늘 교구 구역장 모임에서 이사야 9장 6절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지금 섬기는 교회의 일년 절기는 총동원 두 번이 전부입니다.

다른 절기는 모두 유명무실하죠^^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대림절은 저에게, 우리 모두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 같습니다.

온 나라 국민들이 전쟁의 위협앞에 떨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는 사분오열의 조짐을 보이며 여러가지 시끄러운 잡음이 들립니다.

그래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더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평화의 왕 되신 예수님이

진실로 높여지시길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사람들조차 전쟁을 운운하고,

교회의 중직자라 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향한 비난과 험담이 흉흉한 이 때,

평화의 왕이신 주님을 다시 한 번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2010년 11월 25일 목요일

요한복음 연구 13 - 영과 진리의 예배

요한복음 4장 16-26절

영과 진리의 예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의 핵심에는 성전이 있다. 성전이 유대교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상징으로서 자리잡아 가면서 이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미 앞에서도 잠간 살펴본바와 같이 분열왕국 이후 남북의 갈등은 성전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반란을 통해 정권을 잡은 여로보암은 혁명의 정통성을 세우고 다윗왕가를 부정하기 위해 벧엘과 단에 예배처소를 마련했다(왕상12:25-30). 반대로 다윗왕가는 정통성의 근간을 성전에 두었고 갈등은 본격화 되었다.

2010년 11월 24일 수요일

새로운 조명 아래서

며칠 전 사무실에 있는 화분 분갈이를 하고서

오늘 시간이 좀 남아 전등을 교체 했습니다.

요녀석이 내게로 온 이후 한 번도 햇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사무실이 지하에 있다보니 햇빛 드는 창가도 없고

그렇다고 밖에 덩그러니 내 놓을 곳도 없습니다.

흐물거리는 형광등 불빛으로만 광합성을 해야 하는 녀석이 안쓰러워

조명 하나 달아 놨었는데,

이번 분갈이 이후 조금 더 따뜻하고 강한 불빛이 필요할 것 같아

60촉 백열 전구로 달아 줬습니다.

따끈따끈 하네요.^^

햇빛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실내에 갖혀 있는 모습을 볼 때

때때로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럽고 애착이 가는가 봅니다.

내년 봄엔 요녀석 햇빛과 비, 바람과 친구들이 있는 고향으로 보내줄까 생각중입니다.

그래도 좀 더 나은 빛 아래서 자유롭게 자랄거라 기대해 봅니다.

빛 되신 주님 안에서 내 영혼도 더 자유로워지길 소망하며...

2010년 11월 23일 화요일

땅 밟기와 영적전쟁

최근 일부 개신교 신도들의 봉은사 땅밟기를 시작으로 개신교와 불교가 대립의 각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다.

불교를 우상숭배라 단정하고 조직적, 계획적으로 불교를 흠집내거나 비하하는 개신교에 대하여 불교가 공식적으로 대응을 시작하면서 대립이 본격화 되었다.

2010년 11월 19일 금요일

요한복음연구 12

요한복음 4장 1-15절

야곱의 우물


요한복음은 지속적으로 예수의 사역을 ‘세례’와 고리를 만들어간다. 그 유명한 사마리아 여인과의 우물가 대화도 그 근본 시초가 세례 때문이었음을 말하면서 이 사건 자체도 예수의 세례, 즉 그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토대 위에서 진행된다.

2010년 10월 27일 수요일

조용기 목사의 실언

얼마전 여의도 순복음 교회 원로 조용기 목사가 지교회 분립 1주년 예배에서 설교를 했다.
'예수님이 바라시는 것' 이란 제목으로 설교한 조용기 목사는 설교 중
'작은 교회가 아릅답다는 말은 목회에 실패한 자들의 변명'이라고 선언하며 예수님도 큰 교회를 좋아하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여러 사람들의 구설수에 올랐다.

지난 세월 순복음 교회가 한국 교회 안에 미친 긍정적 영향은 충분히 가치가 있고 칭찬받아 마땅한 것이다.
민중신학이 지식인들의 전유물로 전락해 갈 때, 순복음 교회는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 희망을 주고 그들을 위로하는 실제적인 일들을 했다.
물론 그 와중에 약간의 문제들이 발생했고 오히려 더 많은 상처를 안고 교회를 떠난 사람들도 있지만 순복음 교회가 세상을 향해 베풀었던 위로와 소망에 비하면 비교적 미미한 것들이다.

2010년 10월 17일 일요일

요한복음연구 11

요한복음 3장 31-36절

하늘과 땅

예수에 대한 요한의 증언은 요한복음의 신학적 진술로 이어진다. 이 진술 안에는 요한복음이 전제하고 있는 신학적 배경이 드러난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신학적 배경이 매우 분명하게 유지된다. 이러한 우주관은 요한복음을 이원론적, 영지주의적 복음서로 오해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2010년 10월 14일 목요일

요한복음연구 10

요한의 두 번째 증언

요한복음 3장 22-30절

요한복음은 예수에 대한 세례요한의 증언을 한 번 더 언급한다. 요한의 첫 번째 증언이 철저하게 세례와 연관돼 있던 것처럼(1:33) 두 번째 증언도 역시 세례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3:26).
예수께서 유대지역에서 세례를 주셨다는 것과(3:22) 예수에게 세례 받는 사람들이 요한에게보다 더 많아졌다는 배경 속에서(3:26) 요한복음은 다시 한 번 ‘물’이라는 주제와 그것과 함께 공명하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드러낸다.

2010년 9월 27일 월요일

후회(後悔)

가끔 내 설교 동영상을 피드백 차원에서 봅니다.
처음 내 설교 동영상을 봤을 때, 얼마나 민망하고 낯 뜨거웠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이젠 몇 번 보니 그나마 봐줄 만 합니다.
민망해도 종종 봐야 설교에 도움이 됩니다.

종종 지난 일들을 생각하면 후회가 되고 낯이 뜨거워집니다.
왜 그렇게밖에 하지 못했을까 참 부끄럽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돌아보다 보면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2010년 9월 25일 토요일

화분(花盆)

사무실 책상에 화분이 하나 있습니다.
'행복나무' 라는 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요녀석이 몇주 전부터 성장을 멈추었습니다.
가까이에 있던 옆 자리 목사님의 스탠드가 멀찌기 떨어져 버린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집에 있던 스탠드를 가져다가 빛을 비춰주었습니다.
실망시키지 않고 몇 주 멈추었던 성장을 다시 시작해 저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방전

평창 처가에 왔습니다. 아내 차가 방전돼서 점프를 했습니다. 우리 삶이 방전 됐을 때 점프해 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참으로 행복한 일인 것 같습니다.

2010년 9월 23일 목요일

요한복음연구 9

요한복음 3장 14-21절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요한복음은 화음이 잘 들어간 노래와 같다. 서로 다른 파트의 음들이 함께 울리며 하나의 노래를 만들어 내듯이 요한복음은 하나의 단어나 사건을 여러 파트의 음색으로 표현해 내고 그것으로 하나의 노래를 만든다.

인자가 들려야 한다는 노래는 예수의 십자가라는 멜로디에 인자의 신원과 영광이라는 화음이 오버랩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능동적 소그룹

각 교회마다 구역예배가 현실적으로 어려워져 가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교회내 소그룹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지만
셀교회를 지향한다고 명시적으로 광고하는 교회들조차 안정적인 소그룹 운영이 어려워지고 있다.
핵심적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2010년 9월 19일 일요일

목사의 처신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부임하여 청년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얻으며 교회를 급성장시킨 ㅅ교회 담임목사가 성추행 스캔들에 휩싸였다.
목회 초기부터 여자 청년들에 대한 처신에 대해 말이 많았다고 한다. 결국 터질게 터졌다는 반응이 많다.

개인적으로 그 목사님이 이해 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럴수도 있겠다 싶다. 이번 스캔들의 양상을 볼 때 조금은 악성 스캔들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는가?
사실, 그 목사님 뿐만 아니라 많은 목사님들이 크고 작은 스캔들로 문제를 일으킨다.

참 생각이 많아진다.
목사로서 처신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여자 성도들과 조금 친해지다 보면 여자 성도들의 태도나 반응이 조금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존경인지, 여자로서의 사적인 감정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내 자신이 그런 반응들을 은근히 즐기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연구 8

요한복음 3장 1-15절

영으로 난 사람

요한복음은 계속해서 표적이란 주제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한 유대인 지도자 바리새인 니고데모가 예수께로 와서 예수의 표적에 대하여 말한다. 예수의 표적이 예수를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으로 증명한다는 고백이다.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는 인자가 모세의 놋뱀과 같이 들려야 할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으로 마무리되며(3:14-15) 표적에 대한 이야기를 강화한다. 이 대화에서 예수의 표적은 궁극적으로 그의 ‘들림’으로 귀결된다.

요한복음은 이중적 의미를 지닌 단어 사용을 자주 사용하는데

2010년 9월 17일 금요일

민주적 교회 운영? 성경연구의 민주화!

교회 개혁을 외치는 교회마다 '민주적인' 교회 운영을 주장한다.
민주적으로 교회를 운영하기 위해 대부분의 교회들이 교회 정관을 만든다.
기존의 교회에서 목회자에게 쏠렸던 권한과 책임을 분산시키고
목회자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는데 정관의 초점이 맞춰진다.
그래서 목회자와 장로의 임기를 정하고
재신임 투표를 통해 임기를 연장하는 것이 대부분의 정관이 가지고 있는 핵심 사항이다.

그런데 과연 민주적 교회 운영이 바른 것인지, 혹은 좋은 것인지는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요한복음연구 7

요한복음 2장 23-25절

사람을 아시는 예수

유월절에 있었던 예수의 표적은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하는 효과를 낳았다(2:23). 이것이 요한복음이 노리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지속적으로 예수의 표적을 보여주고 그 표적은 유일한 목적, 즉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메시아이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 하려는데 봉사한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었지만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믿지 않았다(2:24). 또 예수께서는 사람을 알기 위하여 사람의 증언을 받을 필요가 없다(2:25).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직접 아시기 때문이다. 이 말들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2010년 9월 15일 수요일

요한복음연구 6

요한복음 2장 13-22절

이 성전을 헐라

소위 ‘성전정화’ 사건은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될 만큼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다른 음색으로 이 사건을 연주한다.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이 사건이 일어난 시점인데 공관복음은 예수 사역의 막바지에 일어난 것으로, 요한복음은 사역의 초반에 일어난 사건으로 그리고 있다.

공관복음에 나타난 성전 사건은 세 복음서 모두 동일한 주제를 보여준다. 핵심은 예수께서 열매 없는 성전을 향하여 멸망을 선언하신 것이다. 유대적 소망의 가장 핵심으로서 성전의 권위는 절대적이었지만 예수께서는 그 성전을 향하여 멸망을 선언하셨고 이것이 예수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막14:58, 15:29).

공관복음에서 성전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복음서의 절정에 성전에서 일어난 사건이 있고 예수의 모든 사역이 마치 성전에서의 대결을 준비하기 위한 것인 듯한 느낌을 받는다. 결국 예수께서는 성전의 멸망을 예고하셨고(막13:1-2) 그 이유로 처형 당하셨다.

공관복음에서의 핵심은 이것이다. 거기에는 성전을 종교적으로 정화하겠다거나 사회적으로 개혁하겠다는 의도가 없다. 오히려 핵심은 성전이 가지고 있던 거대한 기득권과 배타적 소망의 철저한 몰락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로운 소망, 하나님의 나라가 싹트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성전사건은 그 의미가 급격하게 축소된다. 요한복음에는 이 사건 이후에 공관복음과 같은 여파가 없다. 아무런 후폭풍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 사건은 여기에서 일단락되고 이후에도 예수는 자연스럽게 성전에 드나들었다7:28, 8:2). 성전 사건이 곧장 예수의 죽음으로 이어진 공관복음에 비할 때 이 사건은 급격하게 축소되었다.

요한복음의 성전사건에서도 예수의 성전 부정은 변함없이 핵심적이다. 그러나 핵심적 초점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맞춰져 있다. 성전이 무너지고 삼일 만에 다시 일으켜질 것인데 이는 예수의 육체에 대한 상징이다(2:20-21). 제자들이 이 말의 의미를 깨달은 시점이 예수의 부활 이후라는 언급은 이 사건이 말하려고 하는 것이 예수의 부활이라는 것에 대한 분명한 증거이다.

요한복음은 이 성전사건과 포도주 기적 사건을 1장 51절에 대한 연속선상 안에서 제시한다. 하늘에 있는 인자, 즉 부활하여 그 정당성과 의로움이 입증된 인자에 대한 초보적 표적과 행위를 보여주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포도주 기적과 성전사건은 동일한 주제 아래 묶여 있다. 인자의 신원, 예수의 영광, 즉 부활이라는 굵은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부활을 통해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는 것처럼 성전의 재건립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다. 더 이상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을 담지한 하나님 임재의 장소가 아니다. 성전은 무너질 것이고 하나님의 현존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말씀이신 예수를 통해 계시된다. 이것이 성전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는 요한복음의 진지한 메시지이다.

요한복음연구 5

요한복음 2장 11절

예수의 영광

요한복음은 영광의 책이라 불릴 만하다. 공관복음이 겉보기에 예수의 고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분명히 요한복음은 예수의 영광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요한복음에는 영광(헬. 독사)이라는 명사형이 19회, 영광 받다(헬. 독사조)는 동사형이 22회 사용되어 신약성경 중 가장 많이 쓰였다.

요한복음의 영광에 대한 강조는 공관복음을 고난의 복음서로, 요한복음을 영광의 복음서로 보게 만든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영광이 그의 고난, 즉 죽음과 부활에 철저하게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죽음 앞에서 그의 영광의 때가 가까웠다고 말한다(12:23).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의 영광이 드러났다는 것이 요한복음의 중심 주제이다. 특별히 죽음이 예수의 영광과 관련하여 부각되는데(12:24) 그의 죽음과 따르는 부활을 통해 그의 영광이 드러났다. 요한복음은 영광의 복음서이지만 동시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철저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창세전부터 아버지 품속에 있던 영광(1:14, 17:5)이 예수의 첫 표적을 통해 세상에 드디어 드러났다(2:11). 본래 하나님의 영광이었던 예수의 영광은(17:22) 예수의 사역을 통해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17:4). 그리고 예수의 사역은 궁극적으로 그의 죽음과 부활로 귀결된다(7:39, 12:16).

예수의 첫 표적을 통해 예수의 영광이 드러났다는 요한복음의 첫 번째 보도는 그의 첫 표적이 그의 부활에 대한 암시라는 것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첫 표적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화 되듯이 예수의 부활을 통해 근본적인 변화가 창조세계 안에 있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고 이는 궁극적으로 예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결정적 사건이 된다고 보도한다(2:11).

그렇다면 예수의 영광이란 무엇인가? 예수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란 그분의 임재와 현존에 대한 강력한 상징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개념은 특별히 성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성전에 거하시는 하나님, 성전에서 그 위엄을 나타내시며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요한복음은 성전에 임재한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다른 영광을 말하고 있다. 본래부터 있던 말씀이신 예수께서 임재하셨다(1:14). 하나님의 현존이 다른 무엇이 아닌 예수를 통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안에 영광이 있었다는 말씀은(1:14) 철저하게 하나님의 임재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첫 번째 표적을 통해 예수의 영광, 즉 하나님의 현존이 나타났다는 보도에 이어 성전에서의 예수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공관복음이 예수 사역 말미에 그토록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성전사건을 요한복음이 사역의 가장 초기에 배치한 것은 우연이나 부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요한복음은 예수의 영광, 하나님의 현존을 말하면서 피해갈 수 없는 ‘성전’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결론인즉, 더 이상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 임재의 장소일 수 없다는 것이고 그 자리를 예수께서 직접 대신하실 것이라는 선언이다.

예수의 표적은 하나님의 현존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포도주 기적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기적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현존을 표현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표적은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현존을 보도록 우리를 초청한다.

2010년 9월 12일 일요일

요한복음연구 4

요한복음 2장 1-12절

물을 포도주로


요한복음이 첫 번째 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혼인잔치 기사는 공관복음의 이적들과 비교할 때 매우 독특하다.

첫째는 요한복음이 표현하는 ‘표적’이라는 용어에서 공관복음과 구별된다. 공관복음이 예수의 기적을 하나님의 기이한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과 달리 요한복음은 예수의 모든 기적을 ‘표적’으로 지칭한다.

궁극적 진리인 예수에 대한 증언으로서 요한복음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에서 볼 때(20:30) 요한의 ‘표적’ 사용은 그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 또한 ‘봄’을 통한 예수 증언이 요한복음이 지속적으로 끌고 가는 중심 주제임을 생각할 때에도 표적은 요한복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기사가 공관복음과 구별되는 두 번째는 기적의 특성에 있다. 공관복음의 기적은 예외 없이 사람과 관련이 있다. 사람을 고치고, 사람을 먹이고,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부르고,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한다. 그러나 본문의 혼인잔치 기적은 그런 것과 상관이 없어 보인다. 특별히 이 기적을 예수의 첫 번째 표적으로 강조하는 면(2:11)에서 매우 특별하다.

기적의 핵심은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이다. 어머니의 역할이나 하인의 믿음, 또는 잔치의 흥겨움이나 포도주의 맛 등은 기적의 중심이 아니다. 모든 중심에는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이 있고 그 과정에 율법에 의한 정결예식을 위한 항아리가 있었다.

물이라는 상징물 안에 정결법, 즉 율법이 존재하고 있다면 포도주 안에는 예수로 말미암은 부활의 능력이 있다. 물이 하나님을 향한 유대적 체계와 소망을 상징한다면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한다. 특별히 항아리가 여섯 있었는데(2:6) 여섯은 유대 세계 안에서 불완전한 숫자를 의미한다. 이는 불완전한 유대적 소망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 표적은 3일 되던 날에 이루어졌다(2:1). 이는 분명히 예수의 부활에 대한 암시이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일곱 번째 표적으로 분명하게 그의 부활을 보여주고 있고 첫 번째 표적에 그 부활을 암시하고 있다. 썩어질 육체가 썩지 아니할 새로운 육체로 변화 되었듯이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이다.

부활의 상징으로서의 포도주 변화 사건은 또한 예수의 전체 선교사역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예수의 부활은 망가진 자기의 땅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예수의 부활을 통하여 세상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된다. 요한복음이 그리는 예수의 모든 사역은 부활에 집중되어 있고 그 안에서 모든 피조물은 진정한 포도주로 변화하게 된다. 좁게는 정결법 안에 사는 유대인이고 넓게는 창조세계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다.

또한 본문에는 공관복음과의 분명한 차이점 하나가 더 등장한다. 바로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에 대한 언급이다. 공관복음에는 예수가 어머니나 형제들과 공생애 기간에 함께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 오히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가족을 배척하거나(막3:21) 예수를 만나러 온 어머니와 동생들의 청을 거절한 기사만 등장할 뿐이다(막3:31-35).

공관복음 전승에 비교하여 요한복음에는 큰 변화가 있다. 어머니의 지속적인 등장(2:1, 2:12, 19,27)과 형제들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2:12)는 공관복음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공관복음에는 예수께서 자신의 가족뿐만 아니라 가족 자체에 적대적인 모습이 많이 나타난다(마10:35-37, 막10:29-30).

이러한 이유는 요한복음이 처해있던 공동체적 상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공관복음서보다 비교적 후기에 기록되었고 기록된 장소가 에베소 근처일 것이라는 추정, 즉 본토 유대인들이 아니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기록된 복음서라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앙의 표지로 작용했던 대표적 상징들은 율법과 성전, 언약의 땅과 혈통을 이어주는 가족 등이었다. 공관복음은 예수께서 이러한 표지들을 뒤집고 재정의 하거나 무력화 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율법의 권위를 넘어서 말하고(마5:21) 성전을 무력화 시켰으며(막11:15-18, 막13:1-2) 땅의 소산으로 기뻐하는 부자를 비웃으셨다(눅12:13-21).

가족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에 대한 믿음과 배타적 지위를 무너트리고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는 새로운 가족체계를 선언하셨다(막3:31-35). 유대적 혈통체계에 대한 예수의 뒤집기, 이것이 예수께서 가족에 대하여 적대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공관복음의 이유이다.

AD 70년 성전의 멸망과 함께 제2성전기 유대교는 바리새파 유대교로 전환되며 그 중심을 율법이 차지하게 된다. 상대적으로 성전에 대한 관심이나 땅, 혈통체계에 대한 중요성은 줄어들게 되고 율법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특별히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더욱 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상황을 매우 잘 반영하고 있다. 공관복음이 예수의 핵심적인 행동이 성전과의 대립이었다고 보도하는 반면 요한복음은 성전과의 대립은 나타나지 않는다. 예수사역 초기에 나타난 성전 사건은 그 핵심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맞춰져 있을 뿐이다(요2:21). 공관복음이 땅과 그로 말미암은 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과 달리 요한복음은 부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에 대한 차이도 같은 맥락이다. 유대교 내에서 민족적 혈통에 대한 강조가 희미해지고 율법에 모든 초점이 맞춰지는 상황에서, 예수의 동생들이 기독교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하는 상황에서 요한복음은 예수의 가족에 대한 부정적 언급을 제거하고 유대교와의 모든 대립각을 율법에 집중시킨다(요1:17, 1:45, 5:39, 7:19-24, 8:4-11).

2010년 9월 10일 금요일

요한복음연구 3

요한복음 1장 35-51절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두 번에 걸쳐 제자들을 모으는 요한복음의 기사는 요한복음만의 독특한 강조점을 가지고 진행되며 2장부터 시작되는 예수의 본격적인 사역에 대한 준비를 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최초의 제자그룹은 요한의 제자들 중 이탈한 무리로 형성되었고 그 후에 다른 제자그룹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제자그룹 형성과정을 소개하며 요한복음은 복음서의 핵심적 주제인 ‘보고 믿는 것’의 기초를 놓는다. 35절에서 51절까지 ‘보다’는 단어를 10회 이상 사용하며 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요한복음의 기본적인 구성인 7가지 표적과 그 표적을 보고 믿음을 갖도록 요청하는 요한복음의 전체적 구성에 부합한다.

예수를 ‘보라’는 요청은 세례요한에게서 시작한다(1:29, 36). 그 ‘봄’은 세례요한의 제자였고 후에 예수의 첫 제자그룹이 된 베드로와 안드레를 거쳐 두 번째 제자그룹에서 절정을 이루며 ‘더 큰 일을 보리라’는 예수의 확신에 찬 언급으로 마무리된다(50절). 요한복음이 이어지는 기사에서(2:1-11) 예수의 첫 번째 표적을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보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서론에서 이미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듯이 창조되지 않은, 본래부터 있던 질서인 예수의 정체성을 보여주기 위해 보라고 요청하고 있다.

요한복음이 보여주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1:34) 메시아이며(1:41). 이스라엘의 왕이다(1:49). 하나님의 아들은 후기 삼위일체의 한 위격으로서의 개념이 아니라 유대적 개념으로 메시아를 의미한다. 예수의 처형에 대한 죄목이 유대인의 왕을 참칭한 것이었다는 보도와 유사하게 본문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묘사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아로 오셨다. 그 메시아는 자기 땅에 오셔서(1:11) 어둠을 밝히고 상함을 회복시키며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신다. 이 예수는 율법과 선지자들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단순한 예언의 성취가 아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의 절대적 기준인 율법과 선지자가 이제 예수로 대체됨을 의미한다. 모세로 말미암은 기존의 절대적 질서는 이스라엘의 참된 왕 예수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예수에 대한 또 다른 증언은 ‘어린양’이다. 이는 공관복음서에는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서 요한복음의 독특한 은유이다. 요한복음은 예수를 어린양으로 그리며 예수의 죽음과 연관시킨다. 공관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은 예수의 죽음이 유월절 전날, 곧 양 잡는 날에 이루어진 일로 보도하며(18:28) 예수의 어린양 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공관복음은 예수께서 유월절 당일 새벽에 잡혀 그날 처형된 것으로 보도한다).

이는 예수의 정체성을 그의 죽음과 부활에 직접적으로 연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유월절이 꿰고 있는 신학의 흐름은 출애굽에서 초기 기독교인들의 새창조까지 이어진다. 첫째 유월적은 직접적으로 출애굽을 기념했고 둘째 로마의 속박 아래 유월절은 하나님의 이스라엘 신원과 회복을 소망하게 했고 셋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회복을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연결시켰다. 예수를 유월절 양으로 표현하는 요한복음은 이러한 사상적 흐름 속에서 볼 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진정한 세계의 새 창조를 그리고 있다.

이것은 51절에 표현된 인자전승에 의해서도 분명해 진다. 다니엘 7장 13절에 나타난 인자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기는 하지만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앞으로 인도된다는 묵시적 그림은 이 세상의 어둠을 고치고 새롭게 하시며, 이스라엘을 신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나다나엘과의 대화에서 진정으로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이 부활을 통한 인자의 신원, 그리고 이스라엘의 진정한 회복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례요한의 증언에서 시작된 ‘보라’는 요청은 나다나엘과의 대화에서 ‘더 큰 일을 보리라’는 예수의 약속으로 마무리된다. 이어지는 요한복음의 본론(2:1~20:29)은 예수께서 보여주신 더 큰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7개의 표적과 의미들을 통해 예수의 본질을 보여주며 마지막 표적인 부활을 통해 인자가 하나님에 의해 신원되는 것을 그려낸다(1:51). 요한복음은 예수 안에 빛, 곧 생명이 있음을 믿고 진정한 왕이신 예수 안에서 자유를 누리도록 우리를 초청한다.

2010년 9월 9일 목요일

요한복음연구 2

요한복음 1장 19-42절

요한의 세례와 증언


1) 예수와 세례요한의 관계

세례요한은 거대한 산과 같은 존재다. 그가 베푼 세례는 예수 사역의 기초가 되었다. 사실, 예수가 세례요한의 제자였고 그의 사역과 같은 맥락에서 예수의 사역이 시작된 것은 매우 분명해 보인다.

공관복음은 예수의 선포가 세례요한의 선포에서 차용된 것임을 보여주고(마태복음)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의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증언, 그리고 요한이 잡힌 후 예수의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증언은 예수가 세례요한의 제자로서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마가복음). 또한 누가는 12번째 사도를 다시 선출하는 과정에서 ‘요한의 세례’로부터 함께 있던 자가 자격이 있음을 말하고 있고(행1:21) 예수의 복음이 요한의 세례 이후로 시작되었음을 말하며(행10:37) 요한과 예수의 밀접한 연관을 보여준다.

요한복음은 이에 대한 또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 첫 번째 그림은 요한이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강력하게 증언하는 그림이고(29절) 다른 하나는 요한의 제자 중 일부가 예수의 제자가 되어 예수 사역의 기초가 되는 그림이다(37절).

세례요한과 예수의 이러한 복음서의 증언들을 종합해 볼 때 전체적인 그림은 꽤 분명해 보인다. 요한의 전무했던 세례사역이 시작되고 예수는 그 운동의 추종자가 되었다. 세례 운동의 계승자로서 일단의 제자 무리가 독립해 나갔고 그 우두머리가 예수였다. 예수는 요한의 세례 운동의 연속적 맥락에서, 동시에 비연속적 맥락에서 세례 운동을 시작했고 이후 기독교는 세례요한을 예수의 선구자로 이해했다.

2) 요한복음이 그리는 세례요한

요한은 서론에 이미 두 번 등장하여 10장까지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지속적인 연관성은 ‘세례’이다. 요한도 세례 사역을 계속 했고 예수도 세례 사역을 진행했다(요3:22). 급기야 예수의 세례가 요한의 세례보다 더 많은 세력을 형성했다고 보도한다(요4:1).

공관복음서가 요한을 예수의 길을 예비하는 엘리야로 묘사하는 것과는 차별되게 요한복음은 철저하게 세례요한을 예수의 증거자로 부각시킨다. 요한에 대한 모든 언급이 예수의 증인으로서 일관성을 보인다. 1:7-8, 1:15, 1:19-36, 3:22-30, 5:33-36, 10:40-41 요한에 대한 기사 모두 예수를 증거 하는 요한의 모습으로 채워져 있다. 공관복음서가 예수의 사역 시점을 세례요한이 옥에 갇혀 사역이 중단된 이후로 보도하며(마4:12, 막1:14) 예수를 세례요한의 후계자로 말하는데 반해 요한복음이 요한과 예수의 동시 사역을 보여주는 것(3:26)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이는 요한복음의 주제와 완전한 통일성을 이룬다. 참 빛, 본래부터 있던 빛에 대한 증언으로서 요한복음은 그 복음의 기원인 세례요한을 그 빛에 대한 증언으로 배치시켜 빛에 대한 증거를 강화한다. 특별히 5:35절은 세례요한을 잠시 켜 있는 등불에 비유함으로서 영원한 빛이신 예수와 대조시킨다. 이는 일시적 질서인 율법이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는 5:39의 말씀과도 동일한 맥락에 서 있다.

일시적 질서인 율법은 예수께 귀속될 때 참 의미를 지니게 된다. 또한 일시적 빛인 세례요한도 예수께로 물꼬를 틀어야 온전한 의미를 지닌다(1:37, 3:28).

2010년 9월 8일 수요일

요한복음연구 1

요한복음 1장 1-18절

서론 : 세상의 참된 법칙으로서의 예수


요한복음은 철저하게 유대적인 책이다. 이 사실은 서론인 1~18을 보면 분명하게 나타난다. 서론은 요한복음 전체를 요약하는 역할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적 질서와 완전하게 대조하며 그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서론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율법의 대조이다. 예수는 태초부터 있었고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준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말씀으로 번역된 ‘로고스’라는 단어는 단순한 ‘말’의 개념을 넘어서는 헬라 철학적 개념을 포함한다. 즉, 궁극적 원리, 도, 법칙이라는 개념을 포괄하고 있는 단어이다. 이는 요한복음이 유대적 율법질서와 비교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곧 질서가 창조된 것이 아닌 본래적인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한 단어로 보인다. 율법이라는 인간적 법칙, 모세로 말미암은 세상의 체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창조적 질서, 법칙을 나타내기 위해 요한복음은 예수를 ‘말씀’으로 표현한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세상에 의해 창조된 법칙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법칙 이전에 존재하는 궁극적인 법칙이고 그 법이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요한복음은 창세기적 이미지로 시작해서 창세기적 새 창조로 끝을 맺는다(20:31). 1절의 ‘태초에’는 창세기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만물이 지어졌다는 3절의 표현은 요한복음이 의도적으로 창세기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을 증명해 준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며 빛을 만드셨는데 그 창조세계가 빛을 잃어버리고 어둠 속에 방치되어 있다. 깨어지고 망가진 창조세계, 이것이 요한복음의 시작이다. 새로운 질서가 왔지만 깨어진 창조세계 안에서 사람들은 참 빛을 알아보지 못했다. 요한이 와서 빛에 대하여 증거 하였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은 이제 유대 세계로 구체화 된다. 11절의 ‘자기 땅’은 분명하게 창조의 핵심 안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의미한다. 이는 1:49에 있는 ‘이스라엘의 임금’은 이 말씀의 반영이다.

그러나 본래부터 있던 빛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는 철저하게 유대적 창조 소망과 대치되는 것이다. 이제는 혈통이나 사람의 계보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 백성, 참 창조백성이 되지 못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를 통한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러한 요한복음의 핵심적 주제는 요한복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과 대치시키는 것에서 분명해진다(17절).

여기에서 율법과 은혜는 칭의론에서 말하는 개념을 넘어선다. 사실 칭의론은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왜곡시켜왔다. 율법의 부정적이 측면만을 강조해서 성경이 말하는 참 은혜, 또한 하나님과의 언약으로서의 율법을 오해했다. 여기에서의 율법은 창조세계 안에 있는 이스라엘의 독점적 위치, 그리고 배타성과 관련이 있다. 율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13절), 율법의 계약 백성(17절)이라는 이스라엘의 독자적 지위의 근원으로서의 율법은 한시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본래적인 법칙이나 원리가 아니다.

본래부터 있던 참 말씀, 참 법칙이 우리 가운데 계시되었는데(14절), 모든 사람은 그 법칙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하나님의 자녀라 함은 부활적 존재를 의미한다. 망가진 창조세계에 드리워 있는 어둠을 비추는 빛은 궁극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를 의미한다. 모든 어둠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셔서 참 생명의 빛을 비추시며 창조세계를 회복하시는 예수 안에서 새로워진 존재가 곧 예수를 영접한자,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새 창조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고 자녀를 삼으신다.

2010년 9월 3일 금요일

카페, 세상과의 소통

상상카페?

저는 교회 개척을 하면 꼭 카페를 하고 싶습니다.

교인들만 찾는 공간이 아닌 교회밖의 행인들이 와서 쉬며 안식할 수 있는 카페 말입니다.

커피를 만들며 함께 커피를 마시며 그렇게 말입니다.

이유를 묻는다면,

우선은 멋져 보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멋'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 때로는 치열하겠지만 그 속에서도 '멋'을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커피를 만들고 일 하는 시간들이 쉽지 않고 고단하겠지만 말입니다.

다음은 교회가 세상과 소통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에서 목사의 역할은 절대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가 세상과 소통하는만큼 교회는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갖게 됩니다.

저는 교회 사무실에 갖혀 있는 목사가 되고싶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루종일 분주하게 여기저기 오가는 목사가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사무실이나 서재에 갇혀 있는 목사는 가슴을 잃어버리기 쉽고 분주하게 일하는 목사는 머리를 잃어버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커피를 나누며 자유롭게 대화하고 서로의 삶을 진솔하게 나눌 수 있는 목사가 되어 진정한 영적 삶을 살고 싶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역동적 능력이 될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나'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내'가 만나는 곳이 제가 생각하는 카페입니다. 또한 만남의 통로뿐만 아니라 세상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도구로서의 카페를 꿈꿉니다.

문턱 한 번 넘기 버거운 종교적 울타리를 치우고 누구나 찾아와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지역사회의 오아시스와 같은, 그런 카페를 꼭 하고 싶습니다.

2010년 9월 2일 목요일

교회를 위한 교회?

보시기 참 좋았더라 하시며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파국으로 치달았다.

사람들은 '바벨'탑을 쌓으며 하나님께 대적하고 스스로 이름을 내려고 안달이다.

이 사건 직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시작인 아브라함을 부르셨다는 사실은 참으로 시사적이다.

무너지고 망가진 하나님의 세계를 구원하기 위하여, 새롭게 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부르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사명은 이사야 선지자가 분명하게 말하고 있듯이 '이방의 빛'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둡고 망가진 하나님의 창조세상을 회복시키고 살리는 것이다.

망가진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출되는 것이나 다른 세상으로 옮겨가는 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계획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세계를 회복시키고 살리는 사명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사실, 이스라엘은 그런면에서 볼 때 실패했다. 스스로를 이방의 빛이 아닌 특권자로 이해하면서 하나님을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 가두었다.

교회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하나님의 큰 그림 안에서 교회의 위치는 무엇인가?

죄 많고 더러운 세상에서 탈출하는 비상구인가? 더 많은 사람들을 모아서 지하 벙커로 이끌어가는 구조대원인가?

실패한 이스라엘처럼 교회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특권집단으로 이해하고 다른 세계로의 탈출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은 성경을 아무리 살펴도 너무나 낯선것이다.

망가진 세상을 고치기 위해 이스라엘을 부르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을 고치고 치유하기 위해 부활공동체인 교회를 부르셨다. 이것이 교회의 가장 핵심적인 정체성이다.

요한복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마리아의 입에 '예수를 동산지기로 알았다'는 말을 넣은 것은 참으로 놀랍다.

이 그림에서 에덴동산을 돌보는 아담과 부활하신 예수는 중첩된다. 즉, 부활하신 예수를 하나님의 창조 세계인 에덴을 가꾸는 동산지기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따르는 교회는 '동산지기' 즉,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새롭게 변화시켜가는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탈출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작금의 많은 교회들이 교회의 모든 방향과 프로그램을 '자신의 교회를 위한' 것에 두고 있음을 본다.

오직 교회성장과 교인들의 편의를 위해서 교회가 존재하는 것 같다. 교인은 교회성장이라는 목회자의 영적 탐욕을 만족시켜주고 목회자는 '은혜'라는 말로 빙자된 교인들의 사적 욕심을 채워주는 공생관계가 된 듯 하다.

교회는 다른 세계로의 탈출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창조세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다. 즉, 교회는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특별히 상상교회는 지역사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아래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헌신하는 교회이다.

그러므로 상상교회는 교인들에게 높은 수준의 헌신을 요구하며 분명한 사명감을 요구한다. 교회성장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별 의미가 없다.

2010년 9월 1일 수요일

부활절 중심의 교회

한국교회 대부분 절기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관심을 가져도 예전 색깔 맞추는 정도다.

가장 화려하게 치뤄지는 절기는 성탄절이고 다음으로 강조되는 절기는  고난주간이다.

부활절은 사순절이나 고난주간의 부록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성경을 들여다 보면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부활절이 있음을 보게된다.

아무리 살펴봐도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의 부활이다.

성탄절은 사실 기독교 신앙에서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마가복음에는 예수의 탄생기사가 아예 나오지 않는다.

부활절은 고난주간의 부록이 아니라 고난주간이라는 전주곡 뒤에 이어지는 위대한 합주곡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부활주일 이후 성령강림주일 전까지 6주는 부활절로 교회의 가장 큰 축제가 되어야 하고 부활을 축하하며 그 안에서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는 주간이 되어야 한다.

특별히 부활주일 이후 한 주간은 가장 큰 축제의 기간이며, 이를 위하여 교회의 프로그램이 준비되어야 한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교회의 사명과 매우 밀접한,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교회의 사역을 지시하기 때문에 부활절 기간에 교회의 사명은 재천명 되어야 하고 새로워져야 한다.

상상교회의 모든 교회력과 절기는 부활절을 중심으로 형성되며 운영될 것이다.

2010년 8월 25일 수요일

사회적 약자를 위한 'SERVICE'

상상교회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SERVICE' 라는 7가지 가치에 의해서 운영됩니다.

그 시대의 사회적 약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사회적 약자는 조금씩 변해가기 때문입니다.

고대 시대에는 군사력을 가지지 못한 약소 국가, 또는 부족이 약자였습니다.

때로는 권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 때로는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 사회적 약자로 부각되기도 합니다.

물론, 사회적 약자의 전무후무한 강자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최근에는 사회적으로 40대 남성이 돈벌이 자리로 몰려나면서 약자의 자리에 선 것 같습니다.

또, 정신적 문제가 대두 되면서 사회적으로는  성공한 듯 하지만 심리적, 가정적 문제로 고통받는 약자들도 있습니다.

어쨌든, 약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더 구체적으로 차근차근 풀어갈 것이고, 상상교회는 지역 사회의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SERVICE'를 이루어 가는 교회입니다.

Serving (섬김과 봉사) : 교회는 세상을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 섬기는 곳이기에 가장 핵심적인 가치는 섬김입니다.

Education (교육) :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교육입니다. 심리적, 사회적, 기능적으로 적절한 교육이 지원될 때 그들은 도움을 가장 적절하게 받게 됩니다.

Restore and healing (회복과 치유) : 사회적 약자들은 심한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치유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들은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Valuation (가치부여) : 교육과 치유를 통해 자존감이 회복되면 스스로 자신들에 대한 가치 부여가 가능해지고 이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동기부여가 됩니다.

Influence extention (영향력 확대) : 사회적 약자를 향한 섬김의 핵심에는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시켜 사회 구성원으로서 긍정적 삶을 살아가게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Contribution (기부) : 교회는 사회적 약자들을 교육하고 치유하기 위하여 많은 사회적 비용이 필요하고 이는 교회구성원들의 기부를 통하여 해결됩니다.

Evagelism (복음 전파) : 이 모든 섬김은 복음 안에서 이루어지며 복음의 능력을 통해 사회적 약자들은 구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2010년 8월 20일 금요일

당신의 가치

어떤 순간, 어떤 처지에서도

당신의 고귀함은 변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비하하고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는다면

당신은

깊은 사막 한 복판에 당당히 피어난

선인장 꽃처럼 생명의 향기를 발할 것입니다.

믿음의 어깨를 펴고

생명의 기지개를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이십니다.

2010년 8월 18일 수요일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방향

교회의 사회참여가 한때 교계의 논쟁거리인적이 있었다.
주된 논지는 교회의 사회참여가 정당한 것인지, 하나님의 뜻에 합한 것인지, 등등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논의는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사람들이 교회의 사회 참여를 인정하며 동참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시점에서의 논점은 가,불가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사회에 참여하며 교회가 사회에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되짚어 볼 때,
교회의 사회참여는 전반적으로 비교적 진보적 교단과 목회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보수교단과 보수목회자가 교회성장과 전도에 힘을 쏟았다면
진보교단 및 진보적 목회자는 사회참여와 교회의 책임에 집중해 왔다.
물론 이 말은 모든 보수가, 모든 진보가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런 성향을 조금 더 가졌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제는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정치인들에게 목소리를 내고 영향력을 행사하며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방식으로, 혹은 어떤 방향으로 세상에 발을 들여 놓아야 하는가?

우리나라에 선교사들이 들어온 이후 80년대까지 교회의 사회적 책임은 단연 교육과 의료서비스였다.
교육과 의료 서비스에 형편 없던 시절 선교사들이 세운 병원과 학교는 세상을 고치고 싸매는 매우 중요한 도구였다. 그 때 세워진 학교와 병원들이 지금도 명문학교, 명문병원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90년대 들어서면서 교회의 사회참여 방향에 변화가 왔다.
국가의 교육, 의료 서비스 질이 높아지면서 복지 쪽으로 뱡향을 돌린 것이다.
특별히, 아동에 대한 복지,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고 이는 전반적인 복지서비스에 대한 국가적 정책들을 이루어냈다.

2000년대에는 지속적인 복지정책 수립과 가정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강세를 보였다.
복지는 특별히 노인들에 대한 관심이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며 높아졌고 이혼가정, 한부모 가정이 늘어나면서 가정에 대한 프로그램들이 많아졌다.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에 이어지는 사회적 필요는 '상담'과 '교육'이다.
물론 의료나 복지 등 지금까지 교회가 관심을 가져왔고, 그 결과 국가적 정책으로 확립된 주제들은 여전히 중요하고 더 확장될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러한 주제들은 이제 더 이상 교회가 관심을 갖고 주도해 나가지 않아도 국가가 담당하기에 충분해 졌다.
국가의 복지정책들은 지난 10년간 매우 잘 다듬어졌고 확장되었다. 의료서비스 또한 비교적 잘 정착했고 일반적인 교육 또한 그렇다.
누구나 원하면 어렵지 않게 이러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며 사람들에겐 새로운 필요들이 생겨난다. 가정의 문제와 정신적 황폐화로 사람들은 '전문적 상담'을 더욱 필요로 하게 되었다.
또한, 지나친 경쟁교육과 공교육의 황폐화로 교육에 대한 새로운 요청이 대두되고 있다. 누구나 원하면 기본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지만 바른교육, '정상적인' 교육에 대한 요청이 강력해 지고 있는 것이다.

향후 20년은 교회가 세상을 향해 '상담'과 '교육'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
일반적인 복지 정책은 국가가 감당한다. 그러나 아직 '상담'은 그렇지 못하다.
상담비용은 아직도 턱없이 비싸고 기관도 많지 않다. 의료보험도 안 된다.
학위과정중에 있는 실습생에게 상담을 받아도 시간당 5만원이 넘는다. 외국물 먹은 박사에게 상담을 받는 것은 시간당 최소 10만원에서 30만원을 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상담을 필요로 하지만 아직은 넘기 힘든 산이 가로막고 있다.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사교육비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이건 아니지 하는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딱히 대안이 없다.
지나친 경쟁에서 아이들을 구원해 내고 싶어도 길이 없어 막혀 있는 사람들이 많다. 더욱이 이런 비정상적인 교육 환경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교회는 정신적, 가정적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고치는 일을 해야한다. 또한 잘못된 교육 환경을 개선시키고 바른 인격과 마음으로 양육될 수 있는 교육환경을 교회가 만들어 가야 한다.

상상교회의 사회참여 방향은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네트워크이고 다른 하나는 주도적 운영이다.
국가가 주도적으로 감당하고 있는 복지정책들은 마땅히 교회가 함께 품고 가야 할 일들이다.
그러나 80-90년대처럼 교회가 이런 복지정책들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수는 없다.
그래서 상상교회는 지역 사회의 복지정책들과 연합하고 네트워크하여 지역을 섬긴다.
지역사회 복지정책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이다. 이제는 비교적 복지 예산이 풍족하고 더 풍족해질 것이다. 문제는 다양한 자원봉사자의 부족이다.
상상교회는 이 일을 감당할 것이다.
상담과 교육적 대안은 아직 국가가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들이다. 이 부분은 향후 10-20년 간 교회가 주도적으로 감당해야 할 부분들이다.
상상교회는 상상카페를 중심으로 상담실이 운영되고 전문적인 상담에서부터 가정문제, 신앙상담에 이르는 전반적인 상담 센터를 운영한다.
또한 지속적으로 교육 대안을 연구하고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주도적으로 운영해 갈 것이다.
적어도 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반경 10Km 안에서 누구든 이런 서비스를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2010년 8월 11일 수요일

목사의 월급과 촌지

한 포털 사이트 정보검색에 한 청년이 질문을 올렸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 담임 목사의 연봉이 1억원, 매달 활동비로 1천만원이 지급되는데 적정한 것인지 묻는 질문이었다.
많은 답글이 달린 것은 아니지만 역시나 대다수가 기독교를 비난하는 글이었다.

목사의 월급, 얼마 정도면 적당한 것인가?
사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목사들은 월 200~300만원의 월급을 받는다. 내 생각엔 70% 가량의 목사가 그렇다.
5% 미만의 목사가 월 500만원 이상의 월급을 받고 20% 이상은 200만원 미만의 월급으로 생활을 한다.
목사의 하루 일과는 새벽 5시 새벽기도로 시작해서 심방과 상담, 설교준비, 잡다한 행정 업무, 때로는 차량 운행과 교회 보수작업, 심지어 교회 청소까지 매우 다양한 일들로 채워져 있다.
하루 일과가 일찍 끝나면 5-6시, 보통은 10-11시에 끝이 난다.
또한, 정규 교단에 소속된 목사들은 대부분 석사 학위 이상의 공부를 마친 고학력자이다.
이러한 여러 상황들을 종합해 볼 때, 비슷한 수준의 학력과 능력을 갖추고 비슷한 양의 업무를 처리하는 다른 직종에 비해 사실 월급의 수준은 현저히 낮은 것이 사실이다.

목사의 월급을 가지고 목사를 비난하는 글을 볼 때 목사로서 솔직히 속이 상한다. 대부분의 목사가 기초 생활비 밖에 안 되는 돈으로 생활하며 밤낮으로 일하는데 억울한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또한 한국교회의 자화상이고 세상에 비쳐지는 모습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더 속상하다.

그러나 일부 목사들이 지나치게 많은 월급을 받는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일명 촌지(寸志)가 그것이다.
교인들은 일반적으로 목사에게 감사의 표현으로 교통비나 책값에 보태라고 촌지를 건넨다.
목사의 월급이 지금보다 훨씬 더 형편 없던 시절, 교인들이 목사의 궁핍한 생활에 도움을 주고자 했던 일종의 기부 행위가 관례로 남아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학교나 다른 기관에서, 혹은 정치인들이 댓가를 바라고, 혹은 모종의 이익을 얻기 위해 건네는 촌지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댓가를 바래서, 혹은 이익을 얻고자 하는 행위가 아니라 대부분이 마음의 감사나 기부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 촌지 문화는 빨리 정리되어야 할 구습이다. 이유는 여러가지이다.
첫째, 목사에 대한 감사의 표현은 돈이 아니라 존경과 순종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목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가르치며 바른길을 지도하는 자로서  교인들의 존경을 먹고 산다. 그러므로 목사에 대한 감사의 표현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다.
둘째, 목사에 대한 예우는 성도들 개인의 몫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몫이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헌금을 목사 개인이 관리하고 유용한다고 오해한다. 그러나 교회에 기부되는 헌금은 교회 공동체가 세운 사람들에 의해 투명하게 관리된다. 마찬가지로 목사에 대한 예우도 교회 공동체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 틀 안에서 목사의 월급과 기타 필요 경비가 지출되는 것이다. 목사의 생활비나 활동비가 부족하다면 그것을 채우는 것은 성도 개인의 몫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결정에 따른 몫이다.
셋째, 교회 안에서는 누구도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 안에는 부자도, 가난한 자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데 조금의 불편함이나 열등감으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 촌지 문화는 이러한 연합과 일치를 깨뜨리기 쉽고 불필요한 갈등을 초래하게 된다. 목사의 양심과 공정성을 위해서 촌지는 사라져야 한다.

상상교회는
적절한 수준에서 목사의 월급을 결정한다. 촌지는 어떠한 경로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교인들은 헌금 중 일부를 '목회자 지원비'로 기부할 수 있고
그렇게 모여진 헌금은 목회자의 활동과 더 나은 목회를 위한 교육비, 예비목회자 양성을 위한 장학금 등으로 사용될 것이다.

상상카페, 상상교회

교회개척을 생각중이다.

물론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교계의 상황과 개인적인 미래 사역 계획에 이르는 현실적인 문제들과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교회들이 지역사회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들을
극복해 보고자 하는 개인적 도전,
급변하는 시대에 교회의 미래전망과 표본 샘플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소망,
그리고 참 교회를 향한 영적 갈망 등이 함께 작용하고 있다.

상상카페, 이것이 시작이다.
세상과 소통하며 세상을 치유할 수 있는 곳,
위엣것을 생각하며 아래로 내려가는 곳,
그곳이 상상카페이고 상상교회이다.
바른 교회를 생각하며 변해야 하고 집중되어야 할 것들을 정리하기 위해 문을 열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해...